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갈해리 Feb 08. 2025

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떠올리며

2025년 2월 7일 금요일

얼마 전, 설날 즈음 해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교 때 교수님, 그러니까 은사님께 카톡으로 새해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교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구~ 행복하세요~]

[ㅇㅇ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니? 너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라. 내가 은퇴를 한단다. 2월에]


교수님을 뵌 것이 14년 전인데, 어느덧 은퇴하실 나이가 되셨다는 것에 나는 그동안 뵙지 못한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티를 내지 않은 채 답장을 보내려 했다.


[그러시군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나버렸네요ㅜㅜ 교수님, 건강하셔요.]


교수님은 내 근황이 궁금하셨는지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ㅇㅇ이는 일하고 있니?]

[저는 편의점에서 알바하고 있어요. 일을 구하고는 있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네요. 요즘 경기도 안 좋아서 일자리가 잘 나지 않는 것 같아요. '브런치'라는 앱에 계속 글은 쓰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글만 쓰는 것도 아닙니다.]

[꾸준하게 쓰다 보면 뭔가가 될 거야. 알바하면서 책도 많이 읽고 그래라.]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교수님은 내 카톡에 ♡를 눌러 주셨다. 교수님과 오랜만에 대화를 나눠서 기분이 좋았다. 은퇴를 앞두신 교수님을 2월 중으로 찾아뵙고 싶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딱히 두드러진 성과도 없이 찾아뵙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소설 작가로서 대성카지노 게임 사이트면 은사님이신 교수님께서 나를 아주 자랑스러워하셨을 텐데 말이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떠올리며

교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으니, 문득 카지노 게임 사이트교 다니던 시절이 생각났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11년, 나는 4수 끝에 내신성적으로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에 수시로 합격카지노 게임 사이트. 고등학교 내신성적이 1등급이어서, 수능 시험을 치르지 않아 가능했던 결과였다. 나는 23살의 나이에 카지노 게임 사이트 입학식에 참석했고, 나보다 3살 어린, (내 여동생과 동갑인) 동기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떠올리며

처음에 여초 집단(?)인 문예창작과에 들어온 남학생으로, 썩 나쁘지 않은 훈훈한 외모(?)와 자상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동기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그때 나는 학생회에 들어가 동문회 부장을 맡았더랬다. 그리고는 92년생 이상의 만학도 모임을 만들고, 카지노 게임 사이트 고등학교 동창 2명을 불러 열댓 명의 사람들이 함께 술을 마시며 어울려 놀았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떠올리며

그 당시, 나는 두루두루 동기들과 친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정말 친하다고 여기는 6명의 동기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시고 놀았던 게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때는 무슨 작은 일만 있어도 그렇게 까르르 웃음이 나곤 했는데, 정말 그때가 진짜 청춘기가아니었나 싶다.


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떠올리며

우리 학과는 예술학과 특성상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을 자주 보러 다녔는데, (위에서 나와 대화를 나눈 은사님) 교수님의 지도하에 빨래, 몬테크리스토, 거미 여인의 키스, 에쿠우스, 고도를 기다리며 등 굵직한 공연들을 접할 수 있었다. 동기들과 공연장 앞에 서로 모이면 공연 전에는 공연을 볼 생각에 설렘에 부풀었다가 공연이 끝나면 공연을 본 감동을 나누곤 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렇게 웃고 떠들고 한 날들이 있는 반면, 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동기들과 밤새 술을 퍼 마실 정신있었어도 밤새 도서관에 가서 시험공부를 할 생각은 하지 않았던 나였다. 그 결과, 나는 거의 전 과목에서 낙제(F)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것만이 내 시련의 끝은 아니었다.


6명의 친한 동기들 중에 내가 가장 친했던 여자 동기가 두 명 김과 윤이 있었는데, 그 두 명은 마치 나와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더랬다. 그중 김은 말괄량이 같았지만, 순수한 친구였고, 윤은 참 여성스럽고, 배려심이 많은 친구였다. 나는 두 친구와 자주 놀러 다녔는데, 함께 홍대에 놀러 갔던 기억이 아직도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그렇게 끈끈했던 우리들은 어느 순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내가 그들의 비밀을 다른 친한 남자 동기 조에게 술김에 말한 것이었다.


