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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을 지나 학교로 들어가는 길이다.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아주머니가 내 옆구리에 노트 한 권을 쿡 찔러주셨다. 학원 광고이겠거니, 생각하며 대충 둘둘 말아 교실로 가지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펼쳐보니 무슨 기계를 광고하고 있었다. 남청색의 투박하게 생긴 이것은 무전기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계산기 같기도, 게임기 같기도 했다. 세기말 느낌을 낭낭하게 풍기는 선글라스는 세트 상품이었다. 표지에는 단정하게 머리를 다듬은 남학생이 ‘할 수 있어!’ 포즈를 취하며 씨익 웃고 있었다. 순간 나를 비웃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고작 이어폰 하나 귀에 꽂았다고 저렇게 자신 있는 표정을 짓다니, 그는 기계에 굴복한 인간의 군상이었다. 모델을 쏘아보며 노트 표지를 넘기자 이어지는 전국 학생들의 체험 수기. 누군가는 이 기계를 사용해 전교 1등을 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성적이 30점 이상 쑤욱 올랐다고 했다. 학생들의 체험 수기를 읽고 있으면 막 책을 펴서 공부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다음 시험의 1등은 역시 나 아닐까? 체험수기의 첫 문장은 뭐라고 적으면 좋을까?... 다이어트 효소를 판매하는 인플루언서들의 매끈한 허리를 보며 이상하게 나도 살이 빠진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인 20대. 해보지도 않고 이미 해낸 듯 비어있는 성취감을 가진 나는 대체 무얼 보고 배웠나 했더니 이때부터 시작이었구나. 기분만 그런 것. 한껏 고취된 감정. 체험 수기를 읽을수록 자신감은 커져 갔는데 단 하나, 내 손엔 그 기계가 없었다.
기계의 이름은 카지노 쿠폰였다. 문과인 나도 이것이 물리학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을 앞세워 공부 잘하는 이미지로 판매하고자 이름을 지은 것인데 세기말적인 보조 선글라스 때문에 상당히 투박한 느낌만 나고 말았다. 이것만 쓰면 나도 반 1등이 가능하겠는데? 이거 봐. 다들 귀에 꽂고 머리에 써서 약간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천재로 돌변했다잖아. 말도 안 되는 광고인 줄 알면서도 홀렸다. 표지의 남학생은 끝까지 나를 비웃고, 값을 따져 묻지 않아도 비싸 보이는 이 기계를 과연 엄마가 사줄까,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에이, 그래도 옷이나 가방을 사달라 조르는 것도 아니고 이걸로 공부 좀 해보겠다는데 사주시겠지. 손톱이 잘근잘근 물어뜯겨 톱니바퀴처럼 변한 지 일주일쯤 되었다.
오늘은 꼭 말해야지. 이거 사주면 공부 열심히 해서 다음 시험 때 높은 등수를 받아 보이겠다 다짐해야지. 엄마는 늘 나의 다짐을 무시했다. “말 따위는 필요 없어. 안 지키면 그만이야. 사람은 행동으로 보여야지.” 아니 엄마, 행동을 하려면 그 기계가 있어야 한다니까요! 엄마의 반박까지 예상하다 보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짧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비장한 마음으로 엄마를 찾았다. 그녀는 안방에 모로 누워있었다. 엄마의 누워있는 뒷모습은 항상 참담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무언가 상심할 일이 일어났고, 직격타를 맞아 끙끙 앓아누운 것이리라. 그 황망한 뒤통수에 대고 나는 카지노 쿠폰 이야기를 줄줄 읊었다. 들어오는 길에 얼마나 수없이 입으로 반복했던가. 말 따위는 필요 없다는 엄마에게 말이라도 잘해야 건져 먹을게 생길 것 같았다. 내가 한참 말하던 중간에 엄마는 벌떡 일어나 나를 팩 쏘아보며 짜증을 냈다.
“그 비싼 걸 지금 사달라고?”
생각하지 못한 우리 집의 자금난에 뒷말은 모조리 까먹었다. 이런 반박은 떠올리지도 못했는데... 그렇지만 말을 꺼냈으니 일단 비굴하게 매달렸다. 비싼 것 다 안다. 대신 뽕을 뽑게 해 드리겠다. 내가 다음 시험 때 보여드릴 것이다. 정말 이걸로 공부하고 싶어서 그렇다... 마케팅의 기본은 소비자의 니즈(needs)와 원츠(wants)다. 그 순간 나는 카지노 쿠폰 방문판매사원이 되어 엄마의 니즈인 ‘끈기 있게 공부하는 딸자식’과 원츠인 ‘그 딸자식의 높은 성적’을 결괏값으로 제시했고 엄만 결국 방판사원에게 아, 아니 나에게 넘어가 짜증을 내면서도 사주마 다짐하셨다.
