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베르크와 장크트길겐
'이번 여행은 아주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구나.'
산악열차와 유람선 중단 소식에 푹 자겠다는 내 결심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다 정해두었던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알아볼 것이 많아졌다.
원래 계획은 잘츠브루크에서 버스를 타고 장크트길겐으로 가, 거기서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장크트볼프강에서 내려, 산악열차를 타고 샤프베르크 정상까지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날씨로 인해 유람선은 아예 운행하지 않고 산악열차도 중턱까지만 운행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3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1. 유람선 대신 버스를 타고 장크트볼프강까지 가서, 산악열차는 운행 중인 구간까지만 타고 간다.
2. 산악열차를 타지 않고, 장크트길겐 쪽 호숫가만 구경하고 온다.
3. 아예 일정을 엎고 다른 곳을 찾는다.
하지만 근교에 특별히 더 보고 싶은 곳은 없었다. 유명한 할슈타트는 어차피 모레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장크트길겐까지 가서 호숫가만 보고 오자니 그것도 아쉬웠다.
그러니 이왕 거기까지 간다면, 중턱까지 일지라도산악열차를 타보기로 했다. 유람선을 탈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조금 우회해서 가더라도 버스를 타면 산악열차 역까지 갈 수 있었다.
혹시 샤프베르크 중턱에서 내려 정상까지 걸어갈 수는 없는지도 검색해 보았다. 생각보다 이런 일이 종종 있는 것인지, 열차가 끝까지 운행하지 않아 걸어서 올라간 사람들의 후기도 꽤 보였다.그래, 우리는 셋 다 걷는 거라면 자신 있으니까. 아니, 나는 별로 없지만 부모님은 잘 걸으시니까!할 수 있는 데까지 걸어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각종 운행 시간표와 '누구나 걸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여러 후기들을 왔다 갔다 하다, 겨우 눈을 감았다. 일단은 자야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다음날 아침, 잠이 좀 덜 깬 상태로 전날 마트에서 사 온 토마토와 요거트로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했다. 버스 티켓은 탑승 후 기사님한테서 사면된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구입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좀 민망했다. 사람들의 인내심에 새삼 감사하며, 온라인에서 많은 이들이 일러준 대로 왼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내를 벗어나자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는 듯, 창밖에 노란 기운이 감돌았다. 꽤 오래도록 안개가 낮게 깔려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걷혔다. 목가적이고 동화적인 시골 마을 풍경부터, 눈이 내려앉은 산이 함께 한 드넓은 볼프강 호수까지,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이 이어졌다. 낮게 깔린 구름은 이른 아침의 비밀스러운 풍경을 완성했다. 인스브루크를 오가며 기차와 트램에서 보던 풍경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지만, 세상에 결코 같은 풍경은 없다. 오스트리아의 풍경은 매번 특별했다.
잘츠부르크에서 한 번에 장크트볼프강까지 가는 버스는 없어서, 중간에 장크트길겐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다행히 우리가 내리자마자 다음 버스가 오는 바람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여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정상 부근에 직선의 철길이 살짝 보이는 샤프베르크 산에 점점 가까워졌다. 호텔에서 출발한 지 약 2시간이 되지 않아, 드디어 산밑에 위치한 산악열차 역에 도착했다.
"내 모자!"
산악열차 역인 샤프베르크반(Schafbergbahn)이 회기점이었던 버스는 이미 회차를 하고 출발해 버렸다. 아빠의 모자는 버스 좌석 틈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산에 올라가면 햇빛이 강할 테니, 이곳에서 급한 대로 하나 새로 사는 수밖에는 없었다.
지나간 모자는 일단 잊고 티켓부터 구입하러 갔다. 창구 오픈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우리 앞에는 어떤 커플이 먼저 와 있었다.
"오늘은 정상까지 운행 안 한다면서요. 티켓을 2일 뒤로 바꿔주세요."
"네, 그런데 2일 뒤에도 정상까지 운행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들은 고민 끝에 결국 표를 바꿨다. 아마 운을 걸어본 것일 텐데, 이날 올라가 본 바로는 2일 뒤에는 정상까지 운행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우리도 이틀 뒤에 방문해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무료 카지노 게임면 좋았으련만.
"9시 15분 첫 차 세 장이요."
"오늘은 눈 때문에 끝까지 운행이 안 돼요."
"네, 알고 있어요. 혹시 중간에 내려서 걸어갈 수 있나요?"
"아뇨, 오늘은 위험해요. 눈이 아직 녹지 않아서, 스키 복장이 아니라면 어렵습니다."
