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 섬 / 보로메의 섬 그리고 카지노 게임의 바다
<섬은 장 그르니에의 짧은 생각들을 모아둔 '선집'이지만 생각처럼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오래도록 사랑받아왔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하다. 그건 아마도 알듯말듯한 카지노 게임 사이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침묵과 고독 때문일 것이다. 만약 모든 문장들이 명료하다면 틈이란게 없었을테니 독자가 사유할 틈도 없었을지 모른다.
할 말이 많은 이들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면, 듣는 이들은 당연히 그것들을 다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쯤 되면 누군가 제대로 듣거나 말거나 이해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그저 내가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 자체에만 집중하는 꼴이다. 마찬가지로 독자가 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카지노 게임을 할까, 어떤 기분이 될까에 염두를 둔 책도 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말을 하련다, 공감하든지 말든지 하는 식의 책들도 많다. 혹은 너무 이것저것 주워담아 놓은 바람에 행간을 따라다며 상황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거나..
문제는 책을 어느 정도(혹은 완독) 읽어본 뒤에야 그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의 머릿속은 뭔 소린지도 모르겠는 작가의 카지노 게임로 온통 뒤죽박죽.. 분하고 원통하지만 그런 기분인 걸 깨닫고 나면 이미 늦어버렸다. 사실 책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방적인 소통(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지만)을 바탕으로 하는 관계는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아무튼, 이런 와중에도 독자에게 사유하며 따라올 틈을 주는 <섬은 귀하다.
이 책은 끊임없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책 안에서는 보로메의 섬들)을 꿈꾸는 우리를 자극한다. 하지만 "당장 비행기 표 끊고 짐싸! 지금이 아니면 안돼!", "그러다간 평생 일만 하다 죽을걸? 용기 없는 녀석!" 이라고 몰아 붙이는 대신 우리를 '생각의 바다'로 이끈다. 인생은 짧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기엔 또 제법 길기도 하다.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 어찌 매번 내 삶을 걷어차고 가방을 챙겨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로메의 섬들이 아니라 생각의 바다이고,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베이스캠프일지도 모른다.
추신
역시 내가 집사여서 그런지 "고양이 물루"가 가장 쉽고 재미있게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