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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Dec 25. 2024

영웅의 이름 뒤, '구도자' 카지노 게임을 쫓다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하얼빈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하얼빈(HARBIN, 2024)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를 소재로 한 올 연말 최대 기대작 영화 <하얼빈은<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 등 한국의 현대사를 강렬한 스타일과 이야기로 연출한 우민호 감독의 신작이면서, 현빈 배우가 주인공 안중근 역을 맡으며 더욱 이목이 집중되어 왔습니다. 그러나이 영화는 아마 많은 분들이 기대하거나 예상했던 영화는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며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방식도, 실제 사건을 장르적으로 재구성해 흡사 케이퍼 무비처럼 서스펜스를 이끌어내며 재미를 자아내는 방식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극도로 치밀하게 정제된 미장센 위에서 극도로 정적인 방식으로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의 행적을 쫓는 이 영화는 한국적 역사 드라마나 보편적 장르물의 길을 떠나, 단단하고 고요한 초상 너머 치열한 탐색과 성찰로 나아가는 인간 안중근을 들여다 봅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현빈)이 이끄는 독립군은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있었던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혈투 끝에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육군 소좌 모리 다쓰오(박훈)를 비롯한 일본군들을 전쟁포로로 잡아들이기도 했으나,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따라 그들을 즉결처분하지 않고 풀어줍니다. 안중근은 풀어준 그들에게서 최소한의 인간됨을 기대했겠지만 역시나 일본군에겐 그마저도 없었고, 결국 이 선택이 수많은 동지들을 잃는 결과로 돌아오면서 안중근은 균열과 의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살아남아 홀로 건너오던 얼어붙은 두만강 위 자신의 모습처럼 더는 물러서거나 망설일 것이 없는 안중근은 손가락을 끊으며 자신의 결심을 새로이 하고, 한국통감부 통감인 '늙은 늑대'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를 처단함으로써 생애를 걸고 그 결심을 행하기로 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이창섭(이동욱), 계획을 실행에 옮길 거처를 제공하고 스피커 역할까지 해줄 최재형(유재명)까지 안중근의 계획을 함께 할 동지들이 모입니다. 그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할 하얼빈 역으로의 여정을 시작하지만, 1년 전 안중근에 의해 풀려났던 모리 다쓰오를 필두로 일본군들의 추격이 이어지면서 내부에 밀정이 존재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예기치 않은 위험요소 속에서도 한번 시작된 하얼빈으로의 여정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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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면 으레 예상 가능하듯 <하얼빈의 이야기 또한 1909년 10월 26일에 그가 치른 하얼빈 거사를 목적지 삼아 달려나갑니다. 그러나 그 태도는 예상과 다릅니다. 독립투사의 숭고한 모습을 절절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휴먼 드라마의 터치도, 곳곳에 도사린 위험을 돌파하고 최후의 저격 순간까지 어떻게 도달하는지를 그리는 첩보물의 터치와도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징적인 장소에 홀로 선 안중근의 모습이 많고 예상보다 대화 장면이 무척 많은 이 영화의 태도는 마치, 안중근이란 인물을 우리가 잘 알던 (너무 잘 알아서 이런 이름의 뮤지컬까지 나온)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그 영웅이란 이름 뒤에 숨은 일종의 '구도자'로 바라본다는 느낌을 줍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러한 접근의 출발점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게 했는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가족을 뒤로 하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다시 되찾을 수 있을 삶의 찬란한 순간들까지도 포기하고, 그 임무가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그로 인해 조국이 독립할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임무에 어떻게 그토록 의연히 뛰어들 수 있는가 하는 범인의 궁금증 말입니다. 그러자면 '구도자'의 이야기를 그림에 있어서 그 모양새는 반드시 정갈해야 할 것이고, 그 목소리는 결코 요란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 마음은 결코 흘러넘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얼빈은 최신 아이맥스 카메라까지 동원하며 자극적 가공 없는 자연의 압도적 이미지를 담아내고, 빛과 그림자가 마치 도형을 이루어 접맞춰진 듯한 미장센으로 치밀한 구도를 연출하며, 섣불리 언성을 높이거나 몸부터 나가는 일 없이 정중동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중근이 하얼빈 거사의 그날,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은 로드무비처럼도 느껴집니다. 얼어붙은 강과 모래바람 흩날리는 황야를 넘나드는 그 '구도의 여정' 위에서 안중근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개 중에는 끝없는 투쟁의 풍파에 지쳐 세상 뒤로 모습을 감춘 은둔자도 있고, 조국을 위한 의지보다도 살고 싶다는 의지가 더 큰 바람에 그만 위협에 굴복하고 마는 변절자도 있고, 그를 없앰으로써 떨칠 수 없는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추적자도 있습니다. 물론 그 여정에는 저마다 다른 태도로, 그러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그의 곁을 지키는 동지들 또한 있죠. 이내 우리는 안중근으로 하여금 그 여정을 중단없이 계속 할 수 있게 만든 건 아마도 그가 빚진 수많은 동지들의 목숨이었을 것임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그 혼자만의 의지가 아닌, 함께 뜨겁게 싸우다가 스러져간 동지들의 목숨의 무게가 더해졌기 때문에 가벼이 돌아설 수도 멈춰설 수도 없는 걸음임을 알게 됩니다. 살아서 지금 그의 곁을 지키는 동지들의 의지까지 투영하여 그는 끝내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길을 찾고 먼저 나아가며, 그 길 위에는 곧 그의 뒤를 이어 걸어갈 이들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끝나지 않는 어둠을 앞에 두고도 횃불을 손에 든 사람들이, 손에서 손으로 불빛을 전하며 행렬은 만들고 길을 이루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그 또한 인간이었기에 품었을 번뇌와 그 결과를 뼈아프게 안고서 길을 찾아가는 안중근의 모습을, 그런 그의 모습에 투영된 수많은 이름모를 독립투사들의 불꽃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 지난한 고민과 숭고한 각성이 빛과 어둠을 가로질러 담긴 듯하니, 영화의 장면장면은 건조하고 정제된 가운데서도 보는 이를 숨죽이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얼빈(HARBIN, 2024)


