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또 카지노 게임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종일 틀린 글자나 잡아내던 책상물림이 내 아이 한번 곁에서 제대로 키워보겠다고 공동육아 교사의 길을 택해짐싸들고 대전으로 내려온게 벌써 십오륙 년 전. 내가 근무하게된어린이집은 국내 최초로 노인정과 어린이집을 한 울타리 안에 설립해 막 개원한 곳이었다. 그러니 노인과 유아가 함께 하는 보육 프로그램은 반드시 필요했다.
당시 노인정에 오시던 분들은 주로 그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분들이었다. 농사짓던 땅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보상을 두둑하게 받아 빌라 한 채씩은 지었으니, 늘그막에 나름 신수는 훤해진 분들이다. 아직 건강하지만 농사 지을 땅이 없으니 할 일도 없어, 노인정에 모여 화투치고 막걸리 마시는 낙으로 살던 6,70대의 젊은 노인들 앞에 강아지들처럼 꼬물거리는 아이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손 잡고 나가는 산책길을 '손에 손 나들이'라고 이름 붙이고우리의 고유한 보육 프로그램으로진행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들이 만들어 주는 버들피리를 불고, 할아버지들은 손주가 아닌 동네 아이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으며 방아깨비며 개구리들을 잡았다. 노인과 아이의 낯선 동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각자의 별명으로 아이들 앞에 서는 교사들처럼, 할아버지들에게도 별명이 붙여졌다. '권장군'이나 '오바마'처럼 본인이 좋아하는 이미지로 지으신 분도 있지만, 대개는 아이들이 지어드렸다. 그중에는 단짝처럼 붙어 다니시던 두 분이 계셨는데, 한 분은 옛날 분 같지 않게 키가 훤칠하신 반면 또 한 분은 자갈처럼 단단하고 자그마하셨다. 마치 옛날 콤비 서수남과 하청일처럼.아이들은 그분들에게 '키다리 할아버지'와 '또또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지어드렸다.
어린이집에 근무하는 동안 내내 가장 큰 연령을 맡았던 나는 또또 할아버지와 자주 나들이를 가게 됐다. 왜냐하면 또또 카지노 게임가 어느 누구보다 농사일을 열심히 알려 주셨기 때문에, 가장 큰 형님인 우리가 텃밭에 갈 때 늘 동행해 주셨던 거다.
"어이, 종이배(당시 내 별명)! 여 와 봐~"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면, 카지노 게임는 남의 밭에서 서리한 고추며 가지며 호박 따위를 내 나들이 가방에 몰래 넣으시곤 했다.
"아이고, 할아버지. 이거 따시면 어떡해요. 저희 것도 아닌데."라고 질색하면, 그분은 눈을 찡긋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괜찮여. 이거 **네 밭인디, 그 집서 다 먹지도 못혀. 좀 있으믄 서리 내려 다 썩어."
아이들과 있을 때면 이렇게 별명을 부르시던 분이 퇴근 후 노인정 앞을 지나칠 때면 "남 선상, 퇴근햐?(내 성을 붙여 그리 부르시는 걸 보면 이름은 또 어떻게 아셨는지)" 하고 큰 소리로 부르신다. 마치 나를 아주 잘 아시는 것처럼, 곁에 앉아 계신 다른 할아버지한테도 원치 않는 소개를 하신다.
"남 선상이 여그 젤 큰 아그들 방 선상이여. 일곱 살째리들."
"아, 네. 오늘도 막걸리 한 잔 하셨나 봐요."
또또 할아버지와 키다리 카지노 게임는 저녁 무렵이면 언제부터 드셨는지 모르는 막걸리로 늘 불콰해진 얼굴이었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부부처럼 붙어 다니시면서 역시나 부부처럼 자주 싸우기도 하셨던 분들. 교사들 회식자리에 화제의 주인공으로 빠짐없이 올라왔던 것을 그분들 본인은 모르셨으리라. 그러나 설령 아셨다고 해도 마음에 걸리진 않는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어떤 미움도 없었으므로. 아니, 내가 모르던 농사를 아이들과 내게 가르쳐 주신 그저 고마운 분들이었으므로.
퇴직을 한 뒤에도 가끔 지나치는 길에 그분들을 뵈었다. 짱짱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더 많이들 늙으셨다.종이배라고도 남 선상이라고도 부르지 않으시고,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어색하게잠깐 눈인사를 하실 뿐이다. 나를 못 알아보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분들의 총기가 사라져서였을 수도있고, 혹은내가 그분들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분들이 나를 못 알아봐 준다고 해도 별로 서운치는 않았다. 정자에서 막걸리 병을 옆에 놓고 나란히 앉아 계시는 뒷모습을 봤으니 그걸로 됐더랬다.
예년에는 꽃이 순서대로 피었는데, 올해는 꽃들이 갈피를 잃었다고 투덜대던 날이었다. 시들어가는 매화 향을 즐기기에는 날씨가 너무 덥다고 느끼던 날, 저 멀리키다리 카지노 게임가혼자휘적휘적 걸어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아, 또또 카지노 게임는 먼 길을 먼저가셨는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혼자 다니실 수도 있는 건데'라고 괜히 죄송스러워하며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더랬다. 그리고어제, 또또 카지노 게임가 그즈음(?)세상을 떠나셨다는 늦은 부고를 들었다. 정병호 교수님이 떠나셨던 날 새벽, 진짜 부고보다 먼저 왔던 직감과 아주 비슷한 그 느낌. 뭐라고 설명할 수 없으나 스쳐가는 바람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은 그 미묘한 느낌. 나 정말 무당 소질 있는 거냐.
나들이 때면 깨끗이 다린 점퍼에 중절모를 쓰고 나오신 전직 공무원 '멋쟁이' 할아버지, 말씀은 없으셨으나 뒤에서 든든하게 서 계셨던 '단군' 할아버지. 아이들이 뛰어오면넘어질까 봐 "조심혀, 자빠져!"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자빠져 카지노 게임'라는 부르기 민망한 별명을 얻으셨던 분. 그리고 이어 가장 오래, 가장 자주 뵈었던 또또 할아버지까지 벌써 네 번째다. 동네 할아버지였다가 아는 카지노 게임가 되고, 알던카지노 게임가 이렇게 천국에서다시 만날지인이 되어간다.
다시 십오륙 년 전 기억을 소환해 본다. 당시 같이 근무했던 '누룽지'라는 선생님이 있다. 그는 나보다 열 살이 어린 처자였는데, 깍쟁이 서울여자였던 나와는 달리 노인들과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는 또또 할아버지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이들에게야 할아버지이지만 본인에게는 아저씨뻘이라며, 그분의 실명을 불러 드렸다. 나는 왠지 오글거려서 한 번도 그렇게 불러드리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 인사도 못 드렸으니 이 글에서나마 한 번 불러드려야겠다.
"한기 아저씨. 그간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뵈면 가지며 고추며 또 따 주세요. 천국엔 내 밭, 네 밭도 없을 테니 저도 기꺼이 따 드리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천국에서 또 뵙겠습니다. 참, 아직 이승에 계신 키다리 할아버지도 가끔 들여다봐 주세요. 어깨가 축 처져 보이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