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프랑스의 참패와 영국의 항전
■선회와 돌파
독일군 제1기갑사단에 소속된 제2전차연대는 대대를 2개 방면으로 투입했다. 한 대대는 불송으로, 다른 대대는 셰메리로 향했다. 전자가 콘나주와 불송을 연하는 선으로 들어왔을 때, 프랑스의 제213보병연대 및 제7전차대대와 마주쳤다. 당초 독일군에겐 전차가 부재해 매우 힘든 싸움이 예상됐다. 프랑스군이 공격을 본격화하려던 찰나에극적으로 전차들이 합류했다. 불송 인근에서 독일군과 프랑스군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여기서 독일군 전차대대 7중대의 활약이 빛났다. 이들은 전투에 유리한 지점을 선점했고, 불송 남쪽에서 등장한 프랑스군 전차 7대를 격파했다.열세에 직면한 프랑스군이 불송 바깥으로 퇴각하자, 독일군은 불송을점령한데 이어메종셸로 진격했다.이곳 주변에는 프랑스군 제205보병연대 및 제4전차대대가 있었다. 독일군은 신속한 공격으로 메종셸의 프랑스군도 격파했으며수많은 포로와 장비들을 노획했다. 아울러 셰메리를 향한 공세도 전개됐다. 처음에는 제1기갑사단의 제14대전차중대가 선두에서 활약했다. 파괴된 건물 잔해 등으로 이동이 다소 지체됐고, 콘나주에서 프랑스군의 공격도 받았다. 상당량의 전차와 기병부대가 돌진해 왔는데, 독일군은 대전차포와 기관총 등으로 적군을 힘겹게 물리쳤다. 제14대전차중대는 셰메리에서 공격을 받는 독일군 정찰대의 지원요청을 무시하고잠시동안 콘나주의 동쪽에 머물렀다. 이들 대신 후속하고 있던 독일군 제43강습공병대대가 선두에 서서 셰메리로 진격했다. 셰메리에서도 프랑스군은 거세게 저항했다. 독일군 공병대대는 마치 돌격대처럼 물러서지 않고 집요하게전진카지노 게임. 뒤에서는독일군 전차중대가 맹렬한 포격을 가해 프랑스군 전차들과 기관총을 대거 파괴했다. 이에 힘입어 셰메리에서의 프랑스군 저항은 일소될 수 있었다. (독일군 폭격기들이 셰메리의 아군에게 폭탄을 투하해 소수의 병사와기갑여단장 등이 전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독일 공군은 아군의 셰메리 점령을 모르고 있었다.) 힘겹게 뫼즈 강을 건넜던 제2기갑사단은 강을 따라서 서진했다. 탱크와 보병이 퐁 아 바르에 있는 아르덴 운하의 교량을 탈취한 뒤, 운하를 건너 남쪽으로 선회했다. 이후 뫼즈 강 남안과 아르덴 운하의 넓은 지역을 소탕해 나갔다. 이들은 5월 14일 저녁에프리즈, 부탄쿠르, 샤포뉴, 생 테냥을 연하는 선까지확보했다. 와들랭쿠르 인근에서 뫼즈 강을 도하했던 제10기갑사단은 누와예 남쪽 3km 지점에 있는 불송 동쪽 고지를 향해 나아갔다. 이 고지 인근에서 프랑스군과일대격전을 벌인 끝에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불송 남동쪽에 있는 320 고지를 탈취했고메종셸 남동쪽을 목표로 공세를 이어갔다.