안중근을 연기한 현빈 배우에게 <하얼빈은 아마도 현재까지 필모그래피 최고작이 될 것입니다. 그간 드라마에서의 흥행 타율에 비해 다소 소모적으로 쓰였던 영화 분야에서는 물론 드라마까지 통틀어서도 이 영화 속 그의 연기는 최고로 꼽을 만합니다 '까레아 우라!'(러시아어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때 외에는 언성을 높이는 일이 좀체 없는, 오히려 숱한 고난과 시련으로 소리칠 힘조차 없이 지쳐 있는 모습 안에서도 시들지 않는 결연한 의지는 또렷하게 반짝이는 눈빛과 낮지만 강인한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선뜻 겹쳐지지 않는 듯했던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 어느덧 겹쳐지며, 그간 다뤄져 온 안중근 의사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어느 때보다 생생하고 호소력 짙은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안중근의 독립군 동지 우덕순 역의 박정민 배우 역시 그 결심이 확고한 만큼 스스로 불타오르지 않는, 외려 지극히 침착한 모습에서 또렷한 결심이 느껴지는 독립투사의 면모를 담백한 연기로 그려냅니다. 또 다른 독립군 동지 김상현 역의 조우진 배우는 독립운동에 함께 몸담았지만 평범한 인간의 모습에 보다 가까운 인물로서 내색하지 않지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근원적 두려움을 빼어나게 표현해내며, 역시 독립군 동지인 공부인 역의 전여빈 배우 또한 개인적 아픔을 뜨거운 투쟁의 의지로 승화시키는 강인한 여성을 멋지게 보여줍니다. 최소한의 인간됨도 지니지 않은 채 열등감을 동력삼아 움직이는 일본군 모리 다츠오 역의 박훈 배우가 보여주는 날카로운 연기도, 언론사 소유주로서 안중근의 임무를 묵묵히 지원하는 독립운동 동지 최재형 역의 유재명 배우가 보여주는 위엄 있는 연기도 인상적입니다. 특별출연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상반되는 기질로 안중근과 대립하기도 연대하기도 하는 독립군 동지 이창섭을 강렬하게 보여주며 존재감을 새기는 이동욱 배우, 악을 체화했다기보다 그것이 마치 당연하고 명예로운 사명인양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을 서늘하게 그려내는 일본의 저명한 배우 릴리 프랭키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배우들이 저마다의 이름값에 걸맞는 연기로 쓰라리고 황량하지만 숭고한 안중근의 여정을 채워나갑니다.


이제 다시 이 영화의 출발점이 되었을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현재의 우리야 그 결말을 알지만 조국이 독립을 되찾기까지 그로부터 36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작금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고 어떤 미래로 그들을 이끌지 짐작도 되지 않았을 그들은 어째서 그 모든 불확실성을 무릅쓰고 조국의 독립에 스스로를 투신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기약 없이 독립을 외치던 나날들 속에서 영화 속 누군가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며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얼빈은 그처럼 두려움에 찬 범인의 의심에 맞서, 이육사 시인의 시 '절정' 속 한 구절과 같이 '서릿발 칼날진' 두만강 위에 서서 온몸이 스러져 가려는 가운데에도 명멸하기는커녕 선연하게 우리를 응시하는 안중근의 눈빛으로 답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0여년 뒤 현재의 관객들 또한, 이 이야기를 영화로서 똑똑히 지켜봄으로써 함께 답하고 있습니다.


<하얼빈(HARBIN,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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