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과 퐁의 이야기
파란 의자에 사람이 앉아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2022~2023년 2년간 시각장애인협회에서 독서교실을 진행했습니다. 당신이라면시각장애인에게 어떻게 독서교실을 진행하겠습니까? 4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까지 열 사람입니다. 그동안 책을 볼 기회가 많이 없었을 테니 기왕이면 가독성 있고 재미있는 책이 좋겠지요. 그래서 수업에 사용할 책을 선정하는 몇 가지 기준을 마련해 보았습니다.
첫째, 그림이 보이지 않아도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 묘사가 잘된 책
둘째,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흥미롭고 빠르게 전개되는 책
셋째, 언어가 단순하고 명료하여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는 책
넷째, 참여자들이 자신의 인생 경험을 얘기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책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넷째, 참여자들이 각자의 인생 경험을 얘기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점심 직후 2시간 동안 하는 수업이라 낮잠 자기 딱 좋은 시간이니까요. 참여자들이 깨어있으려면 무엇보다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책을 <핑!으로 정했지요. 소통의 다양한 관점들이 재미있게 표현된 그림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핑과 퐁 두 친구가 나옵니다. 딱 느낌이 오시지요? 빨간 탁구채처럼 생긴 핑이 들고 있는 파란 탁구채. 탁구공을 치는 소리를 흉내 낸 말이 이름이 된 핑퐁.'Two to tango'라는 영어 표현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탱고를 추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으로우리말로는 보통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의미로 사용하지요. 소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리듬을 탄 탱고를 출지 엇박자로 출지는 소통이 관건입니다. 탁구를 칠 때도 마찬가지죠. 핑이 공을 치면 퐁이 받아쳐야 합니다. 대신 이번 탁구는 시합이 아닙니다. 탱고처럼 상대방의 몸짓을 읽고 교감하며 최대한 안전하게 치고받는 패턴을 유지해야 하죠. 나는 누구라도 받아칠 수 있는 안전한 질문을 하고 참여자들은 안전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목을 'Two to ping pong'으로 달리 지어볼 수도 있겠네요.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삶을 오픈해서 얘기하는건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자기 검열이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핑'을 하면 친구는 '퐁'을 해요. 나는 그저 시원하게 나의 '핑'만 하는 겁니다. 상대방의 '퐁'을 내가 결정할 수 없어요. '퐁'은 상대에게 맡기는 것이지요. 첫 만남에 작은 탁구공을 하나 손에 쥐고서 내 소개를 하며 오늘 있었던기분좋은 일 하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이 앉은 정희씨 손에 탁구공을 쥐어주고 정희씨에게도 좋은 일 하나를 얘기해 달라고 했지요. 그리고 말하는 사람의 오른쪽으로 공을 넘기게 했어요. 정희씨는 오른편에 앉은 기범씨에게 공을 쥐어주었습니다모두 순서가 돌고 나서우리는 이 시간 동안 책에서처럼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눌 것이지만 좋은 일뿐 아니라 슬프고 힘든 얘기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책을 낭독했지요.
2년간 참여자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시각장애인에 대한 한 가지 잘못된 믿음이 깨졌습니다. 시각장애인은 대부분 선천성 전맹일 거라고 믿었는데그건착각이었습니다. 선천성 전맹보다 나이가 들어 저시력이되어 시각장애 등급을 받거나 선천성 저시력자가 노안으로 전맹이 되거나사고로 전맹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지요. 고로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은 볼수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잠재적 장애인이라는 말이 있지요? 지금은 아니지만 우리 중 누구라도 장애인이 될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장애가 없을 때 마음껏 삶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와도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전반적으로 장애인을 위한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년간시각장애인 독서교실을 진행하면서배운 것은 마음을 터놓는다면 그게 누구든한 사람 한 사람모두가 가치롭다는사실입니다.
90대 영범씨는178 정도의 키에마른 체형이지만나이가 밑기지 않을 만큼 정정하고 맑은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6.25 때 오른쪽 눈에 총을 맞고 왼쪽 눈에만 의지하다가 저시력자가 되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전혀 낙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오른쪽 눈에 인공 안구를 삽입해서 안대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좋아했지요. 인공안구를 하기 전에는 안대를 하고 다녀야 했는데 한여름에는 진물도 나고 너무 괴로웠다면서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없는 것보다 있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에게 하나 남은 눈마저 거의 보이지 않는 저시력임에도 불구하고 지팡이를 짚고서 매일 산책을 다닙니다. 나는 두해 전 눈 쌓인 한겨울 산책로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습카지노 게임.
