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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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람 Jan 31. 2022

[우리, 인연이었네요.]

단편소설

그는 어수룩한 면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한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조그마한 것에도 너무나 깊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의 부모도 여간 걱정스럽게 여긴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 꽃이 시드는 날이면 하루 종일 울먹이질 않나, 지나가다 개미라도 밟은 날이면 밥도 먹지 못하고 그렇게 슬퍼했다. 물론 개미에게 정중히 사과를 한 후 꽃밭에다 묻어주어 장례를 치러준 것은 어린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위인들은 보통 남들과는 다른 특출난 점이 있다지만 그에게 이러한 감수성과 병적인 순수함은 도대체 어디다 써먹을 수 있는지 주변 사람들은 늘 그것이 궁금했다.


"는 이 아줌마가 볼 때, 큰~ 배우가 될 것 같다!"

하루는옆집 아주머니께서 본인이 관상을 볼 줄 안다고 지나가던 그를 세워 놓고 말했었다.


"배우는 무슨, 가짜 인생 사는 것이 무엇이 그리 즐겁다고. 그냥 위대한 철학자가 되면 어떻겠니?아저씨가보기에는 니체보다 뛰어난 사상가가 될 것 같단 말이지."

아주머니의 남편분은 그에 대한 생각이 달랐지만 대개 동네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하는 것에는 위대한, 큰, 특별한, 예술적인, 독보적인, 뛰어난 등 이러한 수식어가 붙는 것이 필수였다. 물론 잘 들리지 않게는 모자라다는 둥 덜떨어진 아이라는 소리도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고맙게도 좋은점만 보아주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에게도 시간은 남들처럼 흘러가서 어느덧 스무 살이 되었다.


스무 살이라는 것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서도 사랑을 빼고서는 설명이 힘든 나이지만 그때까지 그가 변변한 짝사랑도 경험하지 못한 것은 다름 아닌 무엇과도 쉽게 사랑에 빠지는 그이기에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남중, 남고를 나왔다고는 해도 또 동네에 꽃 같은 누님들이 없었다 하더라도 시내 거리 지나다가 이쁜 여자를 봤다고 떠들어대는 친구 녀석들처럼 그런 난리통에도 조용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을 사랑하느라 너무 힘을 뺀 나머지 여자를 좋아할 만한 연애세포는 다 괴사하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친구들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미팅에 빠지고 대학교 누나들을 꼬시며 놀아도 여전히 그쪽으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기에 어쩌면 그가 너무 감수성이 풍부해서 여자로는 만족할 수 없는 남자일지 모른다는 괴소문도 잠시나마 돌았었다. 그럼에도 그는 소문으로 상처받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누군가 자신을 해코지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도 귀가 먹은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조차 없던 그였기에 그를 좀 안다는 사람들은 그가 실제로 자신이 겪은 일에만 매우 예민하고 특출 나게 행동한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스무 살이 되었어도 일곱 살 때처럼 개미를 밟지 않으려고 땅을 보며 다니고 그러다 앞을 못 보고 머리 가까이 뻗은 나뭇가지에 이마 윗 부분이라도 스치어 가지가 살짝 부러지기라도 하면 긁혀서 피나는 머리보다 부러진 가지 때문에 그날은 온종일 우울한 기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이가 스무살이나 먹었어도 이것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그라도 그런 자신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랐다. 언젠가는 큰 마음을 먹고 개미굴 앞에 앉아 '일부러 밟아 죽여버려야 하나' 하고 한참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 또 꽃이라도 일부러 꺾어서 어머니께 드려볼까 했지만 그것도 남들이 꺾어 떨어진 꽃이 보여 불쌍한 마음에 땅을 파고 그 떨어진 꽃을 묻어주고는 그냥 돌아왔다. 이러한 종류의 무수한 시도들은 단지 생각으로만 그쳐서 그에게 어떠한 희망도 줄 수 없는 무력감만 남겼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로 하고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는 수 밖에 없다고 믿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그는 신기하게도 정말 다른 사람으로부터어떠한 욕을 먹거나 놀림을 받아도 그럴 때는 감정 없는 허수아비처럼 아무런 느낌도 없어서 말로는도무지상처받는 일이 없었다. 참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개미 한 마리의 죽음에도 울음이 나는 그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는 교감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그가 미쳤다고 울면서 다그쳐도 그는 조심히 입에 행여나 미소 같은 것이 걸리지 않도록 입가를 살펴야 했었다. 그는 오직 자연과 소통하며 자연의 생명과깊은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이었다.만약그 날의 그 사건만 없었다면어쩌면지금쯤,자연을 노래하는 위대한 시인이 되었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사람을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가족애는 미미하게 있었지만 자연에 대한 사랑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기에 그가 누군가를, 특히 어떤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 상상하기 힘든 일이 스무 살의 그에게 일어난 것은 어떤 운명의 장난이었던 것일까?


