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예수가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 앞에 엎드렸고, 자기 집으로 와 달라고 애원했다. 그에게는 열두 살 난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대 사회에서 회당은 종교기관이기도 했지만, 학교나 마을 회관과 같은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회당장은 종교지도자이기도 했고, 교장 선생님이기도 했고, 마을 이장이기도 했다. 지역의 모든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또 '야이로'라는 이름은 '그가 살리리라'라는 뜻이 있었다. 지금이야 의사가 전문직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을 거다. 특히나 갈릴리처럼가난한 지역에서는 좋은 의사를 만나기 어려웠을 거다. 그러니 민간치료를 받거나 혹은 종교지도자에게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을 테다. 그중에서도 회당장은 여러 면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야이로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런 야이로가 예수 앞에 엎드린 사건은 매우 희소한 경우였다. 당시 예수는 별 볼 일 없는 집에서 태어났고, 사생아였고, 행색도 초라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도움을 요청한다면 오히려 예수가 야이로 앞에 엎드린 게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예수가 그의 집으로 향할 때 무리가 숨 막힐 정도로 예수를 밀어댔던 이유는 이 상황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길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십이 년 동안 만성적으로 하혈을 하던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재산을 의사들에게 다 써버렸지만 나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 율법에 따르면 하혈하는 여성은 부정하게 여겨졌다. 월경 중인 여성이 머문 곳도 부정하다 여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혈하는 여성과 그녀의 옷자락, 그녀가 머문 자리까지도 피해 다녔다. 여자는 십이 년 동안 불이익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야이로에게 기도받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십이 년이라는 세월과 그녀가 재산을 탕진했다는 사실은 '그가 살리리라'라는 이름을 가진 회당장에게 낫기를 바란다고 말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거라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는 낫지 못했다. 야이로는 열두 살 난 자기의 딸도 고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긴 세월을 고통 속에 살았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삶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여자는 온 힘을 다해 밖으로 나왔다.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서로를 밀치며 예수를 따라가는 무리를 넘어섰다. 그리고 결국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귀한 사람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 치유의 효과가 있을 거라는 미신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야이로의 옷자락도 수없이 만지고 싶었을 테다.
놀랍게도 그녀의 병이 치유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여인과 예수뿐이었다. 예수가 말했다.
"나를 건드린 온라인 카지노 게임 누구입니까?"
길을 가는 동안 사람들이 수없이 예수를 밀었는데 예수는 그중 한 사람을 찾았다.
만약 예수가 여자를 찾지 않았다면, 여자는 심각한 위기를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가 지나가고 무리 중 한 사람이라도 여자를 알아봤다면 그녀는 심각한 위협을 겪어야 했을 거다. 병이 나았다고 외쳐본들 누가 그 말을 믿었겠는가?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기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용기가 필요했을 테다. 여인을 둘러싼 사람들은 여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와 여자가 서로 말하고 있을 때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왔다. 딸이 죽은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예수를 집으로 데려오는 일은 이제 예수를 성가시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아이를 만나러 갔다. 예수는 울고 있는사람들에게 말했다.
"울지들 마세요.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딸은 일어났고, 예수는 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했다.
죽음.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이다. 죽은 자는 살아날 수 없다. 그러나 자는 자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딸이 죽었다고 말한다.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딸이 잔다고 말한다. 십이 년 동안 하혈을 겪은 여인은 살아있었을까? 죽어있었을까?
그녀의 삶이 끝났다고 여긴 사람들에게 그녀는 죽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었다. 피해야 할 사람이었고, 멸시해도 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었다. 고치지도 못하면서 재산을 강탈해 가도 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었다. 세상은 그녀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야이로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예수와 여자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었다. 온 힘을 다해 살아보고자 했고, 살려보고자 했다.
사람을 병들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쉽게 끝을 내리는 사람들의 태도가 사람과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게 아닐까? "그에게는 희망이 없다.", "이 사회는 회복하기 어렵다."라고 말하거나 그런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쉽게 죽음을 선고하는 자들이 있다.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여자에게 예수가 말했다.
"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삶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 일어날 준비를 하는 사람들.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들. 희망을 품고 세상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구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