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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Feb 28. 2025

카지노 게임 비행기(非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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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

세상에는 모순적인 말이 있다. 모순 때문에 더 매력적인 말도 있고 모순적이어서 이상한 말도 있다. ‘소리 없는 아우성’, ‘하얀 밤’, ‘아름다운 고통’ 등은 서로 정반대인 단어들을 한데 묶어 말의 맛을 한껏 살린 표현들이다. 반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억지로 끼워 맞춘 탓에 그저 어색하게만 들리는 말도 있다.


“엄마, 사랑의 매가 뭐야?” 책을 읽던 딸이 물었다. 한마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군가를 때리는 도구, 혹은 때리는 행위 자체를 일컫는 '매'. 그리고 누군가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지극한 마음을 뜻하는 '사랑'.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엉뚱하게 하나로 묶여 있으니 각각의 단어가 어떤 뜻인지 알아도, 그 의미가 쉽게 와닿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의 매’라는 모순적인 말이 생겨나고 그런 말이 힘을 얻은 것은 시대적 배경 탓도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가르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행태가 너그러이 용인됐다. 그런 시절에는 사랑이라는 허울을 덮어쓴 폭력을 미화하는 문장이 난무했다. ‘매를 아끼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성경 말씀이나 ‘귀한 자식일수록 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속담은 오랫동안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겨졌다. 거기에다, ‘전지적 가해자 시점’에서 탄생한 허튼소리들도 미디어에 등장하곤 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매 끝에 정든다’라거나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패야 한다’라는 대사를 읊는 일도 흔했다.


폭력과 야만이 사랑으로 포장되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2011년에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돼 교내 체벌이 금지됐고 2021년에는 자녀체벌금지법이 시행돼 가정 내에서의 체벌까지 금지됐다. 이제 이유를 불문한 모든 체벌이 폭력으로 여겨지는, 그야말로 ‘꽃으로도 때려서는 안 되는’ 시대가 됐다. 폭력을 터부시하는 정서가 대세가 되기 한참 전부터 나는 폭력이 끔찍하게 싫었다. 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광기가 더해져 걷잡을 수 없는 폭력으로 비화한 사건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중간고사

사건이 벌어진 건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 후 다시 5교시가 시작됐다. 종이 울리자, 우리 반 수학 담당이었던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담임은 멀대같이 키만 큰 중년의 아저씨였다. 여고생들을 설레게 할 만한 멋진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학생들의 종잡을 수 없는 반항기를 어리숙한 웃음과 멋쩍은 말투로 감싸곤 했던 걸 보면 상당히 따뜻한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수학 교사였지만 원래 체대 출신이었던 터라 수업 시간 내내 교사용 안내서를 그대로 베껴 판서할 뿐 뭘 물어봐도 답을 해주지 못하는 게 그의 최대 약점이었다. 그래서인지 2학년 3반 학생들은 담임을 은근히 얕잡아봤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쉽지 않았던 5교시. 담임의 등장은 그러잖아도 수업을 듣기 싫었던 2학년 3반 학생들의 마음을 더욱 요동치게 했다. 학생들은 만만한 담임을 붙들고 자꾸만 뚱딴지같은 소리를 해댔다.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둥 노래를 불러달라는 둥 학생들이 쏟아내는 신소리가 버거웠던 걸까? 아니면, 며칠 동안 시험을 치르느라 허옇게 얼굴이 뜬 학생들이 안타까웠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얕잡아보는 학생들한테 점수를 딸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던 걸까? 담임은 수업에 집중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이는 여고생들에게 호기롭게 말했다. “그럼 너희! 다 나가 놀아. 학교 안에만 있으면 돼. 어디든 좋아.” 담임의 어깨가 유난히 넓어 보였다.


반쯤은 책상에 널브러져 있던 학생들이 동요했다. 목줄에 묶인 채 우리 안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등 떠밀려 바깥세상으로 나갈 기회를 얻은 강아지 떼 같았다. 다들 우왕좌왕하며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주어진 시간은 딱 50분이었다. 짧고 굵게 자유를 만끽하려면 서둘러 뛰쳐나가야 했다. 짙푸른 하늘을 뚫고 해가 뜨겁게 쏟아져 내리는 가을 세상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이 모두의 마음에 숨어 있었다. 절반쯤은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기 시작했고, 나머지 절반쯤은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진짜예요, 선생님?”, “진짜 나가도 돼요?”, “만약 다른 선생님이 뭐라고 하면요?”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도 담임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다 책임질게. 걱정하지 말고 나가. 6교시까지만 들어오면 된다.” 시험에 찌든 학생들에게 자유를 안겨줘야 할 사명을 띤 영웅이라도 된 듯 그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카지노 게임의 비행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머지 학급의 카지노 게임은 모두 제자리에 앉아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듣고 있었다. 2학년 3반 카지노 게임이 5교시 수업을 빼먹고 놀 계획이라는 걸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됐다. 카지노 게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을 죽인 채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건물을 빠져나갔다. 텅 빈 운동장은 2학년 3반 차지였다. 길쭉하게 늘어선 회색 콘크리트 스탠드에 앉아 수다를 떠는 아이들도 있었고 서로 팔짱을 낀 채 운동장을 빙글빙글 도는 아이들도 있었다.


