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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Jan 02. 2025

죽거나 죽이거나 Ⅱ

인터스텔라_대한민국 편 #10



25.

살육. 그랬다. 희망호 승무원들은 땅굴족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였다. 거의 백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 속에는 여자도 있었고 어린아이도 있었다. 그렇게 시체를 쌓아 놓고 그들은 가버렸다. 먹이로 지상족을 잡아간 땅굴족, 그 복수를 한다며 두 배가 넘는 땅굴족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고 떠난 희망호 승무원. 과연 누가 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정의가 있기는 한 걸까?


가족을 잃은 땅굴족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지하세계에 울려퍼졌다. 졸지에 부모 모두 다 잃고 고아가 된 아이도 있었고, 하나뿐이 자식을 잃고 망연자실한부모도 있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삶이었다. 붉은수염이 부하들을 시켜 죽은 자와 산자를 떼어 놓았다. 그리고 양지바른 곳에 큰 구덩이를 파고 그들을 묻었다.낮에는 밝은 태양 밑에서 견딜 수가 없는 그들이지만 죽어서라도 따스한 빛을 쬐게 해주고 싶었다. 작은 동산 하나가 만들어졌다. 땅굴족죽으면 영혼이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땅에 묻혀 밝은 태양을 쬐다가 세월이 흐르며흙으로 돌아갈 거라고,그래서 자신들과 영원히 함께 할 거라고.


붉은수염이 부하들을 집합시켰다. 이제 원수를 갚아야 할 시간이었다. 지상족은 물론 자신들을 습격했던 이방인들까지 모조리 죽여야 할 것이었다. 어디서 온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죽여 후환을 없애야 했다. 죽거나 죽이거나, 끝장을 보아야 했다. 놈들이 갖고 있는 무기가 두렵기는 하지만 그놈들도 약점이 있을 터. 붉은수염이 외쳤다.


"이제 원수를 갚아야 할 시간이다. 지상족은 물론 이방인 놈들까지 모조리 도륙을 낼 것이다. 닥치는 대로 죽여라!놈들의 고기맛이어떤지 오늘밤 그곳에서 맛을 볼 것이다."


"와! 와! 원수를 갚자!"

"이방인의고기맛을 보자!"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약자를 제외한 땅굴족 남자 전원이 원정길에 올랐다. 어스름 달빛에 이어지는 원정대의 길이가 수백 미터에 달했다. 그들이 지나는 길에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뚝 그쳤고 그들의 발자국 소리만길게 이어졌다.



지상족 마을에서도 대비를 하고 있었다. 땅굴족이 분명히 복수를 하러 올 것이고, 이번에는 단순히 마을 주민 몇 명을 끌고 가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함장은 마을 젊은이들을 동원하여 울타리 너머에 통나무로 엮은 방책을 겹겹이 설치토록 하였다. 땅굴족이 단숨에 넘어오는 것을 막고 대응할 시간을 벌고자 함이었다. 덕분에 농작물 수확을 마치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야 할 주민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바쁜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비록 땅굴족방어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불만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왜냐하면나무가무거워 가뜩이나힘든 데다 조함장이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일이 여간 고된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조함장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인데 왜 그렇게 다들 소극적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땅굴족이 쳐들어왔다.


땅굴족은 지난번과 달리 정찰조도 없이 바로 전면공격을 감행하였다. 그것도 정문 쪽만이 아닌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해 왔다. 한쪽만 공격하여서는 이방인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감당하기 힘들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이방인들 무기의 분산 그리고 인해전술. 그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는 맞았고 어느 정도는 틀렸다.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지키고 있던 희망호 승무원들의 레이저건이 불을 뿜었고, 달려들던 땅굴족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진 놈을 밟고 그 뒤에 있던 놈이 달려들었고, 그놈이 쓰러지면 그 뒷 놈이 달려들었다. 끝이 없었다. 결국엔희망호 승무원들의 사정거리에 들지 않는 취약지역이 뚫렸고,놈 두 놈 울타리를 뛰어넘어 들어왔다.그곳을 지키고 있던지상족은 땅굴족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서너 명이 한놈을 상대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땅굴족은 밤의 사내들이었다.컴컴한 어둠 속에서의 전쟁은 땅굴족이 월등히 유리하였다.땅굴족이 울타리를 넘어 속속 들어왔고 그들을 막던지상족 젊은이들이 픽픽 쓰러졌다. 창에 꿰인 가슴에서 붉은 피가뿜어져나오고, 땅굴족이 후려친 얼굴에서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갔다. 머리가 터지고 손발이 잘려나갔다. 땅굴족은 지상족을먹이로 잡아갈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격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단박에 죽일 욕심으로 더욱 힘을 주어 찌르고 베었다.


땅굴족에 뚫린 에 있던 돔에 불이 붙었다. 그쪽을 지키던 지상족들은 죽거나 목숨을 구해 도망쳤고, 놈들이 돔 여기저기에 불을 질렀다. 빨갛게 타오르는 불길에 놀라고 매캐한 연기에 질식한 지상족들이 돔 출입문을 열고 뛰쳐나왔다.그러나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바로죽음이었다. 땅굴족의 창과 칼이 춤을 추었다. 돔 안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이었으나 그놈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여자와 아이들목이 댕강 잘려나가거나 등에 칼을 맞고 고꾸라졌다. 놈들은기세를 몰아돔 안으로 진입하여 살육을 벌였다. 여자의 가슴을 창으로 찌르고배를칼로다.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놈의 발에 차인 아이는 벽에 부딪혀 머리가 터져 죽었다. 이글거리는불길 사이로 짐승 같은 놈들이 그르렁거리는 소리, 여자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아이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아비규환, 지옥이 따로 없었다.


