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엄마가 1인실에서 1달이 되었을 때 몸에서 더 이상 항생제 내성균이 발견되지 않아 다시 다인실로 가게 되었다. 엄마는 의사 표현은 가능했지만 이제 말씀도 못 하시고 잘 드시지도 못해 우리는 그냥 1인실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주일이 더 지나고 그날은 내가 병원에서 자고 아침에 집으로 가는 날이었다. 잠깐 아침잠에 빠졌는데,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내가 가고 엄마가 아침에 피를 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는 오늘이 이벤트가 될 거라고 했다고 전화기 너머로 전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과 동시에 왜 의사는 그날을 이벤트 데이라고 하는지 화가 났다. 가족에게 절대 이벤트가 될 수 없다.
내가 갔을 때, 엄마는 숨을 거칠게 내쉬시며 나에게 어떤 대답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엄마에게 인사했다.
“엄마! 먼저 가있어. 우리도 거기로 가서 만날 거야. 엄마 사랑해”
엄마의 눈빛은 이제 모든 게 이해가 된다는 듯했다. 그리고 받아들이기로 하신 것 같았다. 동생은 찬송가를 틀어 드리고, 우리는 한 명, 한 명 엄마에게 인사했다. 병원에서는 모든 가족이 오고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
큰딸도 엄마와 인사했다. 아직 어려 놀랄 줄 알았는데 딸은 침착하고 의연했다.
“할머니! 무서워하지 마. 우리도 갈 거야, 나중에 만나”
딸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엄마가 힘겨운 마지막 숨을 쉬었다. 그렇게 모두와 인사를 하고 가셨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10년 이상 엄마의 병으로 마음 편할 날 없었지만 상실의 무료 카지노 게임은 컸다. 엄마가 입원했던 병원으로 가면 엄마가 여전히 “왔니?”라며 반길 것만 같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3개월 후, 상실의 무료 카지노 게임이 아물기도 전에, 시어머님은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엄마의 장례식장에 오셨을 때 많이 우셨다. 평소에 사이가 좋았던 두 분은 그렇게 같은 해 하늘나라로 가셨다.
암을 치료하는 과정이 얼마나 무료 카지노 게임스로운지 아는 나는 이제 다시 남편의 암투병을 같이 이겨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