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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Mar 09. 2025

돌아왔어요

정서윤




"망그러진다"라는 뜻의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망그러짐은 나비와 같다. 가냘픈 나비가 날아다니며 얇고 긴 다리를 꽃가루 위에 내려놓을 때, 내 친구들은 그 나비를 잡아서 잔인하게 뭉개버렸다. 잔혹하게 망그러져 가루가 된 나비는 어딘가 검은 부분이 있기도 했고, 액체가 흘러내리는 부분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허약한 날갯짓의 잔상을 같이 섞은 결과물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친구들은 웃고, 더욱 더 아름다운 나비와 더욱 더 좋은 뒷태를 가지고 있는 동물들을 찾아 나선다. 식물들과 동물, 파충류들을 잔인하게 밟아 뭉개고, 그들은 어디선가 희열을 느끼는 듯 보였다. 사실 그 친구들은 나비와 식물들처럼 아무런 말을 할 수 없기에 그저 함매하고 있는 존재를 찾는 것을 즐거워했다. 자신은 어떠한 성대라는 이름의 기관을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뱉을 수 있으며, 그러한 것들이 지금의 인간의 문명과 가장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묻어져 버린 그들의 진화 능력은 그저 무시하기 따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이 뭉개져가고,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진보와 신체 기능, 특징들은 이미 파충류 도감에서 오래토록 본 지라, 생리적 기능과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가는 특징들이 그저 우리가 알아둬야 할 참고사항이란 것만 기억하고 있었던 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망그러지는 상황 속에서 나는 그들의 신체 장기와 여러 기능들이 파열되는 모습을 그저 표정 없이 지켜 보고만 있었다. 나는 참 나빴던 것 같다, 그 시절에는. 학교 폭력 예방 교육에서는 계속해서 "피해자를 괴롭히는 가해자보다, 가해자를 그저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방관자가 가장 나쁘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지나가는 개미들을 바라볼 때면, 항상 느끼게 된다, 그들에게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생명이라도 나라는 이름의 인간의 손 위에 올려놓으면 한없이 작은 사슬관계와 생태계의 일부가 되듯, 우리는 서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걸.


이듬해 질 녘에 꽃들은 다시 만개하고, 누군가는 어딘가에 조용히 서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 있다. 아침부터 누군가의 성화를 받아주느라 힘든 몸을 이끌며 조용히 잠들다 보니 아침의 햇살을 다 받아낼 준비를 하지 못했던 창백한 몸은 태양의 따뜻한 열풍을 받아 속절 없이 따뜻하게 데워진다. 힘들게 몸을 이끌어 창문 앞에 걸터 앉아본다. 그리곤 자신의 힘든 처지와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동시에 출력함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생각하면 안되는 것을 떠올리기도 한다. 매일 같은 하루에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결론적으로 정해져 있듯, 우리는 그저 관성으로만 이것을 처리해나가고 감정과 이성을 잃어가는 로봇같이 행동한다. 잔혹하게 냉정한 소리를 듣다 보니 이제는 내성이 생긴 듯 하다. 계속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고, 인간의 고칠 수 없는 특성이라고 호소했지만, 가을 타 겨울 내리는 차가움을 그녀에게서 겪을 수 있었다. 이 문제 때문에 계속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고, 새롭게 살아가는 세상 그 끝에서 난 추락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나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너무나 게을렀던 나였고, 너무나 야만적이지 않았던 나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이것이 절대로 고쳐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 속의 결함과 성숙함을 동시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망그러져만 가는 나비를 바라보며 그들을 조용히 주워 어딘가에 묻어주었던 지난날의 내가 생각난다. 과학시간에서는 그들을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해부하였고, 짚신벌레와 같은 아무 작은 생명체를 표본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관찰하게 하였다. 그들은 좋은 목적에 쓰이고 있다, 동시에 학대당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희망을 잃고 살아가다가 투신하려는 김씨처럼, 그는 2억 3천의 빛이 있었고 어쩌면 나보다 더욱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 정도면, 힘든 게 아니었다. 절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쁘다. 어떤 때는 세상을 다 뺏어갈 것 같이 절망 속에 빠뜨리고서는, 갑자기 뭐라도 줄 것 처럼 나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달리 절망에 빠진 나를 구할 방도는 없었기 때문에 그저 살아가는 와중에서도, 파랗게 물들어버린 하늘 위에서 떠다니고 있는 나를 생각할 때가 많다. 저곳에서는 내가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날아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기에 나는 아직까지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고, 원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비록 누구보다도 행복한 집안이었고, 잔소리 하나 없이 누군가에게 동등하게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힘듬을 많이 겪는다, 나는 그렇게 완벽하고 더 좋은 조건의 집안에서 살기 위해 열심히 부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인간도 없었고, 나 처럼 나약하고 우매한 인간조차 존재하기 힘든 공식이었기 때문에, 나의 존재는 마치 리만 가설처럼 느껴졌다. 사람의 탄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의 관계를 맺고 새롭게 태어나며 우렁차게 울어대는 아이는, 도대체 얼마의 한계를 뚫고 무료 카지노 게임의 손에 안겨질 수 있었을까. 존재라는 잔상에 대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쩌면 공식적으로만 표면화되어있던 것은 아닐지 의문을 던져본다.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아도 미동이 없는 무료 카지노 게임은 눈치가 없는 건지, 어쩌면 사람을 혈압을 오르게 만드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직까지 무료 카지노 게임은 아무런 희망도 깨닫지 못했으며, 가장 우매한 날것의 존재를 뛰어넘고 어른의 존재로 비상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른은 명예롭지 않았다. 사교육과 학원을 통상적으로 믿고 맡기는 부모들과 그런 것들이 없어도 이번에 대학전쟁에 나온 육준형 학생처럼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자신들이 케어해보려 노력한다. 무료 카지노 게임은 아둔하다. 자기계발 책을 읽어도, 아이들을 그렇게 때리고서도 은근히 무료 카지노 게임에게 당근을 주는 것이 정말로 맞는 것일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부모들은 채찍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편이다. 무료 카지노 게임의 채찍과 적은 양의 당근은 가족 관계를 쫓고 쫓기게 만든다. 나는 그 상황에서 항상 쫓기는 신세였다. 갈 영역이 점점 줄어들었기에 마지막의 결과물은 결론적으로 "항복과 순응"이라는 것이었던가? 나는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무료 카지노 게임에게서 고장나지 않기 위해 뛰었다. 우리나라가 자살자가 많은 이유이자, 고장난 정신을 가진 인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생된 이유이다.


