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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Jan 24. 2025

다시,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시어도어 로빈슨(Theodore Robinson), 피아노 치는 사람(At the Piano)


얼마 전, 작은 콘서트홀에서 피아노 연주회가 열렸다. 아이는 홀로 무대에 올라 반짝반짝 광이 나는 검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긴장한 얼굴로 연주했다. 잔뜩 경직돼 손가락이 미끄러지기도 하고, 엉뚱한 건반을 누르기도 하고, 박자가 느려지기도 했지만, 아이는 무대 위로 쏟아지는 조명을 받으며 홀로 빛났다. 그 몇 분의 시간을 위해 몇 달 동안 매일같이 꼬박꼬박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했던 시간을 생각하니 긴장감에서 비롯된 연이은 실수들마저도 그저 감동적이기만 했다.


아들의 연주를 보면 늘 처음이 떠오른다. 지금은 본인이 원해서 라흐마니노프니, 쇼팽이니 하는 어려운 곡들을 취미 삼아 연주하며 ‘우리 학원에서 피아노 제일 잘 치는 오빠’로 이름을 날리지만, 맨 처음 피아노를 배웠던 초등학교 1학년 때만 해도 선생님의 성화에 못 이겨 간신히 숙제만 해가는 아이였다.


당연히, 연주해보고 싶은 곡 같은 건 없었다. 어쩌면, 그 무렵의 아이에게 피아노 연주는 일종의 고행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원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그런 귀찮고 성가신 일이었던 듯하다. 그랬던 아들은 두 번의 사건을 겪으며 이제 틈이 날 때마다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아이가 됐다.




미레미레미시레도라를 위하여

첫 번째 사건이 벌어진 건 1학년 가을이었다. 학예회에서 무언가 재주를 선보여야 하는데 아들은 마땅히 선보일 게 없다며 고민에 빠졌다. 며칠을 고민하던 아들이 ‘미레미레미시레도라’라는 곡을 치고 싶다며 알려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제목은 모르지만 어디선가 들어봤고 문득 치고 싶어졌다는 ‘미레미레미시레도라’는 다름 아닌 그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미레미레미시레도라’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할 수 있는 수준과는 거리가 먼 아이의 실력이었다. 간신히 기본기만 익힌 아이를 위해 먼저 가장 쉽게 편곡된 악보를 구한 다음 그중에서도 가장 쉬운 핵심 부분만 모았다. 노래의 큰 흐름은 유지하되 기교가 필요한 부분들을 교묘하게 잘라내니 그럭저럭 아이가 칠 만한 수준이 됐다.


학예회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이는 피아노를 치고 또 쳤다. 매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탓하며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긴 했지만 아이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피아노를 쳤다. 물론 실력이 늘수록 짜증은 줄어들었다. 몇 주 동안 연주를 준비한 끝에 마침내 찾아온 학예회 날, 아이는 최고의 기량을 뽐내며 훌륭하게 연주를 끝냈다. 그날의 ‘엘리제를 위하여’는 아이에게 꾸준한 연습을 통해 제대로 한 곡을 연주하는 기쁨을 알려주었다.


너의 마음을 두드린‘카지노 게임’

몇 달이 흘러 2학년이 된 아이의 마음을 또다시 두드린 노래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주제곡으로 잘 알려진 일본 작곡가 히사이시 조의 연주곡 ‘카지노 게임’였다. ‘카지노 게임’를 연주하고 싶은데 도대체 악보를 읽을 수가 없다며 내가 ‘카지노 게임’를 쳐주면 내 손가락을 보고 따라 치겠다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단박에 해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제대로 된 곡을 연주해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자신이 없었지만 이참에 나도 다시 피아노 세계에 입문해보고 싶은 마음에 기꺼이 연습을 시작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서 늘 가장 먼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손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악보도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음표의 위치가 가운데 도에서 멀어지면 나도 모르게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악보를 한참 노려보며 칸을 헤아렸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손가락 근육을 다시 사용하고, 기억 저 너머에 묻혀 있었던 ‘악보 읽는 법’을 다시 떠올려가며 며칠 동안 맹연습을 했더니 멜로디가 제법 그럴듯해졌다.


아이는 내 손을 보고 멜로디를 조금씩 익혀가며 ‘카지노 게임’를 완성했다. 아이는 몇 년 새 내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고 ‘카지노 게임’를 간신히 따라 하던 수준을 뛰어넘어 혼자서도 쇼팽을 치는 실력을 갖췄다. 아이와는 반대로, 나는 이제 ‘카지노 게임’조차 치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나도 쳐볼래, ‘쇼팽

몇 년 전, 조성진이 연주하는 쇼팽 폴로네이즈 ‘영웅’을 듣고 나는 마음을 빼앗겼다. 악보 사이트에서 간단하게 몇천 원쯤 내고 악보를 샀다면 두어 번쯤 시도하고 금세 포기하고 말았을 테다. 하지만 시간이 걸려도 제대로 쳐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신중하게 악보집을 고르고 골라 아마존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악보를 공수해서인지 언젠가는 치고 말겠다는 목표가 희미하게나마 마음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2년 전쯤 악보가 배송된 이후로, 아이는 틈틈이 내게 물었다.


“엄마, 도대체 저건 언제 칠 거야?”


난 늘 크리스마스라고 답했지만, 벌써 두 번의 크리스마스가 그냥 흘러갔다. 며칠 전, 아들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카지노 게임’에서 시작해 ‘터키 행진곡’을 거쳐 ‘영웅’으로 넘어가라고. 귀가 번쩍했다. 내 수준에 당장 쇼팽을 치겠다고 덤비는 것은 용기나 결단과는 거리가 먼 실현 불가능한 헛된 꿈이었다. 사실 혼자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너무 어려워 허둥지둥하다가 연습을 마무리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Summer’라면 얼마든지 다시 시도해볼 만하다. ‘카지노 게임’를 치면서 손가락을 풀고, ‘터키 행진곡’을 치면서 다시 기교를 연습하고, 그렇게 바라마지 않았던 ‘영웅’을 시도하는 단계별 학습! 정말 마음에 드는 플랜이다. 인생은 원래 step-by-step이니까. 반드시 거쳐야 할 스텝을 건너뛰지 않고 차근차근 밟아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오늘도 나는 ‘카지노 게임’를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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