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내가 꿈꾸던 진짜 카지노 게임은 이런 모습이었다. 세미 정장 차림으로 능숙하게 운전해 출근하는 직장인, 회사에서 유능함을 마음껏 발휘하는 전문가, 저녁엔 향긋한 와인을 곁들인 맛있는 식사를, 주말엔 나른한 여행과 여가를 즐기는 문화인, 무엇보다 나만의 취향을 채운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여유를 즐기는 생활. 그게 진짜 카지노 게임의 삶이라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그와 전혀 달랐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평일이라는 사실에 절망했고, 출근하는 순간부터 쏟아지는 일 속에서 피로감과 사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든 진이 빠진 상태에서 돌아온 집에선 쓰러져 자는 게 일이었고,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음식과 술을 쏟아붓는 동시에 설움과 분노를 토해내느라 바빴다. 쉴 새 없이 종종거렸지만 여전히 카지노 게임 꿈꾸던 장면의 주인공의 길은 요원해 보였다.
혼자서 단단하게 살아가는 카지노 게임이 되기 위해선 갖춰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생계를 꾸릴 수 있는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일상에 필요한 상식과 소소한 능력, 사회제도 및 이슈에 대한 예민함도 갖춰야 했다. 그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집과 확실한 고정 수입이 없었다. 집에 뚫린 구멍은 물론 몸에 걸치는 옷에 난 구멍 하나 메우지 못했고, 몇 번이나 왔던 길을 찾지 못해 방향을 헤맸다. 상상 속 카지노 게임과 정반대로 그저 허점 투성이인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나와 달리 주변 사람들은 진짜 카지노 게임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sns에 올라오는 멋진 인테리어, 그 안을 가득 채운 고급스러운 취향을 볼 때마다 부러웠다. 여전히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소년 같은 내 방과 달리 자신만의 무드를 찾아간 그 공간은 나와 그 사람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망한 것만 같았다. 낯선 공간에서의 생활은 잠시 그런 나를 잊게 했다. 여전히 어린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 내 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간에 머물렀지만 상관없었다. 그건 잠시 내가 머물 장소에 불과했으니까.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꽤나 근사한 공용공간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 속에 어영부영 지내다 보면 잡생각도 희미해졌다. 그러는 동안 내 상상 속 진짜 카지노 게임도 조금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편안한 차림으로 느긋하게 산책하는 사람, 그날의 밤하늘이나 공기 상태를 섬세하게 헤아릴 줄 아는 사람, 진심을 담은 따뜻하고 단단한 글을 쓰고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담는 사람,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사람.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나보다 어렸지만 나보다 카지노 게임인 사람들. 그런데 그들 앞에서 자괴감이 들거나 인생이 망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이상했다. 나와 달리 제 몫을 잘 해내는 주변인들을 보며, 자기만의 색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채워가는 누군가를 보며 보잘것없는 내 생을 탓하던 나였는데. 그들이 가진 능력이나 행운을 보며 때론 부러움을 넘어선 질투를 쏟아내기도 했는데. 그런데 왜 나와 다른, 나보다 훨씬 더 멋진 사람들에겐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서울에서와 달리 질투보다는 고마움이 앞섰다. 각자도생의 논리가 앞선 대도시에서는 '우리'라는 단어보다 '나' 또는 '너'라는 말이 익숙한 탓이 아닐까? 나란히 함께 가기보다는 그게 무엇이든 순위를 매기고 능력이라 표현하는 일에 친숙하니까. 심지어 같은 팀 내에서도 나와 다른 뛰어난 능력치를 가진 누군가와 비교하고 질투하는 게 일상이었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그런 장면을 종종 마주했고, 그 감정의 주인이 나였던 적도 물론 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는 조금 달랐다. 그 점이 좋았지만 신기했다. 대체 왜 그런 걸까?
일단 여유로웠다. 룸메도, 나도 그곳은 일상이 아니었다.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사는 생활을 하지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그곳은 일탈에 가까웠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게스트 역시 그랬다. 여행자이기에 좀 더 너그러웠다. 일상에서는 뾰족해질 일도 여행지에서는 너그러워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상한 일들을 설명하기 부족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상대의 부족한 점을 허용해 주었다. 왜 너는 그걸 못 채우느냐고 탓하는 게 아니라 그건 내가 채워줄 테니 나의 부족함을 네가 채워달라는 식이었다. 카지노 게임람이 약점이 아니라 함께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는 셈이었다.
나와 다른 게 많을수록 좋았다. 하루에 6시간씩 운동을 할 만큼 운동을 좋아하는 룸메는 몸 쓰는 게 영 서툰 내게 여러 가지 운동법을 가르쳐 주었다. 기계와 사람 앞에서 전진하는 친화력 갑 룸메는 모든 낯선 존재 앞에서 몸 둘 바 모르는 내게 달려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비전공자로서 글을 쓰겠다고 홀로 전전긍긍하는 내게 조언과 용기를 건네는 문창과 룸메도 있었고, sns 마케팅과 영상에 문외한인 내게 가르침을 주겠다는 룸메도 있었다. 오가며 마주하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대안 학교나 아프리카 혹은 국내 다른 지역처럼 내가 모르는 세계를 엿볼 수도 있었다.
그들과 걸음을 맞추면서 내 안의 숨은 나를 마주하기도 카지노 게임. 내가 미처 몰랐던 편견이나 부족함 혹은 강점 같은 것들. 예컨대 내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상대의 부족한 점에 닿으면 꽤나 근사한 강점으로 부각되었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아이디어가 그랬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라 여겨 딱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타로점을 보는 것도, 짧은 문장을 뽑아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능력이라 부르기 애매할 만큼 사소한 일이라 여겼던 것들도 멋진 달란트로 만들어주었다.
신기했다. 서울에서는 취향이든 가치관이든 비슷한 사람들을 찾았는데. 다르다는 건 스트레스가 아니라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알지 못했던 경험과 시각은 성장할 수 있는 씨앗이 되었고, 나의 허술함은 상대의 멋짐을 건지고 확장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씨앗이 되었다. 홀로 단단하게 서겠다는 단순한 꿈이 실은 원대한, 어쩌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명확해졌지만 카지노 게임았다. 나사 열 개쯤 풀린 허술한 나도. 풀린 나사를 조여줄 누군가와 함께라면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