그는 대학을 진학하지 않았고 돈 버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기에 그 날도여느 때처럼 한가롭게 공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새로운 장소도 아니었고 매일 하루에 두 시간씩 별 일이 없으면 꼭 머무르는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는 간혹 노인정에서 바람 쐬러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 몇 분 외에는 그 누구도 발길을 들이는 일이 없었다. 조그만 놀이터가 있었지만 아이들 웃음소리도 이 동네에서 끊긴지 오래되어서 고요한 가운데 바람소리와 새의 지저귐에 즐거워하는 것이, 하루 중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친구들이 연애하느라 바쁘다고 연락 한번 없었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날 자신이 항상 앉던 벤치에 어떤 젊은 여자가 앉아 책을 보고 있었을 때는 조금은 당황하긴 했다. 그 자리에는 벤치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모르는 여자와 같이 앉아 자연을 감상하는시간을 방해 받고 싶지않았기에 조용히 멀찌감치에서 그녀가 떠나가기를 기다리며 잠시 꽃을 보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떠나갈 생각이 없는지 이제는 보던 책을 덮더니 아예 벤치에 등을 기대어 하늘을 보며 눈을 감아버렸다. 저러다 잠이 들면 오늘 벤치에 앉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서 비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본인이 공원에 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면 그 시간을 방해받은 것 때문에 매우 심정이 상했었기에 그녀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그의 눈앞에 아름다운 노랑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순간 무엇에 홀린 듯이 춤을 추는 나비의 몸짓을 따라 걸음을 옮겼고 이윽고 이름 모를 그녀와 얼굴이 잘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평상시의 그라면 쫓아갈 수 있을 때까지 나비를 쫓아갔겠지만 나비의 날갯짓 넘어 그녀의 얼굴이 우연히 그의 눈에 담긴 순간, 그는 지금 자신이 운명과 마주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누군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것이 친구들이 말하던 그것이라고.하지만 친구들이 말한 사랑과는 다른 것 같기도 하였다. 눈물이 저절로 흐르고, 보고 있는데도 그리웠다. 오래도록 그리워한 사람을, 죽었다 다시 살아온 것을보듯이 그렇게 그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 여자는 가까이 다가온 처음 본 남자가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데도 눈을 떠서 잠시 그런 그를 보더니 다시 눈을 감고 계속해서 바람을 즐겼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는 또다시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을확신했다. 이제까지 그에게 무수한 기쁨을 안겨주었던 자연의 노래들도 이 순간에는 시끄러운 소음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한순간에비참히 추락해 버렸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어떻게 이 마음을 전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보다가 너무 벅차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서있던 그를 지나쳐 떠나갈 때에 그는 일평생 마지막으로 가장 큰 용기를 내어서 운명의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그의 말에 그녀가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조용히그를기다려 주었다. 그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야 함을 깨달았지만 수많은 말들 중에 가장 좋은 단어를 선택하고 싶은 마음에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인연이면 언젠가 또 보겠죠."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목소리도 아름다운 그녀가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러고서 뒤를 돌아 걷는데 그 걸음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서 더욱더 가슴이 아팠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그 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에 흥미조차 잃어버린 그가 그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녀와 비슷한 사람조차 본 일이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세상에서 밥벌이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것 같았던 그도 스무 살 때 그 사건 이후로 관심에도 없던 공부를 시작했다.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던지 재수만에 그럭저럭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여 다양한 진로를 탐험하고 사회에서도 다양한 직업을 거쳐갔다. 동기들이나 친구들이 슬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에도 그는 어떠한 연애도 하지 못한 채 첫사랑을기다리며 살았다.


서른이 훌쩍 넘고 마흔이 다 되어 갈 때에는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만남의 주선이 들어왔었다. 안정적인 직장에 봉급도 괜찮은 편이었던지라 혼기를 놓치기 싫은 여인들의 구애도 받아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아직도 그녀가 살고 있어서 다른 여자에게 줄만한 어떤 것도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회사에서는 그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도 예전처럼 꽤 오랫동안 돌았었다.


그 당시에 그는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가는 것을 한탄했지만어느새 그도 은퇴할 나이가 되었다. 독신으로 산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비혼 주의자도 아니었고 사랑을 못하는 사람은더구나 아니었다. 다만 아직도 첫사랑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제 죽기 전에라도 한 번만 더 그녀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그의 속을 알게 된 친구들이 대다수 그에게 미쳤다고 욕을 했지만어떤 친구는 '개츠비가 울고 갈 위인'이라며 매우 높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제 그는 일을 하지 않고 온종일 그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가 첫눈에 반한 그녀는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더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는 그녀를 아직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이가 많이 들었다. 거동도 불편하고 건강도 잃었지만, 어린 시절 동네에 그 공원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은 하늘에 감사할 일이었다. 가끔씩 힘든 걸음이어도 조금씩 걸어서 그 곳에 다녀오곤 하였다. 오늘은 날씨도 좋아서 좀 더 오래 있다 가도 될 것 같았다. 그는 평소처럼 벤치에 앉아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말랐던 눈물이 다시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꿈에 그리던 그녀가 멀리서 그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젊은 시절의 그 모습으로아니, 그때보다 오히려 더 환해진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이제는 웃으며 울고있는그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인연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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