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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Dec 28. 2024

제카지노 가입 쿠폰. 오누이와의 인연

퇴임을 앞두고 40년의 교직생활을 회상하니 기쁜 일 슬픈 일들이 순식간에 파노라마 사진처럼 흘러간다.


감히 이 글을 먼저 싣는 이유는 내가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초임 첫 해 내가 한 최대의 실수, 아니 실수가 아니라 무지해서, 융통성이 없어서, 한 아이의 미래를 망치게 해서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정리해 본다.


해마다 겨울 끝자락에 어김없이 날아드는 연하장. 낯익은 J군의 필체. 조금 더 성공해서 찾아뵙겠다는 내용. 나 자신 나이 먹는 것은 잊어버리고 벌써 50대에 접어든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떠 올려본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3월에 ㅇ시의 남자 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1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겨울 방학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J군이 결석을 했다. 60명이 넘는 학생들 중에서 평소에 내성적인 J 군이라서 그런지, 친한 친구가 별로 없었으며 학교생활을 조용히 잘해서 달리 신경을 쓰지 않은 학생이었다. 전화도 오지 않고 연락할 방법도 없어서 개학 전에 주소를 들고서 집을 찾아갔다.

시내 변두리에 외진 지역으로 집이 가끔씩 있는 곳이었다. 물어 물어서 반장 집을 찾아가니

“안 그래도 찾는 사람이 많니더, 빚이 많다고 하던데... 한밤중에 일가족 모두 사라졌지요. 학생이 학교를 못 가게 되어서 어쩌지요?” 하며 측은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일러주시는 말씀이셨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동사무소에 가서 퇴거신고를 추적해 보니 ㄴ면으로 주소가 이전되어 있었다. 학교에 오라는 출석통지서를 2번이나 등기로 보냈는데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왔다. 하루 틈을 내어 직접 주소지를 찾아가 보니 그곳은 화전민이있는 곳으로 집과 집이 수 km씩 떨어져 있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 어떤 분을 만났는데 실제로 주소는 그쪽으로 퇴거해 있어도 J군의 가족들은 그곳에 없었다.


개학을 한 후 학년말 정리와 진급사정회가 있었다. 그 당시 교장선생님께서는 학력 신장과 교칙 준법을 강력하게 주장하신 분으로 대단하신 권위와 일벌백계 식으로 일 처리를 하셨다. 나는 학생이 장기 결석이니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정회 며칠 전 교감선생님께서 부르셨다.

“그 반 장기 결석생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실 전후 사정이 이러이러하다고 말씀드리니 충분한 근거 서류를 만든 후 제적 처리를 사정회 전까지 무조건 완료하라고 말씀하셨다. 무단 장기 결석이고 공납금 미납인데 책임질 수 있냐며, 자퇴나 휴학은 보호자의 자필 서명과 날인이 있어야 하니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1학년 종업식을 얼마 앞두고 우리 반 모든 학생이 2학년으로 진급하는데 결국 J만은 내가 버티어보았지만 학적계에서는 결국 제적 처리하였다. 그것은 정말로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학생 모두 한 명 한 명을 내 아이처럼 아끼고 공평하게 사랑하고 열심히 가르치리라!’ 교단에 서면서 그렇게 다짐했건만 초임 첫 해에 내 손으로 한 명을 제적시키게 되다니.... 담임으로서 능력, 용기, 지혜 부족을 통감하며 절망했었다.

종업식 날 한 명 한 명씩 악수하며 헤어지는데 J만은 없었다. 지나간 해의 행사란에 찍힌 사진 속에는 J가 있는데.... 오래도록 마음의 응어리가 묵직했다.