"아, 아쉽네요. 어쩔 수 없죠."
직원이 위험하다고 말리는 건 하지 않는 게 맞다. 그러면 중턱이라도 구경하면 되는 거고, 구경할 게 많지 않으면 빠르게 볼프강 호숫가를 구경하면 되는 거였다. 오는 길에 호숫가도 예쁘다는 건 분명히 확인했으니까.
"그래도 오늘은 정상까지 가는 게 아니라서, 표값이 다른 때보다는 좀 저렴합니다."
아쉬워하는 내 모습에 한 마디 덧붙여주는 직원이었다.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표가 저렴해질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부분이라, 기분이 아주 조금은 좋아졌다.
티켓을 사고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아빠가 기념품샵에서 모자를 샀다.
"정말 이거밖에 없었어?"
아빠는 결국 샤프베르크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관광객차림으로 산악열차에 올라야 했다. 뭐, 관광객이니 관광객 티가 좀 나면 어떤가.
열차 안에는 사람이 아주 많진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꽤 있었다. 다들 우리 같은 마음으로 탄 것 같았다. 중턱에서 사진만 찍고 15분 뒤에 있는 열차를 다시 타고 내려올지, 아니면 강행해서 위까지 걸어가 볼지를 토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산악열차는 곧 가파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오래전 스위스 이후로 처음 타는 산악열차였다. 올라갈수록 먼발치의 산맥들 뿐 아니라 아래의 볼프강 호수까지도 예쁘게 보였다. 호숫가에 위치한 여러 마을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산, 호수, 마을, 이 세 가지 조합은 언제 어느 나라에서 봐도 예쁘지 않을 수가 없는 조합 같다.
막상 중턱에 올라와보니, 날이 춥지 않아서 그런가 눈이 곳곳에 꽤 녹아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눈이 쌓여 있는 곳들도 있어서, 올라가는 건 그냥 깔끔하게 포기했다.
대신 우리에게 개방된 중턱이라도 깊숙이 구경해 보기로 했다. 이곳은 아마도 원래 소들을 풀어놓는 곳인지 작은 나무 문이 닫혀 있었는데, 물어보니까 넘어가도 된다고 했다. 어차피 이날은 눈 때문에 소도 없었으니까. 대신 가정집들이 듬성듬성 있는 듯하여 조용히 구경하기로 했다.
넘어선 나무 문 앞에는 곧바로 멋진 절경과 함께 그걸 여유롭게 내려다볼 수 있는 벤치가 있었다. 벤치는 순식간에 너도나도 앉아서 사진을 찍으려 드는 인기 포토존이 되었다. 정상까지 운행하는 날이무료 카지노 게임면 이곳에 내리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모처럼 주목받는 벤치가 아니었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주변에 무료 카지노 게임들이 꽤 있었는데,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더 이상 뒤따라오는 인파가 없었다. 도착 15분 뒤 바로 출발한 하산 열차를 타러 간 사람도 보였고, 정상 방향으로 일단 걸어보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는 듯했다. 무료 카지노 게임 줄어드니 소음도 줄어들었고, 바람소리와 약간의 새소리, 기차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 정도만 날 뿐이었다. 평화로웠다.
우리 가족 외에는 스페인어를 쓰는 커플 정도만이 남았다. 사진을 찍으려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니, 놓여 있는 벤치마다 옮겨 앉아가며 예쁜 전망을 보면서 간식을 먹었다. 방울토마토는 시원했고, 마너 웨하스와 잘츠부르크 인기 기념품 모차르트 초콜릿은 달콤했다. 이토록 맑은 뷰를 즐기는 게 우리뿐이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걸을 수 있는 곳까지, 절벽 가까이까지 걸어서 저 아래 작은 마을들을 구경하다, 먼발치의 구름과 하늘을 즐기고, 또 오르지 못한 샤프베르크 정상도 보았다. 저 멀리 아래서 봤을 때는 다소 뭉툭하게 느껴졌던 샤프베르크 정상은, 이곳에서 보니 비스듬하게 깎아낸 듯한 단면이 매력적이었다.
"파리에서도, 에펠탑에 올라가면 에펠탑이 안 보인다는 단점이 있지."
비도 눈도 없이 맑은 날들이 지속되무료 카지노 게임면 정상까지 가서 멋진 뷰를 볼 수 있었을 테지만, 그만큼 관광객들도 많았을 것이다. 날씨가 내내 안 좋았다면 중턱까지도 못 왔을 것이고 맑은 호수의 풍경도 보지 못했겠지. 우리의 여행은 불운속에서도 나름의 행운이 있었다.
