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죽이거나 Ⅲ
인터스텔라_대한민국 편 #11
27.
낮과 밤. 하늘은 어떻게 낮과 밤이라는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냈을까? 낮과 밤이라는 조화로 지상족과 땅굴족 간의 전쟁도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낮에는 지상족이 땅굴족 본거지로 쳐들어가고, 밤에는 땅굴족이 지상족 마을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그들 간에 싸움이 가능한 시간은 길어야 다섯 시간 남짓. 지상족은 해가 지기 전에 그들의 마을로 돌아와야 했고, 땅굴족은 해가 뜨기 전에 지하세계로 돌아와야 했다. 십 킬로의 산길을 힘들게가서 전력을 다해 싸우고 다시 십 킬로의 거리를 힘들게 돌아와야 하는 싸움. 싸움이거듭될수록 학습능력이 생겨서인지 어느 일방이 크게 우세하거나 크게 불리하지 않았다. 사실 전력상으로는 땅굴족이 월등하였으나 지상족에게는 희망호 승무원이라는 절대적인 우군이 있었다. 그리하여 힘의 균형이 엇비슷하게유지될수 있었다.
조함장 일행이 지상족 젊은이들을 이끌고 땅굴족 소굴로 가서 화공작전을 펼쳤을 때, 조함장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그들을 섬멸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지하세계는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넓었고,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지상족이 불을 지른 입구 쪽에 있던 땅굴족들만 희생을 당하였고, 안쪽에 있던 땅굴족들은 다른 곳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미처 다른 곳으로 대피하지 못하고 인근의 환기구를 통하여 밖으로 나온 땅굴족은 육십여 명.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지상족의 창과 칼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지상족에의하여무참하게 살육당하고말았다.
날이 가고 전투가 이어질수록 양쪽 다 소모전으로 흘렀다. 예전처럼 대량학살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사망자와 부상자가 꾸준히 나왔다. 덩달아 의사인 김박사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딱 달라붙어 다니는 레나가 있었다. 그녀는 마치 간호사라도 되는 듯 김박사의 일손을 도와 지상족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김박사가 부상자의 찢어진 상처를 꿰매고 치료하고 나면 그녀가 상처를 감싸고 항생제 주사를 놔주었다. 부상자들은 그런 김박사와 레나에게 한없이 고마워하였다.
땅굴족이 사는 지하세계는 굉장히 넓었다. 지상족에게 여러 차례 공격을 받은 출입구 쪽은 완전히 망가져 폐쇄되었고, 그들은 다른 출입구를 통하여 지상으로 나왔다. 사실 출입구는 여러 곳에 있었다. 그리고 내부에도 곳곳에 격막 장치가 있어 유사시에는 구역별로 차단할 수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화공을 포함한 지상족의 공격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로 방어해 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지상족 때문에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상족은 그들의 먹이였다. 연하고 육즙이 풍부한 살코기가 생각날 때 찾아가 필요한 만큼 취하면 되는 쉬운 상대였다. 그러나 이제는 먹이는커녕 그들에의해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땅굴족 중에 계속되는 전쟁에 대한 피로감과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도대체 누구를위한, 무엇을 목적으로 한 전쟁인가? 먹이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고, 지상족 마을을 점령하여 그곳에 살 것도 아니었다. 얻을 게 하나도 없는데 자신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그리고 지상족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붉은수염의 지도력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힘 있고 성질 급한 그에 대적하여 겉으로내색하지는못했지만 속으로불만이 쌓여 갔다. 그동안은 힘이 세면 다였으나다른 종족과 맞닥뜨려서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힘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누가 나서서 이 전쟁을 끝내고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십 킬로를 왕복하며 목숨 걸고 싸우기도 싫었고,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몰라 맘 졸이며 살기도 싫었다.
지상족 사람들도 점점 지쳐가기는 마찬가지였다. 희망호 승무원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밤이라도 돔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였다. 가끔 한두 명씩 땅굴족에게 잡혀가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아니었다.땅굴족과 전쟁을 치르면서 거의 절반 가까운 부족민들이 죽었다. 이러다가 자신들이 모두 죽어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정도였다. 낮에는 땅굴족 소굴로 쳐들어가 전쟁을 치르느라, 밤에는 땅굴족의 공격에 대비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기는 지상족도 마찬가지였다.
28.