26.

땅굴족의습격으로 지상족 마을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가 팔십여 명, 부상자가 삼십여 명에 돔 한 채가 전소되었다. 결국 돔 한 채만큼의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은 셈이었다. 그나마 그 정도에서 그친 게 다행이었는지도 몰랐다. 시간이 도왔다. 땅굴족은 동이 트기 전에 자기들의 본거지로 돌아가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돔 한 채가 완전히 박살 날 무렵 붉은수염의 퇴각 명령이 떨어졌고, 놈들은 마치 썰물 빠지듯 지상족 마을에서 빠져나갔다. 한편 땅굴족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대부분이 희망호 승무원들에 의하여 사살된 놈들이었는데 거의 백 명에 가까웠다. 마을 근처에 와보지도 못하고 쓰러진 놈, 가슴에 피가 엉켜 붙은 채 방책에 걸려 있는 놈, 울타리를 넘다가 이마가 뚫린 놈, 돔 출입구에서 등에 창을 맞고 엎어진 놈 등등.


마을 주민들은 죽은 자를 정리하는 데에도많은 시간과 힘을 쏟아야 했다. 평화롭게 살던 마을에 그 많은 시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큰 구덩이를 파서 땅굴족 사체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지상족 희생자들은 자기들 장례절차대로 화장하였다. 한꺼번에 처리해야 할 희생자 수가 너무 많아 전 주민이 달라붙어야 했다.사람들은 가족 친지 동료를 잃은 슬픔을 삭이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쩌면 슬퍼할여유조차 없는 지도 몰랐다. 놈들이 또 쳐들어오기 전에해야만 하는 일들이 우선이었다. 죽은 자를 태우는 불길그을음 그리고 시커먼 연기가 마을과 주변 하늘을가득 메웠.


며칠이 흘렀다. 지상족은 물론 땅굴족도 움직임이 없었다. 지상족은 마을을 재정비하느라 바빴고, 지상족과 마찬가지로 상당한인명손실을 입은 땅굴족도 한숨 돌릴시간이 필요하였다. 하지만언제또다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적을 경계하느라 양쪽 다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쉬어야 하는 지상족은 경계를 서느라 밤에 잠들지 못하였고, 밤에 활동하고 낮에 자야 하는 땅굴족은 낮에 쳐들어올 지상족을 경계하느라 쉬지를 못하였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자 모두가 지치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자조함장이 마을 원로와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적의 공격을 두려워하며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나서서땅굴족 소굴로 쳐들어가 끝장을 야 합니다.그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버려야 우리 마을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지상족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안 그래도 지치고 힘들어 죽겠는데 땅굴족 소굴까지 쳐들어가다니. 그리고 그놈들이 어디 보통 놈들인가?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오히려 그놈들에게 모두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조함장이 말을 이었다.


"나에게 놈들을 끝장낼계책이 있습니다. 우리 쪽 피해 없이 놈들을 섬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를 믿고 따르세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테니 각자 준비들 하십시오."


다들 반신반의했지만 조함장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고, 조함장은희망호 승무원들과 함께 다음날에 있을 작전계획 논의에 들어갔다.조함장이 생각한 계책은 바로 화공작전이었다. 땅굴족이 쳐들어왔을 때 돔을 불태우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땅굴 속에 불을 지른다면 어떻게 될까? 놈들은 살기 위해밖으로 빠져나올 거고 그렇지 못한 놈들은 연기에 질식해 죽을 것이었다. 그저기다리고있다가 나오는 놈들을 차곡차곡 절단 내면 될 일이었다. 보다 더 쉽고 효과적인 작전이 있을까?승무원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짰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지상족 마을을 출발한 사람들은 정오가 채 못되어 땅굴족 본거지에 도착하였다. 그들은희망호 승무원 한 명에 지상족 명씩 조를나누어지난번에 보아 둔곳의 환기구입구로 향했다. 그리고나머지는 출입구 앞에 집결하였다. 지상족 젊은이들의 손에는 농작물을 수확하고 나온 짚단이 한 묶음씩 들려있었다. 바짝 마를 대로 마른 짚단은 불길이 살짝만스쳐도 활활 타오를 것 같았다.희망호 승무원들이 출입문 틈에 폭약을 설치하고 물러 났다. '꽈광!'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산산조각 나서 날아가고 돌무더기가 우르르 떨어졌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를 뚫고 지상족 젊은이들이 몰려들어갔다. 그리고는 가지고 간 짚단과 횃불을 모두 던져 넣고 빠져나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환기구멍을 통해서 연기가새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예상대로 땅굴족들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캑캑거리며 기어 나왔다. 그 위로 따가운 햇살이 쏟아졌다. 그들은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눈을제대로 뜨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었다.그들을 상대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지상족 젊은이들의 무자비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창으로 등배 허벅지 등을 사정없이렀다. 저항도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자들의목을 칼로 베었다. 어린아이의 옆구리를 발로 차서 언덕 밑으로 굴려 버렸다. '악!' '으악!' 여기저기서비명소리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피어올랐다.지상족 젊은이들은 땅굴족에게 당했던 가족과 동료의 원한을 그대로 되갚아 주었다.그런 그들의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이미 순박했던 과거의 지상족이 아니었다. 어느새 살육을 즐기는 괴물되어 가고 있었다.




(11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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