정상까지 갔다면 여기는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곳으로도 너무나 즐거웠다. 마치 전세 낸 듯 한적한 분위기에 비밀의 공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여우의 신포도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여우도 포도를 먹지 않은 대신 다른 걸 즐기게 되었을 수도 있다. 고요한 그곳의 모든 시야를 시선에 한 폭씩 담았다. 같은 풍경을 몇 차례씩 봐도 질리지 않았다.
산악열차를 아예 타지 않고 밑에서부터 트레킹하며 올라오는 몇몇 서양인 관광객들에게 자극을 받아, 아주 조금은 걸어 올라가보기도 했다. 정식 트레킹 길은 막혀있었지만, 산악열차의 철길 쪽은 눈이 많이 녹아서따라걸을 수 있었다. 다만 돌길이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가 너무 힘들었다. 조금만 맛보기로 구경하다 하산하기로 했다. 이미 만족스러운 구경을 했으니까.
완전하게 느껴졌던 반쪽짜리 구경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장크트길겐으로 갔다.장크트길겐은 모차르트 어머니의 고향으로, 볼프강 호숫가에 있는 마을들 중 가장 인기 있는 방문지 중 하나다. 원래대로라면 산악열차 역에서 유람선을 타고 갈 수 있는데, 호수의 수위가 많이 올라와서 운행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장크트길겐은 소문대로 너무나 예쁜 마을이무료 카지노 게임. 관광객이 별로 없는지, 고요하고 한적했다.
모차르트 어머니의 생가가 자리한 작은 광장에는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서로 가깝게 서 있었다. 제각각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었지만 서로 너무 잘 어우러지는 건물들이었다.다음에 오스트리아에 또 여행하러 온다면, 이곳 호수에 머물며 근방의 마을들을 구경하고 다니는 것도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미리 찾아둔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와 키쉬, 그리고 신선한 주스를 마시고, 호숫가 쪽으로 걸어 나갔다.
호숫가 선착장을 보니 완전히 물에 잠겨있었다. 유람선이 운행될 수 없는 이유를충분히 납득했다. 유람선을 못 탔어도, 산악열차로 정상까지 못 갔어도,그래도 샤프베르크 중턱을 실컷 구경하고 물이 가득 찬 호수도 이렇게 즐겼으니,남은 아쉬움은 없었다.
카페에서 마주쳤던 노부부도 호숫가로 걸어 나왔다. 그곳에서 그분들이 다른 나이 든 부부와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저희는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그리고는 잘츠브루크로 왔어요. 비를 몰고 다녔지 뭐예요. 어제부터 맑아져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우리도 만약 그분들처럼, 빈에서 인스브루크가 아닌 잘츠부르크로 먼저 갔다가 인스브루크로 향하는 일정으로 계획했무료 카지노 게임면 어땠을까. 인스브루크에서는 원하는 걸 다 했을 테지만 (못 간 파처코펠 케이블카도 탔을 테지만) 아마 잘츠부르크는 거의 구경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인스브루크에 먼저 갔다 오는 여정이었기 둘 다 조금씩이나마 볼 수 있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폭풍 속에서, 이 정도면 그나마 불행 중 다행, 불운 중 행운이무료 카지노 게임.
여행자는 어떤도시를 언제 여행할지를정할 수는 있어도,그 여행지에서맞닥뜨리게 될 모든 일들을 미리 정할 수는 없다.날씨나 운영 시간, 그날의 교통상황과 같은 것들은 모두 운이다. 투정 부린다고 운이 생기지 않고, 간절하게 바란다고 운이 생기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운을 받아들이는 것, 그 안에서 가능한 것들을 찾는 편이 더 낫다.
모자를 두고 내렸다면 하나 사면 되고, 정상까지 운행하지 않으면 중간까지만 가면 되고, 비가 오면 실내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으면 된다. 불가항력적인 것들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면 된다.미리 느끼는 아쉬움에 빠져있지만 않는다면, 예상치 못했던 골목에서 새로운 재미와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지도 모른다.그러면 불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굉장한 행운으로 느껴지는 마법을 느낄 수도 있다.
맑은 날씨 속 호숫가를 거닐며,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선택했다. 하늘의 구름으로 가득 채워진 볼프강 호수를 달콤하게 즐겼다. 아이스크림이 담겨있던 과자까지 남김없이 먹고 손을 턴 뒤, 따스한 햇살 안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잘츠부르크행 버스를 타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