새 학년을 맡아 분주한 3월을 보내는 어느 날 웬 학생이 오더니

“선생님! 교문 옆에 어떤 학부형이 찾으시는데요.” 하길래 가 보니 J군과 J군의 어머니가 계셨다. 너무 반갑고 놀라운 마음으로 두 손을 잡으니 눈물을 글썽이며

“선생님! 많이 고생하셨지요? 우리 J가 다시 카지노 가입 쿠폰에 다니면 안 될까요?”라고 사정하셨다. 난 자퇴일 경우에도 1학년부터 재입학을 하니까 물론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학교에서는 원칙대로 제적은 재입학도 안되고, 다른 학교로 전학도 안된다고 하였다. J군의 어머니와 내가 딱한 사정을 호소했지만 거절이었다.

방법은 검정고시 공부를 해서 고입자격을 얻는 수밖에 없었다. J군의 절망한 눈빛과 어머니의 축 처진 어깨 모습은 오래도록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J가 혼자 공부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 비록 가짜 도장이라도 새겨서 자퇴를 만들어야 했었는데.... 지금의 용기가, 지혜가 그때에 있었더라면... 교장선생님께 몇 날 며칠을 조르더라도 설득하였을 텐데....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 시골의 남녀공학 중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곳은 대부분이 댐으로 인해 수몰된 지역에서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았다. 중 3 학생들이지만 가정환경으로 부모님이 안 계셔서 직접 집안 살림을 살아야 하는 학생들도 많아서, 도시 아이들처럼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3월 초에 인근 도시에서 전학 온 여학생이 있었다. 당시 나는 학적계를 맡고 있었는데, ‘갸르스름한 얼굴이며 웃는 눈매가 어딘가 많이 본모습이다. 누구를 닮았는데...’라고 생각하며 생활기록부를 보니 J군의 누이동생이 아닌가?

너무 반가워서 J양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니 J군은 세차장에서 일하다가 고입 검정 공부도 할 겸 서울의 자동차 부품공장에 취업해서 잘 지낸다고 하였다. 그동안 J양의 집은 여러 번 이사하여 ㅎ면에서 과수원을 한다고 하였다.

J양에게“내가 오빠 1학년 때 담임을 했는데, 오빠에게 꼭 안부 전해달라.”라고 부탁했다.

중학교 5종 교과서랑 참고서를 구해 주었는데 공교롭게도 J양은 우리 반에 배치되었다.


그날 밤 J군이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무척 반갑고 동생을 맡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꼭 잘 타일러서 졸업하도록 해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사는 곳은 ㅎ면인데 그곳 중카지노 가입 쿠폰도 있는데 왜 ㅇ시에서 I면의 중카지노 가입 쿠폰로 왔지? 왜 1, 2학년 때 무단결석이 많았지? 속으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J양은 동기들보다 한 살 위지만 우리 반에 잘 적응하며 조용히 생활했다. 가끔씩 오빠의 안부도 전해주며 살며시 미소 짓는 모습은 정말로 귀여웠다. 그런데 6월 말 어느 날 갑자기 결석했다. 전화를 해 보니 친구랑 가출했다는 것이었다. 속으로 짐작 가는 것도 없다며 J양의 어머니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다.

사연인즉 I면에 있는 우리 카지노 가입 쿠폰로 등교를 하려면, 아침 일찍 논둑길을 따라 20분을 걸어서 시내버스를 타고 ㅇ시로 가서 다시 I면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야 했던 것이다. 아침 일찍, 밤늦게 집에 가는 것도 싫었지만 중3이니까 등교 시간을 많이 빼앗겨 친구들과 친할 시간도 적어서 불만이었던 것이다.

친한 친구들이 전해오는 소식에 의하면, J양은 전의 A시의 친구들과 어울려 남학생들과 오토바이 타는 것을 보았다. 버스 역 앞 공중전화에 있더라, D시의 공장에 있다고 전화 왔더라 등 여러 풍문만 난무했다. 정확한 소식이겠지 하고 가보면 꼭 한 발짝 늦었다.

어머니 말씀이 가지고 간 돈이 얼마 안 되니까 곧 돌아올 거라며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했다. 부모님이 무슨 죄가 있으랴.


