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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현성 8시간전

카지노 쿠폰.

thou.




안녕. 오랜만이에요. 무슨 일이냐고요?


그냥. 문득 생각나서.


안 어울리는 짓 하지 말라고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냥, 그냥.

왠지 모르게 센치해지는 날 있잖아요.

오늘 마침 그랬거든요.


나, 기억력만큼은 되게 자신 있었거든요? 삼 년 정도 전까지는 초등학교 때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니까요.


누구와 친했고, 녀석이 어떻게 생겼고, 또 어디에 살았고, 무엇을 좋아했는지까지 기억할 수 있었어요.


가끔 내 자신한테 놀랐다니까.


- 알고 보면 나 엄청난 천재인 거 아냐?


하하. 막 이래.

근데, 이제 더는 아닌 거 같어. 점점 흐려져요. 자주 떠올리지 않는 기억들이 점점 사라지는 게 느껴져요.


동창회, 결혼식, 장례식 같은 곳에 가서요.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분명 또렷하게 그려지던 과거가 이제는 서리 낀 안경을 찬 것처럼 흐릿하고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조금 무서워졌어요. 기뻤든, 슬펐든, 화났든.

다 소중한 것들이었는데.


기억마저 못하게 되면 이제 정말 무엇 하나 남겨둔 게 없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아아,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둘걸.

아아. 동영상이래도, 녹음이래도 좀 해둘걸.


집 창고에 산처럼 쌓인 사진첩 뭉치를 볼 때마다 그랬거든요.


- 엄마! 이제 이런 거 좀 그만 모아. 다 짐이잖아. 짐!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했어요.

슬슬 그 마음이 이해되는 것 같아요.


사진이라도 남는 게 어디야.

그냥 비가 와서, 누군가를 만나서, 책을 읽어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문득 과거의 어딘가로 가고 싶은데.

이제 흐릿하게 잔상만 남아버린 곳으로 가려면

그래, 무언가 기록물이 있긴 해야죠.



오랜만에 경복궁엘 왔어요. 물론 일 때문에.

그거 알아요? 우리 사귀고 첫 데이트가 경복궁이었어요.

겨울이라 영하로 내려간 그 추운 날씨에 근처에서 한복까지 빌려서는 종일 궁 안을, 근처 돌담을 도담도담 돌아다니던 때가 있었죠.


카지노 쿠폰도, 나도 그때 참 어렸었는데.


나, 이제 기억이 안 나요. 이유만.

그리고 그날 있었던 일들만 선명해요. 날짜가 기억이 안 나.


그래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조금 무서워졌어요. 무뎌지는 것보다도 나중에 다시 이곳에 와도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말이에요. 그럼 섭섭하지 않을까 싶어서.


우리의 타임라인은 이제 다시 평행선이 되었지만, 내가 가장 빛나고 예뻤던 시절을 함께 했던 당신과의 일상을 조금 더 간직하고 싶어, 그 시절의 우리를 여기에 남겨볼까 해요.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거 같긴 해요.

아, 그러지 말걸 하면서 말이에요.


하필 이럴 때 플레이리스트에서 당신이 제일 좋아하던

시티 오브 스타즈(City of Stars)가 나오네.


아무튼 노래 탓이에요.

https://www.youtube.com/watch?v=GTWqwSNQCcg


더 잊기 전에. 우리의 일부를 여기에 남겨요.




- 우리 몇 가지 규칙을 정하면 어때요?

- 규칙이요?

- 네, 어려운 건 아녜요.

- 뭔데요? 무어든 누나가 좋아하는 거라면 다 좋아요.

- 여보, 당신이나 별명으로 부르는 건 흔하잖아요.

서로 카지노 쿠폰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

- 카지노 쿠폰?

- 카지노 쿠폰.

- 왜 하필 카지노 쿠폰예요?

- 연애에 상하 관계는 좀 그렇잖아요. 누나, 오빠 이런 것도 좀 별로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나이랑 서열 같은 게

뭐가 중요해.

- 서로 동등한 위치였음 한다는 의미로 '카지노 쿠폰'인 거네요.

- 맞아요!

- 다른 하나는요?

- 서로 존대해요. 우리.

- 존대요?

