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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다은 Apr 18. 2025

[에세이] 프랑켄슈타인: 누가 카지노 게임?

책임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오늘의 카지노 게임들

카지노 게임은 언제나 말하고 있었다. 듣지 않은 것은 우리였다.


<프랑켄슈타인은 카지노 게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부재에 관한 이야기다. 메리 셸리는 죽은 자를 살리려는 한 과학자의 광기 속에 인간 존재의 근원을 묻는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질문은 그 다음에 찾아온다. ‘당신은 책임질 준비가 되었는가.’ 피조물은 창조되었지만, 버림받았다. 그는 배우려 했고, 사랑하려 했으며, 속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카지노 게임이라 불렀고, 결국 그는 그 부름에 스스로를 맞춰가며 파괴자가 되었다.


문학이 위대한 순간은, 등장인물보다 인간 너머의 시간을 포착할 때다.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이 만든 존재를 통해, 그 인간이 숨기고 있는 윤리적 공백을 드러낸다. 이 피조물은 우리의 거울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얼굴에는 우리가 외면했던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얹혀 있다. 누구도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던 존재들-고아, 난민, 소수자, 그리고 매번 제도에서 밀려난 약자들. 그는 말하고 싶어 했고, 우리는 침묵했다. 그렇게 침묵은 혐오로 번지고, 혐오는 또 다른 카지노 게임을 잉태했다.


1931년 영화는 섬광처럼 번쩍이는 실험실 조명 아래, 카지노 게임의 눈을 강조했다. 공포와 연민이 뒤섞인 눈동자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장르적 기대감에 묻혀 그것을 놓쳤다. 반면 1994년 케네스 브래너의 영화는 카지노 게임의 서정성과 인간성을 천천히 펼쳐냈다. 그는 카지노 게임이 아니라, ‘존재하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비극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최근 리메이크들은 더욱 명확해졌다. 그 카지노 게임은 기술의 실패, 윤리의 파괴, 그리고 이기적인 권력이 만들어낸 사회의 파편이다.


지금도 우리는 카지노 게임을 만든다. 타인의 고통에 귀를 닫고, 소수의 절규에 눈을 감은 채, '괜찮다'는 말로 묻어둔다. 얼굴을 지운 채 행정 권한을 남용하고, 책임 없는 사과를 남발하며, 시스템에 희생된 사람들을 '사고'라고 부른다. 양심이 기능하지 않는 체계 안에서 카지노 게임은 자라난다. 우리는 창조의 야망만을 기억하고, 그 뒤를 따르는 폐허엔 눈 돌린다. <프랑켄슈타인이 말하는 비극은, 피조물의 탄생이 아니라-그를 만든 손이 사라지는 순간에 있다.


문학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자부심이 얼마나 쉽게 오만으로 전락하는지를 말하며, ‘타자’의 고통을 응시할 용기가 있는지를 묻는다. 이 이야기를 다시 읽는 오늘, 우리는 묻혀 있던 문장을 떠올려야 한다. “나는 너와 다르지 않다.” 그 목소리가 새삼스레 우리 가슴을 두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카지노 게임이 아닌,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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