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노트에 글을 쓸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나가듯이 수어의 지문자도 손으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쓰면 된다. 한글에 초성, 중성, 종성이 있는 것처럼 지문자도 각각의 위치에 글자를 적어주면 되는 것으로 받침 글자를 쓸 때는 아래쪽에 자음을 적어 준다.
이렇게 수어의 지문자를 한 자 한 자 적어보다 보니 3 단어까지의 짧은 단어를 손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넓다'와 같은 이중자음이나 '오토바이'와 같은 4글자 이상의 단어들은 손으로 표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지문자로 허공에 손으로 글자를 쓰게 되면 글자의 받침과 다음 글자의 초성이 서로 이어지게 되는 데 우리가 노트에 글을 적을 때는 검은색 글씨가 남겨져 있어서 슬쩍 보기만 해도 직관적으로 기억이 되지만, 허공에 손으로 쓰는 글씨는 모든 모양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외워야 해서 알아듣기가 어려운 것 같다.
예를 들면 내가 쓸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지만, 반대편에서 상대가 이해할 때는 모양 자체가 거울모드로 보인다. 그러므로 수어를 말할 때의 느낌과 보고 이해할 때의 방향은 정반대가 되어 헷갈리기 시작하고, 대화를 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물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좀 필요한 영역인 것 같다.
'말 한마디가 이렇게 어렵게 표현되는 거였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간 쉽게 쉽게 말을 내뱉어 왔던 자신이 반성되는 순간이었다. 살면서 가급적이면 좋은 말, 긍정적인 말들을 내뱉었으면 좋았을 텐데.... 과연 나는 그래왔을까?
드디어 두 번째 수업 시간이 시작되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수어를 배울 예정이었다.
수업 시작 전 우리는 저번 시간에 배운 지문자를 복습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님께서는 집에서 미리 쪽지에 단어를 적어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씩 뽑으라고 하셨고, 뽑은 단어를 돌아가면서 지문자로 표현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하셨다.
'지구'
내가 뽑은 종이에는 다행히 지구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쉬운 단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옆에 분은 '웃다'라는 단어를 뽑아셨는 데, 받침 때문에 하마터면 나는 그분이 표현하는 수어를 이해하지 못할 뻔했었고, 내 차례가 다가오자 더 조마조마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나는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쫙쫙 펴서 또박또박 '지구'라는 단어를 썼다. 선생님께서는 또렷이 잘 보이고 손가락이 참 길다며 칭찬해 주셨는데, 평소 손이 길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그 칭찬이 왠지 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수어에 대한 첫 느낌은 확실히 좋게 시작되었다.
드디어 본 수업이 시작되고, 우리는 1과의 <인사 챕터를 배웠다. 지문자가 아닌 수어는 쉽게 생각하면 바디랭귀지 같은 말보다는 좀 더 직관적인 단어들이 많다. 예를 들면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만 위로 올리면 그 모양은 사람을 표현하는 데, '인사'라는 단어를 표현하려면 양손의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만을 들어 올린 채 가슴 앞에서 나란히 한 후 동시에 앞으로 굽힌다. 이렇게 표현하게 되면 보는 사람이 볼 땐 두 사람이 마치 인사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것이 수어의 '인사'라는 단어이다. 양손을 주먹 쥐어 어깨 쪽으로 두 번 당기는 '건강'이라는 카지노 게임도, 주먹을 쥐고 양손의 검지손가락을 나란히 세워 두 손을 마주하는 '만나다'라는 카지노 게임도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쉬운 편에 속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한 단어 한 단어를 정성스럽게 사용하면서 대화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걸까? 우리는 말할 때 과연 이렇게 많은 생각을 명료하게 하면서 대화하고 있을까?
오른손에서 왼팔을 쓸어내린 후 양손의 주먹을 쥐면서 인사하듯이 아래로 내리는 '안녕하세요?'를 배우는 순간에는 그간 나는 안녕했는지,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안녕하신지, 말과 말이 의미 없이 오가는 것이 아닌,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순간의 떨림이 그대로 전달되어 나도 모르게 살짝 눈물이 났다.
이렇게 까지 진심으로 수어를 배울 생각은 없었었는 데, 어쩌면 지금 내 심장이 수어의 매력을 좀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