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상가나 예술가가 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들은 내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줄 수 있고 그 때문에 나의 정신과 정서, 인격의 도야에 훌륭한 영양분이 되어 준기 때문이다. 뉴턴이 말했듯,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야 비로소 이 넓고 오묘한 세계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 올라설 때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태도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올라선 위치가 나 스스로의 힘으로 오른 곳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자리는 내 것인, 나의 자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된 건, 거인의 시점이지 내 시점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도의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인도의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는 그의 저서 [자기로부터의 혁명]에서 이 점을 강조하여 지적하면서 '자기동일시'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자기동일시란 내가 아닌 무언가에 대하여 나를 동일시하여 나의 정체성 또는 힘을 확장하려 한다는 심리적 경향을 일컫는데, 예를 들어 초등학교 시절친구들과의 다툼에서 '우리 아빠는 경찰'이라고 겁을 주거나, '우리 오빠들이 더 노래를 잘한다'는 식의 아아돌 팬덤간의 말싸움에서도 자기동일시를 찾아볼 수 있다.(초등학생은 아빠와 자기카지노 게임 추천, 아이돌팬은 가수와 자기카지노 게임 추천)우리는 이런 유치한 말을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좀 더 우회적인 방식을 통해 자기동일시는 계속된다. 가령, 파리에 다녀오고 난 뒤에는 이미 파리지엥이 되어 나에게 모든 우아한 이미지가 입혀진 듯한 기분에 젖게 되거나(여행지에서 셀카를 찍는 행위 뒤에는 이런 심리도 숨어있을 것카지노 게임 추천. 파리의 배경은 나와 자기카지노 게임 추천된 이미지가 된다), 유명 연예인이나 권력자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랑을 삼는 일이 그러하다.(유명인과의 인증샷 또한 그렇다. 유명인의 곁에 있으므로 유명세 또는 화려한 이미지를 자기카지노 게임 추천화한다)
최근에는 그보다 고급화된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지식이나 취향을 통해 카지노 게임 추천를 드러내는 자기동일시인데,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저작 몇 권을 읽고 대단한 좌파나 된 듯 우쭐대면서 세상을 비판할 거리를 찾는다거나(마르크스 또는 좌파 이미지에 자기카지노 게임 추천), 베토벤을 즐겨 듣는다고 하면서나의 고급취향에 스스로 도취되어 대중음악을 우습게 생각하는 시선을 가지는 따위가 그렇다.마르크스와 베토벤은 대단한 사상가, 예술가이고 그들의 책과 음악은 나의 성장에 큰 자양분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을 읽고 듣는다 하여 내가 곧 마르크스, 베토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어깨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지면서 사람들을 낮게 보는 행위가사실은 얼마나우스꽝스러운 모습인가 하는부끄러움을 망각한다. 마치 '우리 아빠는 경찰'이카지노 게임 추천 이유로 친구를 무시하는 초등학생의 거드름이 얼마나 유치한지를 정작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 경우에차라리 아이들은 어딘지 모를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는 순수함을 아직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성인들은 오히려 자신이 생각과 행위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과장된 몸짓과 거만한 시선으로어깨를 들썩이곤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다른 이와의 동일시를 통해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지려하는 이유는 그것이 쉽게 얻어지는 우월감이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그런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고난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 성장하는 노력보다는(오래 걸리고 티도 별로 안나는)위대한 영웅들의 시선을 빌려 잘난 척하는 행위를(쉽고 즉각적인 효과를 가진다)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시선이란 나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치열한 고민과 갈등, 실패와 좌절의 과정을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시선만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것이며 비로소 세계를 보는 하나의 위치를 점유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어렵게 얻은 진짜 '나의'시선은어쭙잖게 빌려온 자기카지노 게임 추천와는 달리 그렇게 간단하게 배타적이고 비판적이지않다. 왜냐하면 다른 이가 성취해 놓은 결과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얻어진 것인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나만의 시선을 가지는 것 그 자체이지 다른 이보다 얼마나 우월한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영웅들의 위대함을 자기동일시의 수단이 아닌 '나와는 다른' 시선으로, 나의 시선을 만들어준 '디딤돌'로서 바라보게 되고, 그러한 시선은 존경과 감사의 깊은 감정을 동반하게 된다. 그것은 거인의 어깨를 빌린 얄팍한 우월감과는 전혀 다른 깊은 감정이다. 마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느꼈을 그런 감정이며, 슈베르트가 베토벤에게 느꼈을 그런 감정일 것이다. 그때는 이미 내려다볼 다른 사람들의 존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나와 영웅간의 영혼의 깊은 교감과 존경에서 오는 충족감만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서로 교감과 존중을 나누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 베토벤과 슈베르트