여름 방학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평소 J양과 친한 S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J가 D시에서 친구랑 자취한다는데 내일 잠깐 집에 들른데요.” 한다. 마침 그다음 날이 일요일이어서 남편에게 운전을 부탁해서 H면에 있는 그녀의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J시에서 꽤 멀었고 H면에서 시내버스를 내려서 한참 걸었으니까 속으로 통학에 대한 불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좁은 논둑길을 따라 외따로 떨어져 있는 큰 과수원 집이라고 동네 어귀에서 어떤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다. 과수원을 소작하고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형편은 많이 어려운 것 같았다.

좁은 방에 가구가 가득 있었으며 아직 어린 형제들은 손님이 왔다고 마냥 좋아했다. J는 아직 오지 않았다. J군과 J양에 대해 어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지 한 시간이 되어도 전혀 오는 기척이 없었다. 할 수 없이 J양에게 간곡히 쓴 장문의 편지를 두고 왔다.

내용은 ‘배움은 시기가 있으며 오빠가 졸업을 못해 항상 가슴이 아팠는데, 오빠에게 진 빚을 너에게 갚게 해 다오. 부모님과 선생님 친구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으며 너를 사랑한다.’라고 썼다.

그날 밤 늦게 돌아온 J는 옷가지 몇 벌을 가지러 왔다가그 편지를 보고서 마음이 움직여졌는지 다음 날 어머니랑 학교에 왔다. J양을 앞에 두고

“난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다 안다. 난 네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지나간 일은 묻지 않겠다. 난 네가 착한 J군의 동생으로 전에 우리 반에서 행동한 착한 일들만 기억하고 믿는다. 졸업식 날 너랑 환하게 웃으며 사진 찍고 싶다.”라고 말했다.

학생 생활 위원회에서 나의 적극적인 변론으로, 난 오누이와의 인연을 얘기하며 선처를 부탁했다. 다행히 근신 3일이었다. 출석 카드를 만들었는데 등교 시 집을 출발하는 시각과 부모님 도장, 하교 시 학교를 출발하는 시각과 담임 도장을 찍도록 해서 매일 확인하곤 했다. 다행히 J양은 반 학생들의 우호적인 태도에 다시 적응하며 잘 생활해 나갔다.

그러나 가끔씩 얘기해 보면 조용한 수업 태도이지만 전혀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막연히 채운다는 생활 태도였다. 집안 형편을 고려해서인지 빨리 직업전선에 뛰어들고 싶었다.


8월 개학하고 얼마 후 D시의 K방적회사의 산업체 여고 장학생 추천이 들어왔다. J양에게 얘기하니 간절히 원하였다. 3학년 2학기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미리 받고서 J양은 9월부터 산업체 여고로 가게 되었다.

나는 학업을 마치고 졸업하고서 가길 원했으나 J양은 당장 집에서 독립하길 바랐으며 졸업식에 올 거라고 했다.산업체 여고로 간 J는 가끔씩 전화를 걸어왔는데 “일은 힘드나 월급 받는 재미가 있으며 추석 때 온다.”라고 했다. 오빠 J군은 서울서 야간 고등을 다니며 우리 아기 주라고 인형을 소포로 보내오곤 했다. 안에는 짤막하게 ‘우리 동생 J를 잘 이끌어줘서 고맙습니다.’라고 썼다.

난 아무런 한 일도 없는데...


그다음 해 2월 14일 졸업식날 J양은 한아름의 꽃다발을 내게 안겨 주었다. 청년이 된 J군과 함께.

교정을 떠나면서 J양은

“선생님! 우리 학교를 떠나신다면서요. 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어른이 되면 반드시 찾아뵐게요.” 하면서 고사리 손을 흔들며 눈물을 글썽이며 떠나갔다.

‘그래 오빠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게 해 줘서 정말로 고맙다’라고 마음속으로 감사했다.


지금은 소식이 끊겼지만,

어느 하늘 아래에서

오카지노 가입 쿠폰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믿으며오늘도 기도한다.


정말로 고맙고 사랑한다!

그리고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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