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체코슬로바키아와 유럽의 정세를 논의하기 위한 '뮌헨 회담'. 왼쪽부터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운
아돌프 히틀러가 친위 쿠데타인 '장검의 밤'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이후, 나치 독일은 급격히 전쟁의 길로 나아갔다. 국제연맹을 탈퇴한 데 이어 군사력을 제한하고 있던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 재무장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징병제가 시행되면서 독일 육군의 규모가 대대적으로 증강됐다. 군수공장도 활발히 가동됨에 따라 수많은 무기들이 생산됐다. 독일의 움직임에 가장 큰 위협을 느낀 국가는 다름 아닌 프랑스였다. 이들은 소련,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카지노 가입 쿠폰. 4국(영국, 프랑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이 참여하는 집단 안보 체제도 구축했다. 나아가 베니토 무솔리니가 통치하는 이탈리아와도 손잡고 스트레사 체제를 수립했다. (무솔리니는 이 체제를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한 초석으로 삼으려 했다.) 프랑스는 독일을 사방에서 포위해 팽창 야욕을 억제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안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4국이 군사적 공조를 이루기 위해선 소련군이 독일과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 붉은 군대가 폴란드와 루마니아 영토를 통과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소련과 사이가 나빴던 폴란드가 소련군의 자국 영토 통과를 불허하면서 4국 집단 안보 체제가 큰 타격을 받았다. 영국의 자세도 애매했다. 당시 영국 수뇌부는 히틀러를 대화가 가능하고 외교적 유화책으로 다룰 수 있는 인물로 여겼다. 이에 프랑스처럼 독일을 군사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보단 어느 정도 달래면서 타협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1935년 6월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 영국 해군 주력함 총배수량의 35%를 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독일의 주력함 건조를 허용하기까지 했다. 이탈리아와의 관계도 틀어졌다. 영국, 프랑스가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점령 계획에 제동을 걸면서 이탈리아의 외교 노선이 독일 친화적으로 변했다. 히틀러는 우호적인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더욱 과감한 모습을 보였다. 1936년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에 대한 석유 제재 논의로 정신없는 사이, 독일군을 비무장 지대인 라인란트에 진주시켰다. 이곳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해 군대가 들어갈 수 없었지만, 히틀러는 대놓고 무시했다. 독일 국민들은 열광했으며 라인란트 재무장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표를 던졌다. 프랑스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예상보다 과감하게 나오는 독일에 당황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기실 프랑스 수뇌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마음 같아선 독일을 물리적으로 막고 싶었으나,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과감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히틀러의 독일은 이러한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프랑스와 손을 잡은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도독일의 기세에 짓눌려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카지노 가입 쿠폰. 파시즘을 추구하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카지노 가입 쿠폰. 결국 프랑스는 대독 강경책을 포기하고 라인란트 재무장을 인정했다. 히틀러는 프랑스와 영국이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과감한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 눈독을 들였다. 1938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수상인 슈슈니크를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보호국으로 두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요구했다. 슈슈니크는 난색을 표하며 국민투표를 통해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확립하려 했다. 화가 난 히틀러는 국민투표 중단을 요구하는 한편 군대를 동원해 오스트리아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오스트리아 각지에 있는 나치당원들도 일제히 들고일어나 정부를 압박했다. 겁을 먹은 슈슈니크는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후임 총리로 오스트리아 나치를 대표하는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지명됐다. 이는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진격 길을 열어줬다. 비록 독일군의 전개가 서투른 감이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혈입성에 성공했다. 히틀러는 미크라스 대통령을 강제 사임시키고 오스트리아 수도인 빈에서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양국이 하나가 되면서 게르만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대두했다. 다른 국가에 있는 독일계 사람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계 인구가 가장 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에서 극심했다. 히틀러는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즉각 체코슬로바키아 독일인들의 소요를 조장 지원했고 이 지역 점령을 위한 무력 불사까지 공언했다. 위기감을 느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국경 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프랑스와 소련의 지원도 요청했다.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에 의거해 유사시 참전할 의무가 있었다. 내부에서도 참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소련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요청에 호응할 준비가 돼 있었다. 