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이가 사람을 찾아주는 일을 하게 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살아만 있다면 찾아주고 싶어서. 그리워하는 사람이 세상에 살아만 있다면 반드시 서로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한 거였다. 그렇다면 재이의 눈에 너는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 사라져 버린 아빠를 원망하고 증오하면서 남은 생을 천천히 갉아먹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이었을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몸을 뜯어먹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살고자 몸부림치는 굶주린 유충처럼.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미칠 듯한 부끄러움이 살갗을 뚫고 몸 안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동시에 오랜 세월 갇혀 있다고 믿었던 모래시계 벽으로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부딪히더니 쩍, 하고 금이 가는 게 보였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가두어 두고 있었던 것일까? 너는 어쩌면 모래시계 안에도 밖에도 존재한 적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먼발치에서 너라고 믿는누군가를 무심히 지켜보고있던 방관자였을지도. 너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너의 밖으로 걸어 나온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이지 단 한 발짝도. 순간 벼락같은 죽비 소리가 뒤통수를 날카롭게 훌치고 지나갔다. 너는 긴 *숙잠(熟蠶)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무실로 돌아간 너는 오랫동안 책장 속에 갇혀 있던 파랑새를 꺼내 풀어 주었다. 먼지 더미 사이에서 꼬깃꼬깃 접혀 있던 날개를 조심히 펼친 파랑새가 사무실 위로 힘겹게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네 주변을 여러 바퀴 빙빙 돌더니 이내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먼 구름 사이로 사라져 가는 파랑새를 눈길로 쫓으면서 너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카지노 게임를 찾아야겠어.”
“네? 뭐라고요?”
“아직은 어딘가에 살아 계실지도 모르잖아.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두 분을 만나게 해 드려야 할 것 같아. 도와줄 수 있을까?”
“누나가 그 말을 하길 오래 기다려 왔어요. 당연히 도와줘야죠. 모든 일을 중단하고서라도 누나 아버지를 제일 먼저 찾을 거예요. 우리 같이 찾아봐요.”
“그래, 고마워.”
너는 늘 아무것도 잃어버린 게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니 그런 척을 했었다. 재이는 그런 네가 변하기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굳게 닫힌 빗장을 열고 스스로 걸어 나오기를.하지만네가아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얼굴마저도 희미해져 버린 상태였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옅은 잔상들은아빠를 찾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주말마다 요양원에 있는 엄마에게로 갔다. 아빠에 대한 작은 실마리라도 찾기위해. 이따금 과거로 돌아갈 때면 그때 그 순간을 마치 지금 일인 것처럼 생생히 기억해 내는 엄마였다. 엄마를 만나는 날들이 반복될수록 아빠에 대한 기억의 퍼즐들도 하나씩제자리를 찾아갔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살림을 시작했던 단칸방에서부터 가족이 함께 살던 빌라, 엄마가 자주 다니던 동네 재래시장, 카지노 게임가 품바를 하러 다녔던 행사장까지 희미해졌던 과거가차례로복원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도저히 찾을 수 없고 볼 수도 없을 것 같았던 카지노 게임의 세계가서서히다가오고있었다. 엄마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 숨 쉬고 있던 그것이 기나긴 침묵의 터널을 뚫고네 앞에 실체를 드러내게 된것이다.
터질 둣 탱탱했던 홍시가 찌그러지고 맵짜져 곶감이 되어 버리듯엄마의 청춘은 아빠만을 바라보고 그리다 볼품없이허물어져 버렸다. 너는 그런 사랑이 가능하지도 마땅하지도 않다며 때때로 몸서리를 쳤었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지독한 사랑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뭍으로 나와아빠가 있는 극단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연극에 문외한이었던 엄마를 극단에서 받아줄 리 만무했다. 매일같이 극단에 나가청소나 요리, 소품 제작 같은 허드렛일을 하면서카지노 게임 주변을 맴돌았다. 결국, 생계가 절박해진 엄마가 선택한 건 다방 아르바이트였다. 다방에서 번 돈을 남김없이극단에 퍼다 주면서도 엄마는 카지노 게임 주변을 절대로 떠나지 않았다.