낮에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던 김박사가 자리에 누워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레나가 땀에 젖은 채로 역시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김박사에게 있어서 그녀는 활력소였다. 그녀를 품는 것이 거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가 레나를 등뒤에서 안으며 생각하였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가능할까? 땅굴족과 전쟁이 계속되는 한 레나는 물론 자기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최후의 한 사람마저죽어 없어질 때까지 계속될 것 같은 전쟁. 이 전쟁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김박사는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레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지상족 마을 지도자 아마라와원로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작금의 사태에 대하여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평화롭게 살던 마을에 이방인이 오고 땅굴족과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금방 끝날 것 같던 전쟁은 그 끝이 보이지 않고 마을 주민들만 계속 죽어 나갔다. 도대체 이 전쟁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과연 끝이 나기는 할까? 차라리 이방인들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들만 없었더라면 마을이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희망호 승무원들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일. 그들을 막을 수도 없고 전쟁을 그만둘 방법도 없었다. 그저 모두들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한편 지상족 젊은이들은 생각이 갈렸다.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피맛을 본 사람들은 이미 살육의 짜릿함에 젖어들었다. 땅굴족의 가슴에 창을 깊숙이 찔러 넣거나 배를 칼로 그을 때 손끝을 통해 느껴지는 전율감. 상대방이 피를 뿜으며 발아래 쓰러질 때 느껴지는 정복감. 내가 너보다 강하다는 우월감. 아드레날린이 팍팍 솟았다. 그들은 들고 있는 창과 칼에 더욱 힘을 주어 상대방을찌르고 베었다. 반면에 계속되는 전쟁에 지칠 대로 지치고 끔찍한 참상에 치를 떠는 사람들은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싶었다.그들은 갑자기 나타나 전쟁을 일으킨 이방인들이 미웠고, 그들에게 아무 말도 못 하는 마을 지도자나 원로들에게 실망하였다. 이렇듯 지상족 사람들도 계속되는 전쟁과 마을 주민들이 겪고 있는고통에 생각이사분오열되고 있었다.
며칠 후다시 지상족 젊은이들을 이끌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조함장에게김박사가 회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앞으로 전쟁을 어떻게 이끌 것이고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듣고 싶었다.김박사 자신만 회의적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궁금하였다. 희망호 승무원들이 모두모인가운데 김박사가입을 열었다.
"조함장님은 전쟁을 언제까지 할 생각입니까? 정말 땅굴족이 다 죽어야 끝낼 겁니까? 지금까지 지상족 피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그 피해가 더 늘어날 거고요."
김박사의 말을 들은 조함장의 눈꼬리가 올라가며 언짢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김박사님도그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잖습니까? 그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 괴물! 그놈들을내버려 두무료 카지노 게임가는 지상족 사람들 모두 잡혀 먹히고 말 겁니다. 어쩌면 우리들까지도요.그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버려야 평화가 온단 말입니다."
김박사가 지지 않고 반론을 제기했다.
"함장님, 그 길밖에 없을까요? 지금까지의 전쟁에서 보셨듯 그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이미 지상족 사람들 절반가까이 죽었습니다. 전쟁이 계속된다면 그들보다 지상족 사람들이 먼저 전멸할지도 모릅니다. 그 책임은 누가 지지요? 외부에서 온 우리가 이들의 삶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이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이라도 된듯말입니다."
조함장이 김박사를 똑바로 쳐다보며 언성을 높였다.
"나는 군인입니다. 군인은 적으로부터 우리 편을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겁니다. 적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때까지 말이죠. 땅굴족은무지막지한적입니다. 김박사님은 그들을 상대로 전쟁 말고 뾰족한 수라도 있나요? 놈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할 겁니까?"
"..."
김박사가 변변한 답변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그동안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이한나 박사가입을 열었다.
"그런데 땅굴족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지하세계에서오랫동안 살아왔던 것으로 보이는데,그렇다면 어디 다른 데서 온 것도아닐 테고 말이죠."
그 말을 들은 김박사가 엉뚱하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땅굴족이 다른 곳에서 온 게 아니라면 뭐우리 한민족의 후손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이박사가 정색하며대답하였다.
"그건 모르죠. 가능성은 어디에도 열려있으니까요.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땅굴속에서 살아왔다면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요?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다면 어쩌면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 그것은 희망호 승무원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개념이었다. 망해버린 지구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만난 인간 레나 그리고 지상족.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온순한 성격의 그들이 한민족의 후손이었으면 후손이었지, 흉한 외모에식인을 하는 땅굴족의 뿌리에 대해서는생각해 볼 가치도 없었다. 그런그들이한민족의 후손일 수도 있다니? 이박사가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면 땅굴족 몇 명을 생포해서 의사소통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어쩌면 뭔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이박사의 의견을 들은 조함장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지상족 젊은이들을 이끌고 땅굴족 소굴로 가서 몇 놈을 생포해 오겠습니다. 이박사님 말을 듣고 보니 그놈들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하네요."
다음날아침,조함장은 지상족 젊은이들을 이끌고 마을을 나섰다. 그날의 임무는 땅굴족 몇 명을 생포해 오기. 그동안은 그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마주치는 즉시 싸웠고 죽이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과연 그놈들은 누구일까?우리 한민족과 관계가 있는 걸까?
(1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