별안간 유럽에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일단 프랑스 정부는 영국의 의사를 타진해 보기로 했다. 영국은 또다시 애매하게 나왔다. 조약 내용은 공감하면서도 실제 참전에 대해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영국 없이 호전적인 독일을 감당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프랑스는 난처해했다. 서구권에서 대처에 혼선이 빚어지는 사이, 히틀러는 독일군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명했다. 프랑스와 영국 정부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다급해진 영국 수상 체임벌린이 전면에 나섰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에 대단히 굴욕적인 처사를 보였다. 프랑스의 양해를 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압력을 가해, 주데텐란트 일부 지역을 독일에 할양하려 했다. 졸지에 자국 영토를 고스란히 내주게 될 체코슬로바키아는 격분했지만, 현실적으로 강대국의 입장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만 체임벌린은 해당 지역 할양이 점진적으로 이뤄질 것이며, 독일이 더 이상의 영토는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전쟁을 각오했던 그는 독일군이 주데텐란트 전 지역을 즉시 점령해야 하고, 체코슬로바키아와 갈등을 빚는 폴란드 및 헝가리의 영토 문제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뒤, (프랑스의 경우) 동원령을 선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총동원령에도 동의했다. 독일도 맞대응할 것을 천명하면서 유럽에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도래했다.미국의 루스벨트는 유럽 국가들이 평화 교섭을 포기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전쟁 열차가 본격적인 시동을 걸려는 찰나, 무솔리니가 중재안을 내놨다. 한 자리에 모여 유럽의 문제를 논의해 보자는 것이었다. 의외로 히틀러가 먼저 동의했고 영국과 프랑스도 함께 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독일에서 '뮌헨 회담'이 열렸다. 유럽의 4거두가 모인 이 회담 결과의 핵심은, 주데텐란트를 독일에게 완전히 양도한다는 것과 회담 참여국들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강대국들만의 합의였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300만 명에 달하는 인구와 수많은 산업시설 및 요새 등을 갖춘 핵심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 독일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도 노릴 수 있게 됐다. 무력하게 양보한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체임벌린은 회담 결과에 만족해카지노 가입 쿠폰. 작은 것을 내주는 대신 평화라는 큰 것을 얻었다고 자평카지노 가입 쿠폰. 회담을 마치고 영국에 돌아온 그는 히틀러의 친필 서명이 담긴 서약서를 흔들며 "명예로운 평화를 가지고 독일에서 돌아왔다.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임을 믿는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이를 크게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체임벌린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되는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는 회담 결과를 '불명예'라고 맹비난하며 다가올 전쟁 가능성을 경고카지노 가입 쿠폰.
과연 처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히틀러는 머지않아 마수를 또 드러냈다. 1939년 3월,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협박해 체코를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으로 편입시켰고, 슬로바키아는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이미 주데텐란트를 잃을 때부터 저항력을 상실한 체코슬로바키아는 무력하게 굴복했다. 독일의 이 같은 행위는 뮌헨 협정 파기임에도 히틀러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말로만 떠들고 특별한 행동은 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상대방이 갖고 있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한 '미치광이 전술' 또는 '벼랑 끝 전술'이 계속 통할 것으로 봤다. 실제로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영국 내부의 여론이 들끓었다. 이제 히틀러에 대한 일말의 신뢰도 사라졌으며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체임벌린도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가운데 히틀러는 한발 더 나아갔다. 이번에는 폴란드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를 노렸다. (독일 군부는 이미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폴란드 침공 계획인 '백색 작전'을 수립해 놨다.) 다급해진 폴란드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939년 4월과 5월에 서구 국가들과 폴란드 간의 군사방위상호원조협정이 체결됐다. 만약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적으로 강경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단 이것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였다. 히틀러는 서구권과 폴란드를 비웃으며 이들의 뒤통수를 강타할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바로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 체결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소련은 영국, 프랑스와 함께 집단 안보 체제에 헌신하려 했다. 그런데 서구권이 자신들을 하위 파트너 정도로 여기며 무시하자 돌아서기 시작했다. 독일은 이 틈을 파고들어 소련에게 접근했다. 양면 전선의 위험을 떨쳐내기 위해선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이 필수였다. 스탈린도 이를 강력히 원했던 만큼 무난하게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됐다. 해당 소식을 접한 영국과 프랑스는 경악했다. 독일과 소련은 근본적으로 양립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두 국가가 이념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었으나, 실용적 측면에선 양립이 가능하다는 점을 간과했던 셈이다. 서구권은 대응 방안을 찾느라 고심했지만 파국을 피할 수 없었다.
