매거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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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May 14. 2017

'카지노 쿠폰 날'을 폐지하자!

카지노 쿠폰 날을 앞두고

1. 카지노 쿠폰 날 폐지에 대한 짧은 생각.


생각해보니 벌써 선생이 된 지 참 오래 세월이 흘렀다. 몇 년 더 있으면 30년이 된다. 참 어이없는 세월이다. 내일은 카지노 쿠폰의 날이다. 30년이 다 되어 가는 다만 선생인 나의 생각으로 이 날은 참으로 부끄럽고 아픈 날이다. 우리는 단지 선생일 뿐, 여전히 카지노 쿠폰은 아니다.


카지노 쿠폰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전적인 뜻으로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가르치는 일은 대충 어림짐작으로 할 수 있겠으나,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일은 대략 난감한 일이다. 인도(引導)란 길이나 장소 또는 방향을 안내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나 아닌 사람을 특정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인도한다는 말속에는 타인(내가 가르치는 제자들)의 삶에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 특정인의 삶에 개입하는 문제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일단 타인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개입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 모두에게 예측하기 어려운 다양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또, 거기에는 인도하는 사람(여기서는 카지노 쿠폰이라는 불리는 존재)의 품성과 지성,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이 종횡으로 연결되어 개입의 대상이 되는 타인(일반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막상 이렇게 생각하니 카지노 쿠폰의 그림자도 못 따라가는 내가, 그동안 카지노 쿠폰의 흉내를 내며 직, 간접적으로 개입했던 나의 모든 제자들의 삶을 생각해 본다. 카지노 쿠폰이 아닌 선생으로서 나는 얼마만큼 되는 인간인가? 나는 어느 정도의 지식과 덕성을 지니고 있으며 과연 내가 특정인의 삶에 개입할 정도의 기반을 갖춘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예리하게 나를 찌른다. 부끄럽고 또 아프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이미 지난 30여 년, 단지 선생이었던 나의 개입에 대해 지금 와서 후회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 다만 나의 개입이 나의 제자들의 삶에 중대한 危害가 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설사 위해가 되었다 하더라도 지금 와서 어쩔 것인가? 뒤늦은 참회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카지노 쿠폰’의 길은 멀고도 멀어 보인다. 그리고 함부로 카지노 쿠폰이라는 명패를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일, 카지노 쿠폰의 날은 이제라도 없애야 마땅하다.


이 땅에 카지노 쿠폰은 참 많지만 그들 중 누구도 스스로 카지노 쿠폰이라 칭하는 사람들은 없다. 스스로 카지노 쿠폰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카지노 쿠폰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사람들일 가능성도 있다. 카지노 쿠폰은 스스로 그 위치에 오를 수 없는 것이어서 자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대부분이 카지노 쿠폰으로 불러 주기 전에는 아무도 카지노 쿠폰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분명하지 못한 조건을 위해 기념일까지 있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내일 하루 나는 참으로 힘든 마음으로 학교에 등교할 것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우울하게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고 선생으로 현재를 아파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날의 작은 효용이 있다면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힘든 하루를 보내는 것이라는데 겨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 지난 2011년 상영된 "완득이"


나는 선생이다.


내일 카지노 쿠폰 날을 앞두고 2011년 상영한 완득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올려본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별로 없지만 선생으로 사는 일이 날로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땅에서 선생이라는 직업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 평가의 다양성은 다분히 시대상황과 맞물려 있다. 해방 이후 서양식 교육과정에 따른 학교에서 선생으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정권의 나팔수로, 때로는 입시경쟁의 선봉장으로, 또 때로는 민족과 민주라는 대의명분에 목숨을 건 적도 있었다. 이제는 임용이라는 육중한 관문 탓에 선생으로 진입하기가 어려워져 상대적 위상이 높아진 듯 보이지만 사실은 거의 착시효과에 불과할 뿐, 천민자본주의의 중심에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결코 높아질 수 없는 위상일 거라고 생각한다. 선생으로 살아온 삶은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로 회한이 있다. 광포한 시대에 처참했던 해직의 경험도, 입시경쟁에 이기기 위해 학생들을 그곳으로 내 몰아 본 경험도 있었다. 그 모두가 뜨거운 열정 때문이었지만 때로는 돌아서 가슴을 쥐어뜯는 후회를 한 적도 있다. 이제 중년의 나는, 아이들과 마음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이 어떤 때는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여지없이 내팽개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용광로처럼 나의 삶에 녹아들고 있으며 그것이 선생으로서의 삶이라고 담담히 생각한다.


