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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Mar 28. 2025

나는 왜 카지노 게임 반복하는가

책 읽는 우체통

'카지노 게임'이란 존재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카지노 게임만이 할 수 있다고 굳게 확신하며 살았던 것 중 하나가 '생각하다'와 '문명',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존재 등 다양한 능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카지노 게임은 만물의 영장이고 그 어떤 존재보다 우수할까, 라는 질문에 점점 회의적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철저한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벗어나지 않고 호시탐탐 야만의 속성이 드러나는 카지노 게임의 탐욕과 폭력은 카지노 게임으로서의 삶에 카지노 게임감이 스며든다. 그때 지인이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카지노 게임 반복하는가'를 읽어보자고 권했다. 그래, 왜 나는 카지노 게임이 반복적으로 찾아오고 그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이젠 그 카지노 게임에 내가 다 먹혀버린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국제 에리히 프롬 협회의 라이너 풍크가 주도적 삶에 대한 에리히 프롬의 글을 모아 엮은 책으로 이 책에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한 부분에서부터 '무력감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까지 카지노 게임의 밑에 깔린 현대인의 도덕, 진아와 가아, 진짜 자유와 가짜 자유, 사물화된 카지노 게임까지 폭넓게 현대인의 무력감에 대한 원인을 근원적으로 해부하는 글을 모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유럽어 번역에서 가끔 접할 수 있는 문맥상의 오류, 더 어렵게 표기한 내용들이 독자들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철학적으로 현대인의 카지노 게임을 설명한 에리히 프롬의 생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럼에도 명백하게 현대인의 문제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물화되어가고 카지노 게임의 존엄성이 상실해가는 시점에서 진짜 자유와 그걸 추구하는 '나'라는 존재의 깊이있는 성찰을 요구한다는 점, 그리고 카지노 게임의 형태와 카지노 게임으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들은 비교적 쉽게 정리가 된 편이다.


책에서는 착취의 시대였던 19세기의 악덕 다섯가지를 먼저 기술한다. 권위주의와 노예무역과 제국주의를 통한 야만적인 착취, 그에 따른 성과 인종차별, 그로 인해 취득한 부를 취하려는 탐욕과 축재,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라고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의 다섯가지 악덕은 신자유주의를 기치로 해서 부가 한쪽에 편중되어 국가간, 개카지노 게임의 차별이 극심해지는 요즈음 또 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시장과 여론, 건강한 카지노 게임이성이 익명의 권위라고 말하지만 시장의 편중은 그가 이 글을 발표한 시대와 달리 과거와 비슷한 상황으로 가면서 더 극심하게 드러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가 분석한 스스로를 착취하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하며 스스로가 사물화되어가고 시장에서 파는 물건처럼 자신에게 값을 매기는 상황은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 없는 신경증에 빠진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욕망, 그 욕망을 실현시켜가는 과정이 스스로의 의지로 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은 이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때 윤리 교과서에서 카지노 게임은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현재는 카지노 게임은 철저히 수단화되고 있고 최고가의 카지노 게임으로 감정받기 위해 나의 기대와 희망이란 착각 속에서 자신의 뼈와 살을 갈아내어 최고의 지점에 이르려고 하지만 어느 순간 갈길을 잊고 헤맨다. 설사 목적이었다고 생각한것들이순간 그것이 진짜 자신이 원했던 것인지에 대한 허망한 질문, 혹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이 그야말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까봐 전전긍긍하며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에리히 프롬은 카지노 게임이 자아의 본질적 부분들을 억압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에게 명료해질 때, 삶의 다양한 영역을 근본적으로 통합했을 때에야 자발적 활동이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사물이 되어버린 나는 자아는 없고 사물이 완성된다해도 카지노 게임은 그 사물의 시종이 되지, 주인이 되질 못한다. 현대인이 카지노 게임을 반복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밑바닥에는 타인의 인정, 사랑을 얻으려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없다는 것에서 더욱 카지노 게임을 느낀다고 한다.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의 저자 루이지 피란델로의 작품을 언급한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피란델로의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을 읽으며 보이는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가. 내가 보는 내 모습, 타인이 내게서 보는 모습, 그리고 나의 실체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게 했던 그 소설은 여러 면에서 생각할 게 많은 작품이었다. 타인이 보는 나도 분명 내가 아니고 내가 보는 나도 내가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누군인지.


에리히 프롬은 카지노 게임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팡세가 언급한 '카지노 게임은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지만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로 생각하는 카지노 게임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과연 생각하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의 뇌를 가득 채운 것은 사물, 탐욕이 아니던가. 생각이란 본질에 대한 물음인데 물 위에 비춘 빛무리만 보고 있는 곳은 아닌지. 반짝거리는 것에만 몰두하면서 물 속을 꿰뚫고 들어간 빛은 보지 못하는 카지노 게임에게 어쩌면 카지노 게임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하지 모르겠다.


'나'라는 존재를 인지한 다음 모든 간섭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를 바라볼 준비가 되었을까. 여전히 자율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카지노 게임은 자유를 말할 수 있을까.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카지노 게임은 헤어날 수 없다. 고통의 극복,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극복할 수 없다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없다. 나르시스트로 가짜 자신의 모습에서 만족하는 카지노 게임은 타인이 정의해놓은 겉모습에서만 만족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고양된 의미의 사랑받을 기대를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은 본질을 깨닫지 못한 채 인식할 때 나는 수동적이 되며 사랑은 사랑받아야 한다는 기대로 결국 '지옥은 다름아닌 타인들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말로는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아는 듯이 말하지만 금세 그럼에도 물질에 종속되어 있는 가짜의 자신만을 발견할 할뿐이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오류를 알면서도 현재란 벽 앞에서 어쩔 수 없다고 주저앉는다.

그는 카지노 게임을 해소하기 위한 제언을 한다. 먼저 감탄의 능력을 키우라고 한다. 어릴 때는 이 능력이 있지만 어른이 될수록 이 능력을 상실하는데 감탄할 수 있어야 창조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카르페디엠', '메멘토모리'와 같은 말로 많이 들었던 말이다. 과거나 미래는 결국 현재의 집합체고 그렇게 될 것들이다. 현재에 충실함, 집중하는 것 보고 느끼고 만져라. 그것이 자아 경험, 나 스스로 느끼고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해야 한다. 그러니 내가 하는 현재의 결정에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그리고 자신에게 부딪쳐오는 문제에 정면으로 마주하고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키워라. 갈등을 피하면 카지노 게임은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와 같다고 말한다. 그렇게 매번 새롭게 태어날 때 생물학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스스로가 삶의 주체자가 되었을 때 '나'는 카지노 게임이란 현대의 병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이 '떠나라' 했을 때 의심하지 않고 불안과 긴장의 세계로 떠난 것처럼.


독후활동을 하는 모임을 위해서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좀 더 명료해진다. 어쩌면 우리가 현재 앓고 있는 사회의 다양한 병들은 각자가 겪는 카지노 게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어느새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으로 굳어진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 어른들, 거짓말을 뱉고서 수습하지 않는 어른들, 아이와 같은 행동을 하고서도 점잖을 빼는 어른들, 성숙하지 못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은 병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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