이제 내 손에 카지노 쿠폰가 들어왔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것만 귀에 꽂고 눈에 쓰면 1등을 한다는 거지? 잔뜩 기대감에 취해 정숙한 표정으로 새 건전지를 넣었다. 공부하는 습관에 대해서 알려주는 강의가 나오는 걸까? 아니면 답을 정확하게 찍는 요령? 에헤이 이렇게 비싼 기계에서 그런 꼼수가 나올 리 없어, 하며 귀에 꽂고 버튼을 눌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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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지는 ‘카지노 쿠폰두’ 소리의 행렬. 미래엔 이마에 666 도장이 찍히고 사람을 뇌파로 조종한다며 사이비들이 돌아다녔는데 그게 설마 진짜였나. 이걸 듣고 있으면 어딘가로 갈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은 혹시 나락 아닐까... 별별 생각을 하며 일단 귀에 꽂은 채 멍하게 벽만 바라보았다. 15분이 지나자 두두두 소리는 멈추었다. 프로그램은 5개.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던 때가 아니어서 사용 설명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프로그램은 공부하기 전 준비 단계에서 듣는 음파 소리, 어떤 프로그램은 장시간 공부할 때 듣는 소리. 또 다른 프로그램은 중간에 휴식하면서 듣는 소리였다. 버튼을 눌러가며 들어보니 프로그램마다 두두두 소리는 미세하게 달랐다. 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가기도 하며 내 정수리를 긁어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 알았어. 이걸 끼고 공부하면 된다는 거지. 그런데 방바닥에 떨구어진 세기말 느낌의 선글라스는 뭘까. 역시 사용 설명서를 자세히 읽었다. 이것은 예상했던 선글라스의 용도가 아니었다. 파동은 눈으로도 전달되었다. 빨갛고 거센 적외선이 번쩍번쩍 새어 나왔는데 휴식 프로그램을 듣거나 수면 프로그램을 들으며 눈을 감을 땐 이 세기말 선글라스를 쓰면 좋다고 한다.
내가 선택한 결과다. 어이가 없어도 돈이 아까워 설명서에 쓰인 대로 해본다. 자려고 누운 나를 보고 엄마는 기겁하셨다. 딸자식이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눈에는 세기말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카지노 쿠폰에 각기 연결된 줄은 총 5가닥인데 몸을 조금만 돌려도 목에 칭칭 감길 것 같아 불안하긴 했다. 어쨌든 비싼 돈을 주고 산 물건을 딸이 이곳저곳에서 늘 사용하니 엄마의 화는 누그러졌다. 이제 결괏값만 남았다.
플라시보 효과인지 정말 뇌파의 영향이 검증된 것인지 카지노 쿠폰를 끼는 동안은 공부가 잘됐다. 특히 암기 부분에서 최적의 효과를 보여주었다. 어떠한 순간엔 특유의 두두두 소리가 들리면서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었다. 몰입한 것이다. 순식간에 200개의 영 단어를 외울 수도 있었고 오랜 시간 앉아서 책을 볼 수도 있었다. 그 여름, 땀을 흘리면서도 귀에 이어폰은 잊지 않고 끼워가며 공부하다 보면 이어폰 줄에 또르르 땀이 맺혔다. 낮에는 악착같이 공부하고 밤에는 테크노 전사가 되어 선글라스를 쓰고 잠들었다. 물론 아침이 되면 목이며 얼굴에 감긴 5가닥의 줄들을 풀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공부에 공부를 거듭하여 나는 정말로 반에서 1등을 했다. 시험 기간 동안 엄마의 니즈는 채워드렸으나 원츠를 과연 안겨드릴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방문 판매사원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고 생각한다. 물론 물건을 판 사람도 나고 쓴 사람도 나다.
그 뒤로도 공부할 땐 늘 카지노 쿠폰가 옆에 있었다. 투박하고 팔뚝 만한 기계는 진보를 거듭해 손바닥 크기로 작아져 제품교체도 해가며 대학생 때까지 썼다. 반에서 1등을 한 뒤로 이를 뛰어넘을 만한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시험 1등의 환희를 잊지 못해 도서관에 가도 먼저 챙기는 물건이 되었다. 가끔 궁금해진다. 나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를 한 걸까, 마케터의 역할에 충실해 고객을 만족시키려 했던 걸까. 아무래도 엄만 내 혓바닥에 홀랑 속아 넘어간 게 분명하다. 게다가 내 혀에 나도 속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