70대 숙자씨는 작은 키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걷습니다.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그녀는 항상 같은 핸드백을 들고 다닙니다. 아랫부분이 넓고 윗부분에 지퍼가 있으며 짧은 손잡이가 2개 달렸지요.그런데 그 가방을화장실에 갈 때도 꼭 들고 다니는거예요. 그래서 그 연유를물어보니 단짝 정희씨가 대신 얘기해 줍니다. 전재산을 넣고 다닌다고요. 예전 활동보조원이 집에 놓아둔 현금 위치를 알고 훔쳐간 이후로는 현금이랑 통장, 도장을 저렇게 가방에 넣고 옆에 붙들고 다녀야 마음이 놓인다고요. 혼자 사는 숙자씨는 아들이 한 번씩 돈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 아들에게 돈 한 푼이라도쥐어주고 싶은 마음에 어디를 가나 돈가방을 챙기는 것이지요.
70대 정희씨는 숙자씨의 단짝입니다. 정희씨는 어렸을 때는 눈이 보였기 때문에 소에게 꼴을 먹이러 자주 들판에 데리고 나갔다고 합니다. 얘쁨을 많이 받아서 그것 말고는 집안일은 거의 해본 게 없이 곱게 자랐다고 은근히 자랑하듯 말하지요. 한창시절 공부가 싫었던 그녀는 지금 점자를 배우고 있는데 참 재미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눈처럼 하얀 숱 적은 커트머리에 분홍 테 안경을 쓰고는 항상 미소 띤 얼굴입니다. 어떤 질문을 하면 '나는 잘 몰라.'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얘기는 좋아합니다.
40대 기범씨는키가 180이 넘는 장신에 깡마른 체형의 저시력자입니다. 반원 가운데 유일한 싱글인 그는 어린 시절 겪은 소아마비로 인해 팔다리의 거동이 조금 불편하고 발음이 약간 어눌합니다. 그가 말을 할 때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들어야 했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지요. 그는 남다른사유의 세계를 어눌한 말투에도 분명히 전달하는 철학자입니다.
50대 형미씨는 보라색으로 염색한 짧은 파마머리에 통통한 체형입니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그녀는 손녀가 자기를 닮아 춤과 노래를 잘해전국노래자랑에서 인기상을 탔다고 싱글벙글입니다. 수업시간에 소양강처녀를 부르며 반원들을 즐겁게 해주는 분위기 메이커지요. 하지만 그녀는 당뇨 합병증으로 신장염을 앓고 있어서 매주 두 번씩 투석을 해야 합니다. 수업을 하는 날 오전에도 투석을 하고 오기 때문에 평소보다 멍하고 몸이 힘들다는 형미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웃고 노래합니다.
60대 미희씨는 연변에서 온 조선족입니다. 그녀는 몇 년 전 친한 언니의 소개로 한국에 들어왔지요. 자식들은 여전히 연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저시력자로 독서프로그램 참여자 중에서 가장 시력이 좋은 편이라 핸드폰 메시지도 크게 확대하면 볼 수 있습니다. 미희씨는 학창 시절에도 공부하고 발표하기 좋아했던 모범생이었고 지금도 어떤 질문에든 가장 먼저 손들고 얘기하는 모범생 소녀그대로입니다. 배움이 너무 즐겁다고 말하는 그녀는 23년도에 연변에 사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로 인해 깊은 슬픔을 안고 있지만 언제나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슬픔에 무뎌지기 위해 노력하지요. 그녀는 <춘악이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당차고 야무진 가난한 섬마을 소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강사로서 나는 '핑'의 역할을 주로 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고 참여자들의 '퐁'을 경청하면서 어떻게 다음 '핑'을 할지 숙고하지요. 사실 이제 나는 마음이 상당히 견고해져서 어떤 '퐁'을 들어도 감정이 상하거나 당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사생활 초기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떤 말에는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날 때도 있었지요. 미숙한 때는 불쾌 한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후회가 됩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감정을 느끼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불쾌한 감정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불쾌 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될 테니까요. 강사는 감정의 자기 검열이 필요합니다. 신기한 것은 자기 검열을 통해 참는 연습을 자꾸 하다 보면 마음도 점점 자극에 무뎌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화가 나지를 않지요. 여러분의 다음 '핑'은 무엇인가요? '핑'을 치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