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침묵은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완전히 침묵한 것이 아니었다. 가끔씩 쏟아내는 말들은 부드럽고 여성적인 표현이 아닌, 독하고 표독한 언어였다. 그녀는 감정을 여성적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대신, 그 감정을 히스테릭한 남성적 언어로 쏟아내며 살아왔던 것이다. 광례는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그녀에게 감정은 사치였고, 눈물은 약함의 표식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침묵했고, 견뎠으며, 버텼다.
광례의 모성은 뜨거웠지만 그 사랑은 말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식을 사랑했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했지만, 그 사랑을 따뜻한 말로 건넨 적은 없었다. 그녀의 사랑은 지게 위에 실린 짐처럼 무겁고 묵직했다. 집안의 생존이 모두 그녀의 어깨에 얹혀 있었기에, 광례는 무너질 수 없었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여백조차 그녀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억울했지만,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서러웠지만, 서럽다고 내색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억울하다’라는 말 자체를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단어는 감정을 느끼고 인식하며 표현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니까. 광례는 오히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자존을 지켰다. 침묵은 그녀가 고통을 들키지 않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광례는 늘 부엌에 있었고, 지게를 지고 있었으며,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야 했다. 아니,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모성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여성성은 모성 안에 눌려 있었고, 감정 역시 모성 안에 갇혀 있었다. 광례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그 사랑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했다.
이렇듯 광례는 감정을 안으로 끌어당기며 살아온 여자였다. 그녀의 몸은 감정을 품은 항아리였고, 그녀의 삶은 말이 없는 대하드라마였다. 그녀는 어떤 말보다도 무거운 침묵을 지고 살아갔다. 그녀의 딸 애순이 감정을 말할 수 있는 여자가 되어간다는 사실은, 어쩌면 광례가 끝내 하지 못한 말들을 다음 세대가 대신 시작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광례는 울지 않았지만, 그녀 안에는 울음이 있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엔 수많은 말들이 부서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여자였지만 여자로 살아보지 못했고, 어머니였지만 엄마로 불리기 전에 노동자였다. 그녀의 존재는 ‘말하지 못한 여성성’으로서, 한국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얼굴을 닮아 있다.
광례의 침묵은 단지 개인의 무언이 아니라, 시대가 여성에게 강요한 감정의 실종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감정을 말할 수 없었던 그 여성에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러나 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조용히 말을 걸게 된다.
그녀는 감정을 삼킨 여자였다. 그러나 그 삼킨 감정은, 다음 세대의 딸들에게, 조금씩 언어로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광례가 애순에게 건넨, 말 없는 유산이다.
애순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시를 썼다. 말을 아끼는 소녀가 조용히 종이에 적어내려간 언어들은 그 자체로 감정의 지층이었다. 말할 수 없었던 억울함, 설명할 수 없었던 속상함, 눈치 보며 참아야 했던 감정들이 시라는 형태로 그녀에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애순은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 생긴 조그마한 파동을 시로 붙잡으며 스스로를 여성으로 살아가게 할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애순은 반장 선거에서 떨어지고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난 억울했어요”라고 말한다. 이 짧은 문장은, 가부장의 집안에서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말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행위였다. 많은 여성들이 ‘억울함’을 느끼지만, 그것을 말할 언어도, 말할 자리도, 들어줄 사람도 없다. 애순은 용감하게 울었고,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감정이 결코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감정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주체적인 여성’의 첫걸음임을 보여주었다.
애순은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선언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자아의 태동이다. 어머니의 삶은 지게를 지고 걷는 삶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고, 그 무게에 감정조차 묻어두어야 했다. 그러나 애순은 그 지게를 내려놓으려 한다. 그녀는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말하며, 자기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자 한다.
어머니 광례의 죽음은 애순에게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애순은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정을 그대로 느낀다. 광례가 남긴 삶의 무게는 이제 애순에게 물려지지 않는다. 애순은 엄마의 희생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 속에 ‘엄마와 딸의 동체성’을 벗어나는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 있다.
애순은 이제 더 이상 엄마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만의 몸, 자기만의 언어, 자기만의 감정을 가지고 ‘여성’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선택은, 침묵의 유산 속에서 감정을 언어로 만들어낸 딸의 조용한 혁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