1939년 9월 1일, 약 160만 명에 달하는 독일군이 선전 포고 없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독일군은 폴란드 북부 해안일대에 대한 포격과 더불어 룬트슈테트의 남부 집단군으로 남부 전선 전역에 걸쳐 파상 공세를 감행했다. 기갑사단과 보병사단이 가열하게 진격했고, 하늘에서는 무시무시한 융커스 급강하 폭격기가 적극적 지원에 나섰다. 이를 상대하는 폴란드군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뚜렷한 열세를 나타냈다. 조만간 폴란드 제6보병사단과 제55보병사단 등이 무너지면서 남부 방어선이 붕괴됐다. 독일 북부 집단군도 총공세를 감행했다. 폴란드군은 북부 전선에서는 비교적 선방했다. 므와바 지역에서 약 3000명에 달하는 독일군을 소멸시켰고 72대의 탱크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럼에도 독일 공군의 무자비한 폭격에 휘말려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북서 지역의 투홀라 숲에서는 독일군의 압도적 기갑 전력이 빛을 발함에 따라 폴란드군이 철저히 궤멸됐다. 기실 독일-폴란드 전쟁을 초전부터 결정지은 것은 독일 공군의 맹활약이었다. 독일군 항공기들은 빠르게 폴란드군 후방으로 날아가 보급, 통신, 지휘 체계를 파괴했다. 폴란드군 항공기들이 날아올라 독일군 항공기들에 적잖은 피해를 줬지만, 질적 수적 열세에 직면해 제공권을 완전히 내주고 말았다. 이후에도 독일군은 진격과 승리를 거듭했다. 브주라 전투에서 독일군 탱크가 돌격해 오는 폴란드군 기병 부대를 대량 학살했다. 결정적으로 9월 8일에 폴란드 중서부의 공업도시인 우치를 함락시키면서 폴란드군 전체가 연쇄적으로 뒤로 밀리는 상황을 조성했다. 이를 통해 독일군은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까지 진격해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이 도시를 뚫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쪽 외곽에 약 12만 명의 폴란드군 병력이 배치됐고 강력한 모들린 요새도 있었다. 도시를 만만하게 봤던 독일군 제4기갑사단이 무작정 바르샤바로 진격하다가 격퇴당하기도 했다. 독일군은 지속적으로 바르샤바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에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무리하게 지상으로 공격할 게 아니라 말려 죽이기로 한 것이다. 틈날 때마다 융단폭격을 가함과 더불어 바르샤바로 향하는 외부 보급로를 끊어버렸다. 특히 폭격을 가할 때 민간인들도 정밀 타격했으며 소이탄 등으로 도시의 전소를 도모했다. 이러한 작전은 효과를 발휘해 바르샤바의 폴란드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쪽에서 약 61만 명의 소련군이 밀려오고 있었다. 독소 불가침 조약에 의거해 폴란드 동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소련군의 참전은 폴란드 패망의 결정타였다. 만약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폴란드군은 더 오랜 기간 독일군에 저항했을 것이다. 바르샤바를 내준다 해도, 아직 전투를 치를 만한 영토와 여력이 남아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군수물자 지원이 이뤄지고 있었고, 험준한 지형에 기반한 남동부 방어선에서 반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탄약 부족 등으로 공세 종말점에 다다르는 상태였다. 폴란드의 뜻대로 전쟁이 장기화됐다면, 독일군은 2차 세계대전 초반부터 계획에 큰 차질을 빚었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대규모 군사 개입을 단행해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꿨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이 모든 가능성은 소련군의 참전으로 물거품이 됐다. 9월 28일, 결국 폴란드는 독일에게 항복했다. 동부 지역은 소련군이 장악하면서 이 국가는 두 강대국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자마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히틀러는 이번에도 서구권이 온건하게 나올 것이란 예측이 빗나가자 당황했다. 독일군이 대거 폴란드 전쟁에 투입된 상황에서, 서구권 군대가 독일 쪽으로 진격해 온다면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실제로 프랑스군이 라인 강 둔치를 따라 다가오긴 했다. 방어해야 할 독일군의 전력은 매우 취약했다. 이 당시 히틀러는 "내 인생에서 가장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운 좋게도 프랑스군은 소극적으로 나왔다. 빠른 진격이나 포격 등을 일절 하지 않았다. 그저 독일을 비난하는 전단지만 뿌려댔고, 어느 순간에는 군대를 회군시켰다. 1차 세계대전의 악몽이 또다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선전포고는 했으나 막상 전면전을 수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에 적당히 무력시위를 하는 선에서 상황을 종결시키는 치명적 오판을 했다. 이때부터 프랑스의 재앙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이 폴란드를 굴복시킨 히틀러는 곧장 서구권을 겨냥한 군사 작전을 단행하길 희망했다. 프랑스가 군 전력을 완비하기 전에 선수를 치자는 생각이었다. 참모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독일군의 사정이 녹록지 않으며 겨울이라는 날씨 환경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서구권을 겨냥한 전쟁 준비를 착실히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히틀러는 참모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대신 프랑스 등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작전 계획을 입안하라고 명했다. 이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도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독일 침공을 대비해 나갔다. 이에 따라 서부 전선에서는 1940년 5월 초까지 교전이 발생하지 않는 '가짜 전쟁'이 지속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