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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효권 Feb 21. 2023

집밥 카지노 게임 추천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말이 흔해졌다. 사 먹는 것도 그렇고 해 먹는 것도 그렇고 둘 다 수월하지 않다. 전자는 지겨워지고 후자는 번거롭다. 그래서 '집밥 카지노 게임 추천'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시즌 1에서 시즌 3까지 이어진 것도 대단하지만 처음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요리는 다음 날 마트의 매출에도 영향을 주었으니, 대단하긴 대단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음식이 여럿 있다. 어떤 것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지만 어떤 것은 도전해 볼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것 중 하나가 '콩나물밥'이다. 특식은 아니어도 일 년에 두어 번 맛볼 수 있는 별식이다. 그날 카지노 게임 추천은 콩나물밥을 가르쳐 줬다. 보고 있으니 한 번 도전할만했다. 그가 알려준 방식은 이랬다. 보통 가정에서 콩나물을 쌀에 담가 같이 밥을 했던 것과 다르게 콩나물을 따로 데치고 그 데친 물로 밥을 한다. 그리고 후에 밥과 데쳐놓은 콩나물을 버무리면 끝난다. 밥에 비벼 먹을 수 있는 특제 양념까지 알려줬다.


처음치고 성공적이었다. 밥에는 콩나물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씹는 맛도 느낄 수 있으니, 예전 엄마가 해줬던 떡진 그 밥보다는 한 수 위의 맛이었다. 맛있게 먹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직접 해 먹었다는 자랑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 후로 백선생의 콩나물밥을 해 먹지 않았고 해먹을 생각도 안 했다.일회성 요리여서가 아니었다. 맛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엄마가 해줬던 콩나물밥과 달라 기억을 되살리지 못한다는 것이 한계였다. 엄마가 해주던 그 밥은 분명 백선생의 밥보다 못하다. 간혹 밥을 할 때 같이 넣어둔 간 돼지고기 냄새로 밥에 역한 냄새가 베어 입도 대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긴 시간 동안 내 입을 길들인 것은 음식 그 자체가 아니었다. 한 바가지 가득한 콩나물을 다듬고 비벼 먹을 양념장을 만들던, 가족에게 내어놓기 위한 그 수고와 가족이 함께한 기억이 백선생의 콩나물밥에는 없기 때문이다. 입맛으로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은 어쩌면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똑같지는 못하다.


최철호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는 한 살 많은 대학 동창이고 나보다 일 년 선배였다. 형은 같은 과 사람이지만 자신의 전공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 졸업에 의미를 두려는 사람이었다. 은둔형은 아닌데 수업을 마치면 그저 집에만 가려고 할 뿐 생활의 낙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도 없었다. 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왜 대학에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형을 따르고 형을 좋아했다. 목적이 있어서 다가오든 그냥 목적 없이 다가오든 형은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처음 만나든 여러 번 만나든 늘 한결같았다.


그해 여름 집에 처박혀 있는 것이 싫어 동창의 자취방에서 생활하며 형을 중심으로 우리는 복날에 삼계탕을 해 먹었다. 학생 신분에 돈이 얼마나 있을 것이며 사내들끼리 삼계탕에 도전해 보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엉성하겠는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 닭과 수삼 그리고 마늘 밤을 준비했다. 닭 배 속을 채우는 일도 없이 그저 물 붓고 거기에 사다 놓은 재료를 몽땅 집어넣고 그저 약불에 푹 끓이며 살이 푹 익을 때까지 고스톱이나 치며 기다리던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도전한 그 음식에 맛은 기대할 수도 없고 닭 누린내도 가시지 않아 먹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삼이며 밥은 냄비 바닥에 들러붙어 아예 맛도 못 봤다. 삼계탕을 끓인 것인지, 그냥 닭을 삶아 먹은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모여서, 어울려서, 공동의 관심사를 함께 한다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간혹 복날이 되면 지나간 옛이야기처럼 기억되었다.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 되었다.

주말이었다. 한참 수업하는 도중 전화가 한 통 왔다.


"저기 철호형 있잖아..."

"응, 뭐 하고 산데? 잘 지내나?"

" 죽었데... 근데... 자살했데..."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발인이었고 장례식장이 어딘지 알 길도 없었다. 졸업 후 처음 몇 년은 간혹 만났지만 해가 지날수록 바빠지는 생활에 제대로 연락도 못하고 지냈다. 그나마 형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지인이 우리 동창에게 연락을 해줬다.


형은 17년 9월이 오기 직전에 스스로 세상을 마감했다. 남아 있는 가족은 형을 화장했다. 그리고 형의 분골을 바다장으로 마무리했다. 소식을 들은 그날 남은 수업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남겨진 우리 모두 그날은 아무것도 못했다. 어떤 친구는 종일 한숨만 나왔다고 했고, 어떤 친구는 혼자 술 한잔 기울였다고 했다. 형이 왜 말도 없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는지 그 이유를 듣지는 못했다. 그저 추측만 돌았을 뿐이다. 다만 형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그때 그 맛없는 삼계탕에 대한 기억만 남겨줬다.


어쩌면 다가올 많은 날 얼마나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아니 몇 해 동안 형의 삼계탕이 철마다 기억날 것 같다. TV에서 누군가 그랬다. '그 사람 참 나쁜 사람이다.' 형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참 나쁜 사람으로 떠났다.


설에도, 추석에도 인사드리러 갈 곳은 몇 군데 없지만 가야 할 곳은 있다. 그리고 남아 있는 형의 가족들도 가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늘었거나 아니면 기억할 일이 하나 더 생겼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기억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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