‘완득이’들의 학교

나는 인구 30만의 중소도시에서 선생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2005년 인근의 면지역 학교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소도시에서도 거의 대부분을 실업계에서 보냈으므로 ‘완득이’보다 훨씬 더 열악한 학생들을 보아왔고 또 가르쳐왔다. 영화에서 ‘완득이’가 사는 참담한 도시 빈민의 삶에서부터 더 열악한 농촌지역의 삶까지 내가 보아 온 ‘완득이’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었다. 영화의 ‘완득이’는 어찌 되었든 부모가 있고 그중 한 분이나마 ‘완득이’를 부양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내가 보아 온 ‘완득이’들은 부모가 이미 없거나, 있다고 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상황의 아이들도 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완득이’(유아인 분) 담임인 ‘똥주’(김윤석 분)라고 불리는 선생의 이미지에 대해 현재 학교 아이들이 영화를 본 뒤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 : “선생님과 똑같아요”

나 : “왜?”

아이들 : “욕하고 때리는 거요”

나 : “훌륭한 선생이네!”

아이들 : “다른 것도 조금 닮았어요!

나 : “뭐가?”

아이들 : “음......”


내가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왜 마지막 질문에 망설였는지 알 것 같았다. ‘동주’라는 캐릭터가 주는 묘한 매력은 그가 교사로서의 정형성을 벗어난데 찾을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인체”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날것을 보여주는 과감성과 그것으로부터 올 수 있는 위험을 담담하게 받는 카지노 쿠폰 교사 ‘동주’의 큰 매력이자 동시에 최대의 약점인 카지노 쿠폰다. 폭발적인 성격에서 비롯되는 좌충우돌과 그 이면의 따뜻한 인간의 모습은 ‘완득이’인데 어쩌면 그 모습이 곧 ‘동주’인 셈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분석하는 기준으로 우리는 경제적 요인을 그 처음으로 꼽는다. 그러나 사실 그 어두움의 결정적 원인은 대부분 도시 빈민들에게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무기력이다. ‘동주’의 말처럼 몸뚱이 생생한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카지노 쿠폰 더 쪽 팔리지만 어떤 것에서도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무기력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기력은 사회에서 조장되기도 하고 또 스스로 획득되기도 한다. 2011년 현재의 도시, 농촌의 하층민들에게 있는 무기력은 조장된 무기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빈부 격차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비롯된 무기력이 그카지노 쿠폰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빈부의 격차를 발생시키고 그 격차를 국가는 최선을 다해 줄여 나가는 카지노 쿠폰 현대 복지국가의 책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그 국가의 책무를 등한시하고 가끔은 국가가 나서 오히려 그 격차를 심화시키는 일을 하기도 한다. 욕을 잘하는 옆집 아저씨(김상호 분)의 대사에 나오는 “나는 집주인이고 당신들은 세 든 사람이야”에서 우리는 도시 빈민의 절망을 느낄 수 있다. 폐허가 된 너저분한 카바레, 옥탑 방, 어두운 개척교회, 빈민가의 오르막길, 폐차 직전의 경차, 킥복싱 도장, 황량한 시골 장터 이러한 공간적 장치는 영화를 보고 있는 내내 우리를, 아니 나를, 슬프고 음울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꼽추 아버지와 바보 삼촌은 그것을 더욱 심화시킨다.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완득이’의 심리 변화였고 그의 필리핀 어머니와 같은 반 여학생에 대한 '사랑'이었다.


다문화 사회

언제부터인가 우리도 다민족, 다문화로 진화하고 있고 이미 외국인의 수는 100만을 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 땅에서 살고 싶어 하고 또 국적을 취득한 사람도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의식은 이러한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도 이미 베트남, 몽고, 우즈베크 학부모가 있다. 아직 그들과 면담해 볼 기회는 없었지만 나 역시 학생 면담 때문에 그들과 마주하는 것이 조금은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주’의 행동은 80년대 민주화 운동만큼이나 혁신적이고 진보적이다. 그러니 그가 보통 선생인가? 그는 이 시대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선생이다. 내가 그를 닮았다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가 내게는 참으로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동주’의 다문화사회에 대한 해법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지만 거기에는 종교보다는 훨씬 더 사람 냄새나는 모습이 더 많다. ‘완득이’의 어머니(이스 자민 분)를 통한 ‘완득이’의 심리 변화를 유도해내는 ‘동주’의 태도는 이를테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더불어 우리의 마음 역시 그 장치에 부가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똥주’ 선생으로 살아가기

나는 이제 20년 이상을 선생으로 살아왔다. 또 앞으로 10년 이상을 선생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와중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과 함께 그 시간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나와 아이들은 ‘동주’와 ‘완득이’로 만나고 또 헤어지게 될 것이다. 나의 유일한 바람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교육으로 영화의 ‘완득이’처럼 이 사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 주는 것이다. 나는 끝까지 ‘동주’로 남아야 하는 부담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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