- 네. 반말을 하다 보면 편한 만큼, 상대를 막 대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무심하게 던지고, 서로에게 상처받거나 실망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서로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로 존대했음 해요.

- 그래요. 저야 어차피 연하니까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건데, 누나 입장에서 손해 아녜요?

- 카지노 쿠폰.

- 아. 카지노 쿠폰 입장에서는 손해일 거 같은데요.

- 괜찮아요. 그럼 약속한 거예요!




- 카지노 쿠폰. 있잖아요.

- 응?

- 우리 싸우게 되면, 글로 푸는 거 어때요?

- 글이요?

- 말이란 건 아무래도 잘 정제되지 않잖아요. 순간의 감정이 섞이고, 뜨거워진 머리와 마음에 영향을 받으니까요.

- 반성문 같은 걸로 해야 하려나..

-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거, 어때요?

- 편지?

- 응. 편지요. 바라는 것들부터 미안한 마음까지 담고 싶은 것들을 눌러 담아 주는 거예요.

- (웃음) 카지노 쿠폰. 그게 좋겠다. 말로는 나 분명 실수할 거예요. 좋은 것 같아요.




- 이 동네, 참 좋은 것 같아요.

- 옥탑이라 많이 불편하지 않아요?

-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거요? 괜찮아요! 있잖아요. 내 하루 중 최고의 힐링이 뭔 줄 알아요?

- 힐링?

- 힐링! 대표한테 혼나고, 상사한테 깨지고, 엄마랑 싸우고, 호르몬과 날씨 때문에 하루 종일 우울하고 짜증이 나도 이거 하나면 싹 없어져요.

- 뭔데요? 궁금하다.

- 카지노 쿠폰랑 꼭 안고, 옥상에서 저 하늘 보는 거. 그게 내 낙이에요. 그거면 다 아무것도 아니야.

- 나도요!

- 카지노 쿠폰는 낮이 좋아요, 밤이 좋아요?

- 음, 밤이요.

- 역시, 나랑 취향이 같을 줄 알았어요. 나도 밤이 좋아요. 특히 저 달. 밝게 뜬 달이 보이는 하늘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요. 카지노 쿠폰는요?

- 밤은 조용하잖아요. 모든 것들이 잠들어 있는데, 저 하늘과 나만 깨어있는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카지노 쿠폰.

- 호오. 난 하나 더 있어요. 밤이랑 이 옥탑을 좋아하는 이유.

- 뭔데요?

- 흠흠.

- 아 뭔데에!

- 카지노 쿠폰는 나한테 저 달 같아요. 깊고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빛내는 저 달처럼 나를 밝혀주는 사람이니까요. 보고 있으면 꼭 카지노 쿠폰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아요. 왜인지 외롭지 않기도 하고.

- 내가 달이면, 카지노 쿠폰는요?

- 나는 글쎄요. 밤하늘이 되고 싶어요. 카지노 쿠폰의 밤하늘. 저 달이 얼마든지 밝게 빛날 수 있도록, 제 품을 내어줄 수 있는. 아니, 보듬어 줄 수 있는 밤하늘이 되었음 해요. 카지노 쿠폰에게.




다들 우릴 보며 오글거린다고 했지. 어떻게 문어체로 서로를 부를 수 있냐면서 우릴 신기해했어.

정작 나나, 당신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 우리는 서로가 좋으면 장땡인 사람들이었으니까.


글쎄, 되돌아보면 조금 아쉬워.

너무 빨리 만났던 게 아닌가 싶어서.

조금 더 여유로울 때, 서로가 완성되어 있을 때.

마음에 여유가 있고, 결여된 것이 없을 때 만났다면.


우리의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어서.


헤어지고 난 다음에,

차라리 잘됐다는 사람들의 반응이 슬프더라.


그만큼 당신과 내가, 우리가 똑 달라붙어서

그 긴 시간을 보냈는가 싶어서.


이제 다 지난 이야기지만.


-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남들은 뭐라 할지 모르지만, 나와 닮은 카지노 쿠폰라서.

더 좋았고, 행복했어요.


끝내, 동화 같은 결말이 되지는 못했지만

내게 좋은 영화 한 편 같았던 당신에게.


행복과 해피 엔드가 함께하길.

진심으로.


오늘따라

달이 유난히 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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