나중에는 나도 아무 말 없이 숙맥을 타는 순간이 올 것이다. 희망만을 다 버리고 살아가는 김씨표류기의 주인공의 마지막 희망은 결국 "짜장면"이었고, 그 계기는 정말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듯, 살아가는 사람들도 어디선가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 많이 기다려왔던 나의 미래가 피투성이로 끝날지는, 아름다운 죽음으로 끝날지는, 허약한 코마 상태의 이유로 약물을 이용한 연명된 목숨 속 몸부림치는 영혼으로 인생이 끝날지는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아직까지도 힘듬의 반의 반의 반도 가지 않았다느 생각을 함과 동시에, 눈알을 자주 굴리며 풀라는 블랙 라벨에 손을 대본다. 국어보다는 수학이 좋아지는 요즘, 내 삶에도 지속적인 변화가 생기면서 내가 바라보는 창 밖 풍경도 하얀색이 되었다가 초록색이 되고, 빨간색이 되기도 했다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나는 마치 춤을 추는 나무처럼 손들을 바삐 움직인다. 그 1년 동안을 의미 없게 보내지 않기 위해, 정확히는 가족 관계 등본에 기재되어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만들어주기 위해. 사실 하루에도 그저 어딘가에 누워서 행복하게 눈을 감고 몇 시간 정도 가만히 있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잔디밭위에 누워서 자연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는 과정 중, 다시 한 번 망그러진 나비의 영혼이 생각나게 되지 않을까.


비록 난 그들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었다. 새롭게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어딘가 허약해보이지만 세상 위로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그 나비처럼 외유내강의 성격을 가지고 싶었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효율을 따졌다. 그리고 비효율적인 행동은 하지 말자고 거부반응을 보였다. 정말로 투신할 수 있다는 그 믿음을 김씨도 가졌기 때문에 다리에서 떨어진 것이 사실일 것이고, 집 밖에 나오지 않고 은둔한 채 살아가는 그 여자의 마음 속에도 사실은 펜팔을 하고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사회에서 떨어지는 것만이 처음에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라고만 느꼈다. 가만히 나를 안아주는 그들의 따뜻함에 부응하듯 자연스럽게 눈물 한 방울을 톡, 떨어뜨리는 내가 밉다.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나의 행복이 비록 즐거울 수 있었겠지만, 난 솔직히 나의 행복을 위해 지금 엄청난 양의 체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사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다. 언젠가 나도 저 하늘 위로 올라가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시간은 아주 오랫동안, 오랫동안의 연대와 말투를 거쳐 이루어질 것이다. 그곳의 나의 반응상태와 생체 리듬은 최고치를 찍을지도,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분에 최하치를 찍을 수도, 어쩌면 이를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저 나를 품었던 인간들의 배에서 그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고 태어났다는 것이 기쁘다. 그 잔혹한 고통의 일격이 내가 처음에는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힘들게 나온 나조차 그 당시에는 말을 할 수 없었겠지만, 점점 성장해나가면서 난 약해졌고 많이 허약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고통과 결함만을 안에 품었던 지난날의 나와는 달리, 난 커서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에게 잔혹한 일격과 복수를 날릴 것이다. 그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게, 그들도 어쩌면 나와 같은 고통을 겪을 수 있을까봐. 이것들은 그동안 키워준 사람들의 정을 배반하는 것일지도, 그 때문에 나는 히키코모리라는 이상한 이름의 타이틀과 여러 세상에서 배척되고 욕을 먹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희망이란 건 없다. 청출어람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듯, 쪽빛이라는 이름의 스승에서 더욱 더 푸른 푸른색이라는 이름의 제자가 나오듯, 그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제자는 언젠가 스승의 등에 칼을 꽃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제자는 그동안 자신에게 힘듬을 주고, 숭고한 아름다움을 주었던 스승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우직하고 단단한 등에 칼을 꽃는다. 세상의 순리라는 말을 하기에는 고의성이 너무나도 들어간, 그렇다고 고의적 복수라고 하기에는 그들을 존중하는 매개체의 마음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이는 우리가 풀 수 없었던 역설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고통스럽고 힘들겠지만, 바람이 불고 우리는 살아야만 했기 때문에, 나는 그 마저도 견뎌낼 수 없다는, 김씨처럼 투신하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커서 누군가에게 그것들을 그대로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표류하면서 살아간다. 그저, 미래에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순응하며 희망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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