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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Mar 11. 2025

무제

D-414

2025. 03. 10. D-414


나의 환대와 대접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감기라는 손님은 며칠 머물다금세떠나가 버렸다. 해골처럼 비쩍비쩍 옷을 걸치고 헐렁헐렁 돌아다니던 백수 시절, 그러니까 육체가 비루하게 여위었던 건 정말로 가난 때문이었다.웬만한 감기에도 우아한 자세를 잃지 않고 고통을 의전하고 환송할 수 있는 육체와 정신, 그것은 경제적 상태에서 온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돈보다 나약하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밥 한 끼제대로 허용하지 않았던 건, 단순히가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통장보다 가난한 건 정신이었다. 사랑이었다.나 자신을 아이처럼 먹이고 재우며 보살피려는, 무조건적이며가정적인 사랑. 어떤 상황에서건 방긋방긋 미소로 응답해 줄 사랑. 내게는 그것이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꼴딱꼴딱 넘어가는 절망의 지평 아래서, 죽고 싶었다. 그만하고 싶었다. 정말이지 나는 할 만큼 했다. 지금의 가 생각해도 그때의 나충분히 했다. 나는그런 나를 이해한다.나를 말리고, 붙잡고, 다독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어떠한 결정에 있어서 그것의 존재 유무가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감기를 떠나보낸 뒤 나는 다시, 폭식한다. 다시 술을 마신다. 육체든 정신이든 버릇처럼 아슬아슬한 상태를 유지한다. 작고 조용하고 성실한여인이폭식증에 알코올 의존증이란 걸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나의강박적인 시간 계획은 이 모든 걸은폐하는 데완벽하게 내한다. 나는 도대체 왜이러는 걸까. 어쩌면 과거의 내가 나를 너무나 오랫동안 굶겼기 때문은 아닐까. 또한 미래의내가 나를 굶길까 봐 불안해서는아닐까.지금 이 순간나는, 가능한 한 최대한을섭취하려고한다. 나도 모르게 비축하고, 미친듯이저장하려 한다. 이 폭음이불안마저 섭취하도록.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불안을 조장하고 있는 것 아닐까. 미래의 내가 또다시자기를학대하고 알코올 말고는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 애가 또헐렁헐렁 종일 숲만 헤매고 다니면 어떡하나. 술이 술을 부르고, 불안이 불안을 부르고…….


고백하자면 나는, 나를 끊임없이 걱정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조만간 상실할 일자리와 월급, 밥과 건강 앞에서 나는,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이 걱정은 나를 살리려 하기도 하고 나를 죽이려 하기도 한다.)그러나그 또한 사랑이었다.그러니까 사랑의 관점에서, 미래의 나에게 너를 걱정하고 보살피는 사람이 있다고, 너의 수호천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니, 주장하고싶었다. 나만큼 너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어디에있냐고. 나처럼자주 너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냐고.아니,애원하고 싶었다. 여기로돌아오라고,너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다고.지금나에게로. 다시,또다시, 그럼에도또다시.




무언가를 붙잡고, 기억하고, 남겨놓기 위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사진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때 거기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사진이라면, 일기 역시 마찬가지다. 나에게 , 술, 사진(카메라)은서로 교환 가능단어들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오늘은 여기에 하나 추가하고 싶다.


나.

.

.


그런데 '나'를 추가하는 순간, 네 단어가 모두 사라지는 것 같은…….

.

.


많은 단어가 필요치 않다.평생네 단어만 가지고 글을 쓴다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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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리잔에 따라 부은 건 시간이 아니라, 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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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리쉬: "'나'에서 '나'를 버리면 '나'만 남습니다."





2025. 3. 7. 금.


퇴근길에 가방이 무거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가방 안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책과 카메라, 선물 받은 와인이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들 모두 지금 당장, 오늘의 가방 안에 담아야만 했다. 이 세 친구들과 함께라면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고, 어디론가가지 않았도 좋았다. 휘청거리는 순간 스며드는 도취적인 긍정감속에서 돌연, 내 삶이 무거워진 건 바로 책과 카메라, 술 때문이 아닌가 하는 누가 봐도 당연한 생각에 미친다.


새삼스럽게.


(내가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암, 내 포기 못하지.)


끝까지 고집스럽게 짐들을 짊어지고 집으로 간다. 휘청거리면서 간다. 오직 내 집으로 간다. 나는 인간 세상과는 도무지 연애를 하지 못한다. 인간 세상은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었다.그래, 나의세 친구들.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난과 외롬, 피로와 곤비가 아니라종이 위에 펼쳐지는 친숙하고 나약한 세계,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려서 보관한 내가 사랑한 수많은 장면들, 코르크를따는 순간공기 중으로 송송흩어지는블랙체리와 블랙베리의 풍성한 과즙이다.


내가 유리잔에 따라 마시는 건, 시간이다. 일단 한잔을비우고 나면 거기에 더 이상 시간은 없다. 내가마셔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일어나는 현기증은 시간 있음과 시간 없음의 시차로 인한갑작스러운피로감이다.


다음날 아침이면 알게 된다. 술병에 담겨 있던 술도, 어제의 기억도, 환몽처럼 사라졌다는 걸.그러나여기서 반전. 라진 순간은 모두나의카메라에 저장되어 있다.사진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유일한 것은 사라짐자체다. 그것은 꿈이다. 그러므로 카메라에 담겨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꿈. 마치알코올이자체로숙취해소제이기도것처럼. (알 만한 사람들은 알리라!) 그리하여 나는 안다. 이 모든 것이 '그때 거기에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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