나는 남자 동기인 조가 입이 무겁다 생각해서 그 비밀을 말한 것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가 다들 모인 술자리에서 만취해 내가 그들의 비밀을 말했다고 폭탄 발언을 해버린 것이었다. 김은 나에게 대단히 화가 나 나를 마구 때렸고, 윤은 나를 보기를 피하면서 눈물을 계속 흘렸다. 나는 둘에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에게 크게 실망한 그들은 다시 나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친했던 동기들이 하나씩 떠나가자,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증상이 급격하게 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나는 사약인 부자 성분이 든 '정로환'이라는 약을 먹고 자살시도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자살시도에는 실패했지만, 그로 인해 남은 동기들마저 나의 행동에 놀라 떠나버리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었다. 나는 그 뒤에 2학기에도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다시 돌아갔지만, 동기들이 나를 냉랭하게 대해 도저히 카지노 게임 사이트생활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무섭고 두렵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2학기 다니는 걸 포기하고,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다음 해 24살의 나이로 군에 입대했다.


군대(현역부적합 제대로 1년짜리 군대생활에 불과했지만)와 공익근무(분할복무 두 번으로 2년 만에 소집해제되었지만)를 끝마치고, 2016년에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복학해 1학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1학년 학사과정에 들어가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겠노라는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그것도 잠시 나는 선후배 간의 대면식에서 필름이 나간 채 주사를 부려 한순간에 후배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그전까지 나에 대해 호감을 보이던 후배들이 나를 벌레 보듯 하고, 나와 말을 섞는 것조차 꺼려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당시 필름이 끊겼기에 내가 한 잘못과 실수가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왕따를 당한 것 같아 속이 상하고, 많이 억울했다. 결국 나는 그전까지 앓던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조현병까지 얻게 되어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는 곤욕마저 겪어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3개월 만에 퇴원해 약 복용을 통해 조현병을 케어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그렇게 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생활은 거기서 끝나는가 싶었다. 나는 2017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 혼자서 1학년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던 과목들을 다시 수강할 수 있어서 좋았다. 친한 후배들이 없기는 했지만, 나름 가끔 대화를 짤막하게 나누는 후배들은 있었다. 나는 종전의 실수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018년 카지노 게임 사이트 재등록을 하는 날에 꼬북이와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 뒤 1년 동안은 꼬북이 덕분에 힘을 내서 학교 생활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꼬북이는 그 당시 포항에서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학교에 갈 때마다 동행해 내 강의를 청강하곤 했다. 채플, 교양 과목, 소설 창작론, 시 창작론, 희곡 창작론 등의 전공과목 강의를 함께 들으며, 내가 수업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떠올리며

시 창작론은 내가 좋아하는, 손에 꼽는 강의 중 하나였는데, 교수님께서 여러 다양한 활동을 통해 시 쓰는 법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무언극 활동이었는데, 조원들이 함께 소리 내지 않고 의자를 소재로 한 연기를 선 보여 1등으로 뽑혀 교수님으로부터 각자 시집 한 권씩 받다. 그때 시 창작론에서 A학점을 받아 나도 시를 잘 쓸 수 있겠구나 하고 은근히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꼬북이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이러한 수업 활동들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더랬다.


한편, 꼬북이가 나에게 정말 헌신적이었던 것은, 2학기 기말고사당일 아침에 집에 찾아와 전날 술에 취해 잠든 나를 깨워학교에 데리고 갔을뿐 아니라, 채플이 3번 이상 결석하면 NP(Non Pass)였기 때문에 그동안 3번 결석했던, 그것도 술에 만취해 헤롱헤롱하던 나를 깨워가며 채플 시간에 맞춰 강의실에 도착하게 했던 것이다. 영어 교양 시험 시간에는 숙취가 심해 힘들어하는 나를 어떻게든 강의실 안에 집어넣었다. 결국 영어 과목은 A학점(중간고사 때 만점을 받았고, 리포트를 잘 작성해 제출했기 때문에 기말고사 성적이 잘 안 나와도 A가 나올 수 있었다)을 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2011년도에 깨작거리면서 쓰다가 만 소설을 기말고사 때 완성시켜 준 것도 꼬북이었다. 그때, 소설 창작이 기말고사 과제였는데, 꼬북이가 옆에서 응원해 주면서 마감기한까지 꼭 붙어 있었기 때문에 소설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떠올리며

그만큼 나에게 헌신적이었던 꼬북이 덕분에 나는 2019년 2월 22일, 학사모를 머리에 쓸 수 있었다. 하마터면 카지노 게임 사이트 중퇴라는 꼬리표를 달 수도 있었는데, 집요하게(?) 나를 따라다니면서 악착같이(?) 나를 강의실에 집어넣었던 꼬북이가 없었다면 지금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시절을 떠올려 보았는데, 생각해 보면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심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게 행복했다가 힘들었다가를 반복할 수 있겠냐고 한다면 지금은 아니라고 단번에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때에만 느낄 수 있었던 행복이요, 시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지만, 그 당시 굴곡이 너무 심했던 터라 내 인생의 생채기가 너무 깊이 남은 건 정말 큰 문제이기는 했다. 다시는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고는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조금이나마 그때보다는 성장하고, 성숙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