어쨌거나, 마르크스와 베토벤은 위대하지만 그들이 바로 '나'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나와 동일시될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니다. 세계와 인간을 보는 하나의 시선을 가진다는 일은, 위대한 영웅들의 도움을 빌릴지언정 스스로 자신의 힘을 통해 올라야 하는 일이며, 그럴 때만이 자신만의 길, 자신만의 위치, 자신만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자기동일시로 우월감을 손쉽게 수혈받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인문학 서적 몇 권을 읽고, 몇몇의 클래식 음악을 듣고, 미술 전시회를 몇 번 다녀오고 난 뒤, 심지어 TV 속 인문학 강연이나 요즘 유행하는 지식 자랑 예능 프로그램('알쓸신잡'이나 '차이나는 클래스' 등을 비롯해 각종 유튜브 영상들까지)을 보고 난 뒤, 마치 내가 작가, 음악가, 미술가, 철학자나된 듯, 혹은 오디션의 심사위원이나 된 듯, 다른 작품들을 무시하거나 손쉽게 평가하고 재단하며 자신의 지식과 취향을 뽐내려 하는 사람들 말이다.(그렇다고 그런 프로그램이나 그것을 보는 행위 자체를 비판하는 건 아니다. 어찌됬건 인문학과 인문학적 사유가 확산되는 건긍정적인 일이며, 그런 측면에서 해당 콘텐츠는 그 한계점에 불구하고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자랑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수용의 태도에 있다.)
지식을 자랑하는 인문학 상품들이 넘쳐난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비평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작품을 끌어올리고 작가를 존중하는 것이 비평의 기본이지요. 비평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공감과 감동이라고 믿습니다. - 문학평론가 김윤식 -
본래 비평이란 작품에 대한 사랑과 공감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사상이든 예술이든 어떤 작품이란 그것을 창조한 창조자의 영혼을 담고 있는 하나의 세계다. 진정 작품을 볼 줄 아는 통찰을 가진 비평가라면 그 영혼의 치열함을 잊지 않는다. 때문에 작가에 대한, 작품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기본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 작품을 쉽게 평가하고 지적하는 사람은 작품이 담고 있는 영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들은 대개 작품의 정수를 비껴간 지엽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말이 향하고 있는 대상이 '작품' 자체에 있지 않고, '나'의 우월함에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란 어때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바야흐로 혐오와 비난의 시대다. 저마다 요약된 정보와 미숙한 관찰력을 가지고 다른 이의 작품을 쉽게 난도질한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과 몸짓은 결국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한 동일시에 불과하며, 그들의 언어처럼 나이브하게 말해보자면, '코스프레'에 다름 아니다. 요즘같이 인문학이 상품처럼 '소비'되는 시대에는 위대한 작가와 사상가들마저도 우월함을 위한코스프레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른 무언가로 위장하는 건 가짜이고 가면이다. 가면을 쓴다 하여 가면이 내 얼굴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가면을 쓴다는 건 매우 불편한 일이다. 가면을 쓰고 아무리 높은 사람, 유명한 사람, 훌륭한 사람의 흉내를 내 보아도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고 오히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눈치만 살피게 되는 건, 그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아무리 속여보아도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가면을 쓴 채 '나는 가면을 쓰지 않았어'라고 되뇌어봐야, 얼굴이 가면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 얼굴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의 시선이, 내 눈빛이, 내 생각이, 곧 내 얼굴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나이며 내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은 힘들고 지겨운 긴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이지만, 그렇게 얻어진 나의 세계는 나 답기 때문에 즐거움과 환희를 가져다준다. 철학자 보부아르의 말처럼 하늘을 날고 바다를 건너가는 일은 힘들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하늘과 바다는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그녀의 책
하늘은 날 수 있는 사람의 것이며, 바다는 항해할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