책상과 의자가 꽉꽉 들어찬 좁은 교실에서 벗어나 널따란 운동장으로 나오니 한결 기분이 좋았다. 푸른 하늘을 가득 메운 산소 입자들이 한꺼번에 몸속으로 왕창 밀려 들어오기라도 한 듯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렸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뜻밖의 자유’를 얻었는데 같은 반 친구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운동장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 50분의 자유를 최대한 만끽하려면 아무래도 텅 빈 도서관이 제격일 것 같았다. 함께 도서부 동아리 활동을 하던 단짝과 도서관으로 향했다. 단단하게 잠긴 두꺼운 철제문을 열어젖히니 퀴퀴한 책 냄새가 훅하고 나를 덮쳤다. 도서관에 앉아 매끈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시멘트의 냉기를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자유가 주는 황홀감에 사로잡혀 그저 행복했다. 도서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본관 건물에서는 수천 명의 카지노 게임이 책상 앞에 앉아 평범한 5교시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게 주어진 ‘갑작스런 자유’가 몇 곱절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짜릿한 해방감을 만끽한 후 가뿐하게 돌아간 교실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불그스레 달아오른 얼굴로 반 친구들은 모두 ‘그랜다이저(일본 만화에 나오는 로봇-옮긴이)’를 향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다. 로봇 같은 걸음걸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그랜다이저라는 별명으로 불려온 국어 교사가 운동장을 배회하던 2학년 3반 학생들을 모두 체벌한 것이 문제였다. 그랜다이저는 기강과 규율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한 교사였다. 교복 치맛단을 짧게 줄여 입었다거나 실내화를 똑바로 신지 않은 학생이 눈에 띄면 전속력으로 달려가 반드시 잡고야 말았다. 문제의 학생을 붙잡지 못하면 신고 있던 슬리퍼를 집어 던져서라도 혼쭐을 내고야 마는, 학교에서 제일 성질이 고약한 교사였다. 그가 일궈온 길고 긴 체벌의 역사는 선배에게서 후배로, 또 다음 후배에게로 전설처럼 전해져 왔다. 나 역시도 그가 대략 어떤 인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숱하게 전해져 오는 그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그랜다이저를 ‘엄격하지만 그래도 사명감은 있는 교사’라고 믿었다. 항상 매를 분신처럼 들고 다니면서도 자신의 매가 ‘사랑의 매’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일렁이는 햇살을 품은 운동장 모래가 해변 백사장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그 날 오후, 학생들을 체벌하던 그의 손끝에 사랑은 없었다. 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겠다는 교육자의 철학 같은 것도 없었다. 운동장에서 배회하는 학생들을 발견하고 곧장 운동장으로 뛰쳐나간 순간에는 그의 마음속에 ‘방황하는 어린 양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라는 사명감이 끓어올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업 시간에 뭐 하는 짓들이야?!”라는 불호령을 내던진 후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고서 한 명씩 차례차례 있는 힘껏 뺨을 올려붙인 순간 그의 사명감은 분노 가득한 광기로 변질됐다. 그의 체벌이 교육을 위한 ‘사랑의 매’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학생들에게 교훈을 남겼어야 한다. 그러나 시뻘게진 얼굴로 ‘그랜다이저 성토 대회’를 열던 2학년 3반 학생 중 손톱만 한 교훈이라도 얻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는 모두의 기억 속에 순간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더러운 폭력을 행사한 자격 없는 교사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세상의 모든 매를 싸잡아 비난하려는 뜻은 없다. 말 그대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식을 위해, 학생을 위해 매를 들 수밖에 없는 부모가, 교사가 절대로 없다고 단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자유를 만끽한 짜릿한 오후로 기억될 뻔했던 가을날이 거칠고 황폐한 폭력의 오후로 각인된 건 사랑의 매랍시고 사정없이 학생들의 뺨을 갈긴 카지노 게임의 비행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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