카지노 게임는 그런 엄마를멀찍이서방관만 할 뿐이었다. 엄마에게 아빠는 태양이었고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아득한 존재였다. 그랬던 아빠가 엄마를 품에 안은 건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정식 다방 레지로 취직하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날, 아빠는 엄마를 거칠게 안았고 엄마는 온 마음을 다해 그런 아빠를 받아들였다. 엄마를 보는 아빠의 눈빛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지만,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만 않는다면 모든 걸 부정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날 엄마는 아이를 가졌다. 배 속에 아이를 몰래 키우면서도 몇 번이고 아빠를 다시 받아들였다. 엄마는 자신이 아빠의 텅 빈 눈 안에 아무것도 채워 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아프게 깨달았다. 그렇기에 고통 역시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엄마가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받지도 않는 것이.
“언제부터 카지노 게임랑 같이 살게 된 거야? 둘이 결혼식은 한 거야?”
“결혼식?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원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지노 게임가 내가 사는 단칸방으로 들어왔어. 나는 원이가 카지노 게임 아들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어. 어차피 다방 레지의 아이가 누구 자식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원이는 있잖니? 네 아빠랑 똑 닮은 아이였어. 특히 눈동자가 빼다 박은 듯했지. 원이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더라. 자기의 아들이라는 걸.”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았어?”
“상관없었어. 내 곁에 있어 줬으니까. 원이를 낳고 너를 낳을 때까지도 내내.”
“그런데 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야? 어디로 간 건지는 정말로 몰랐어?”
“알았다면 진작에 찾아갔겠지. 아마 그게 지옥이라고 해도 따라갔을 거야. 원이가 죽고 같이 죽으려고 했지만 네 아빠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까 봐 차마 죽을 수도 없었어. 언젠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마저 세상에 없다면 아빠는 어떡하겠니?”
‘엄마에게 도대체 나는 뭐야?’라고 따져 물으려다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는 사는 동안 단 하루도 아빠를 잊은 적이 없었던 거였다. 찾으러 갈 수 없기에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기다림은어둠이 될 수도 빛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만날 것을 알기에 따사롭게 빛나는 기다림,아무런 기약도 없이 만나지 못할 것을 예감하는캄캄한기다림. 엄마는 자신의 기다림이 후자라는 걸 알면서도 내내 마음속으로 부정하며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닳고 닳아 이제는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희망이 엄마를망각의 무덤 속에 잔인하게 파묻어 버릴 때까지도.
작은 통나무배 한 척이 바다 위에 떠 있다. 뱃머리에 선 노인이 구슬픈 노래를 부른다. 시든 천일홍 꽃 한 다발을 손에 가득 움켜쥔 여자가 서 있다. 배 안엔 삼나무 관 하나. 붉은 천일홍들이 흩뿌려진 속에 남자가 누워 있다. 여자는 울지 않는데 왠지 너의 눈과 코와 입은 서서히 젖어들고 있다. 죽음이 사소하다는 사실에진저리를 친다. 부서진 천일홍들과 검은 바닷물이 노인의 노랫소리에 맞춰 위아래로 출렁거린다. 여자는 울지 않는데 너의 심장과 폐와 위는 까맣게 젖어들고 있다. 시든 꽃 한 다발이 버석거리다 부서져 먼지가 되어 흩날리고 있다. 순간 여자도 함께 가루가 되어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다. 텅 빈 통나무 배 한 척만이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 있다. 더이상 노인도 여자도 관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너도 없다. 다만 파랑새 한 마리가 배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너는 오래도록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 알 수 없는 힘이 온몸을 심연 깊은 곳으로 자꾸만잡아당기는 바람에 한동안 몸을 일으킬 수조차 없었다.
서늘한 꿈이었다.
* 숙잠 : 누에가 고치 속에서 번데기로 변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휴식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는 외부 활동을 멈추고 내부에서 변태(變態)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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