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덟, 서른아홉. 그다음은 마음.
오동통한 손으로 블루베리를 한 알씩 집어먹으며,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아이들은 수(number)를 터득한다.
아이의 동작에 맞추어 하나 둘 소리 내어 수를 세는 엄마와, 말간 얼굴로 “세엣” 하고 화답해 주는 아이. 그런 아이가 기특해 더 큰 목소리로 네엣, 다섯 하고 추임새를 넣는 엄마는 아이와 수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아이들이 제법 큰 수를 만나게 되는 것은 ‘나이의 세계’ 안에 들어섰을 때다. 과자 몇 개 먹을래, 물으면 두 손을 쫙 펴서 “열 개!” 하고 의기양양하게 외치던 아이가 “엄마는 몇 살이야?” 하고 묻는 순간, 수의 세계는 확장된다. “그럼 내년에 엄마는 몇 살이야? 엄마는 몇 살까지 살 거야? 내가 지금 엄마 나이가 되면 우리는 친구야? 왜 아니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지며 아이는 자신의 수 세계를 넓힌다. 아이 머릿속에 희미하게 그려져 있던 수직선이 다시 한번 길어진다.
내 아이 또한 손가락을 여러 차례 접었다 펴며 나이의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동생은 몇 살이야? 내가 한 살이었을 때 동생은 그럼 몇 살이었어? 할머니 두 명 중에 누가 더 형님이야? 엄마는 몇 살이 되고 싶어?”
나이의 세계에 발을 들인 아이들은 신이 나서 묻고 또 묻는다. “이모는 몇 살이에요? 이모랑 우리 엄마 중에 누가 더 나이 많아요? 우리 엄마는 서른네 살인데 이모는 몇 살이에요?” 나도 몰랐던 아이 친구 엄마의 나이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아무도 묻지 않은 가족 구성원의 나이를 소상히 알리는 날도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칠십 무료 카지노 게임 넘었어. 동생은 이제 세 무료 카지노 게임라 많이 울어.” 그리고 이어지던 말.
너희 아빠는 몇 무료 카지노 게임? 우리 아빠는 마음 무료 카지노 게임.
내 아이는 마흔을 마음이라고 말한다. “아빠는 올해 마음 살이지.” 하는 아이에게 그렇지 마흔 살이지, 하고 은근하게 교정해 준 적도 있다. “흔하다 할 때 쓰는 흔 자로 끝나는 말이네, 마흔” 하며 제법 친절한 선생님이 되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끄떡하지 않았다, 수직선 위에 마음이라는 단어를 꼭꼭 눌러 새겨 넣기라도 한 것인지.
그런데 가만 듣다 보니 이 마음이, 어딘가 조금 귀엽다. 스물, 서른 같이 어렵고도 무거운 단어 사이에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는 ‘마음’이라니. 스물과 서른, 쉰과 일흔이 짙은 초록의 나뭇잎이라면 마음은 이제 막 세상에 나와 처음 햇빛을 마주한 연둣빛의 새잎 같았다. 삭막한 곳에 홀로 똑 떨어져 있는 들꽃 같았다. 여리고 다정했다.
그리하여 나는 어휘의 오류를, 아이의 순수함을 잠깐은 지켜 주는 쪽에 서기로 결심한다. 머지않아 아이가 제 아빠의 나이를 마흔 하나 혹은 마흔 둘이라고 정확하게 말하는 날이 올 테니까. 한동안은 아이가 마음, 마음 하나, 마음 둘 하며 숫자를 세는 소리를 가만 듣고 싶어진다.
그리고 언젠가 마흔의 존재를 번뜩 깨달아버린 아이가 내가 언제 그랬냐며 마흔 하나, 마흔 둘 하고 말한다면. 소리 내어 수를 세거나, 짧고 오동통한 손가락을 일일이 접어가며 수를 세는 일이 점점 사라진다면. 그것은 내 아이가 쑥쑥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일 테지만, 왠지 조금 아쉬울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아빠 마음 살이야, 하던 다섯 살 꼬맹이가 이만큼 컸냐며 몇 번이고 아이가 그려둔 수직선 위를 맴돌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약속.
2031년 1월 1일, 내가 마흔이 되는 날. 아이에게 말해봐야지. “엄마도 이제 마음 살이야.”
그때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우리의 암호 같던 말을 듣고 씨익 웃어줄까, 자기는 이제 다 컸다며 시시한 말장난 치지 말라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을까.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절 속의 아이가 벌써 그리울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