이 즈음독일군 제19기갑군단지휘부는큰 고민에 휩싸였다. 진격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것이다. 서쪽으로 선회해 적진으로 깊숙이 침투할지, 아니면 남측면 방어에 신경 쓸지 여부가 화두로 떠올랐다. 전쟁 계획을 세울 때부터 골칫거리였던 측면 방어 문제가 다시 발목을 잡는 모습이었다. 제1기갑사단을 이끌던 구데리안은 서쪽으로의 즉시 선회가 최선의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적군의 종심으로 신속히 쳐들어가 전과를 확대해야 한다고외쳤다. 이에 대해우려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대규모 프랑스군이 남쪽에 나타나독일군의 뫼즈 강 교두보(스당 일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군단장인 클라이스트는 측면을 보호할 후속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서진을 미루자고 제안했다. 제19기갑군단 후방에 있던 제12군도 남측면 교두보 방어가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했다. 구데리안은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의 상관을몰아붙였다. 우유부단하며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구데리안은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설득과 비난을 반복했다. 결국 클라이스트는 구데리안의 손을들어줬다. 제1기갑사단과 제2기갑사단이 곧바로 방향을 바꿔 서진을 행했다. 목표는 셍글리와 르텔까지 빠르게 진격하는 것이었다. 단 측면 방어도 간과할 수 없는 만큼, 제10기갑사단과 대독일연대, 제1기갑사단 예하 제4기갑수색대대를 측면에 투입했다. 주변 상관 및 참모들이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치고 나가자고 한 구데리안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독일군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셍글리로 향하는 제1기갑사단은 방드레스 인근을 통과해야 했다. 사단은 2개 전투단으로 나눠 공세를 전개했다. 우선 네트비히 전투단(제1기갑여단)이 방드레스 및 후방 언덕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전차 및 전차부대의 화력에 휘말려 수많은 독일군 장교,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제1기갑사단은 네트비히 전투단에 추가 부대를 배속했다. 치열한 전투가 한동안 지속된 후에야 네트비히 전투단은 방드레스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 네트비히 전투단은 방드레스 남서쪽의 고지군을 돌파해 샤니로 나아갔지만, 프랑스군의 역습에 휘말려 오몽 남쪽으로 퇴각했다. 반면 크뤼거 전투단(제1보병여단)은 비교적 순조로운 행보를 보였다. 이들은 방드레스 북쪽에 있는 마자랭 숲을 지나 빠르게 전진했다. 조만간 전위부대가 셍글리를 점령한데 이어 동쪽 2km에 위치한 빌레 르 티열도 장악했다. 크뤼거 전투단의 진격으로 제1기갑사단의 선회가 성공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이제 르텔을 향해 나아가려 했다. 전방에 있는 라 호른 요새와 고지군들을 돌파하는 게 관건이었다. 5월 15일 크뤼거 전투단은 라 호른에서 프랑스군의 거센 반격을 받아 주춤했다. 이번에도 명장인 발크가 나서서 병사들을 적극 독려하며 나아갔다. 우회 기동을 통해프랑스군의 배후로 진입, 격파하면서 라 호른을 넘어섰다.다음으로 발롱과 부벨몽에 대한 공세를 전개했다. 발롱 인근에서는 소규모의 프랑스군을 가볍게 격파했으나 부벨몽에서는 적군의 저항과 체력 저하로 고전을 거듭했다. 포병과 중화기 부대를 대거 동원한 끝에 부벨몽을 탈취했다. 이로써 크뤼거 전투단 앞에 있던 고지군들이 돌파됐으며 르텔로 성큼 다가서게 됐다.
구데리안은 조금의 지체 없이 계속 진격하길 원했다. 어느 정도 진격하다가 반드시 정지하라는 제12군의 명령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레 클라이스트를 설득해 진격 허가를 받아냈다. 그런데 클라이스트가 24시간 동안만 진격하라고 했으나 구데리안은 그 이상을 나아갔다. 번번이 구데리안에게서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던 클라이스트는 이번에는 크게 화를 내며 질책했다. 자존심이 상한 구데리안이 돌연 지휘권을 반납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클라이스트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잠시동안 제19기갑군단에 혼란이 발생했다. 제12군 사령관인 리스트가 달려와 구데리안을 진정시키고 지휘권 박탈을 승인하지 않으면서 혼란은 가라앉았다. 한편, 측면 방어를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는 제10기갑사단은 스톤, 몽 디외, 용크를 확보하려 했다. 초반부터 정보 부족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 대독일연대가 한때 스톤 인근을 점령했지만 프랑스군의 역습을 받아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점령 사실만 알고 있던 제10기갑사단은 잘못된 병력 배치를 했다. 용크와 몽 디외 쪽에만 다수의 병력을 놔뒀다. 스톤 방면에 있던 대독일연대가 압박을 받자, 그제야 프랑스군이 스톤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독일연대를 지원하고 스톤을 확보하기 위해 제69보병연대와 포병대대를 급파했다. 이들은 프랑스군의 격렬한 포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집요하게 전진했다. 그 결과 스톤 인근 고지군을 가까스로 장악했다. 또 다른 목표지였던 용크와 몽 디외에서도 독일군은 간단치 않은 저항에 직면했다. 이곳들에서 프랑스군은 보병사단과 경기병사단, 전차 1개 중대 등으로 역습을 가했다. 제10기갑사단은 기갑여단과 보병대대 등을 증원해 적군에게 맞섰다. 양 진영 간에 난타전이 전개되다가 프랑스군이 물러나면서, 제10기갑사단은 용크와 몽 디외를 연하는 선을 장악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얼마 뒤 프랑스군은 스톤을 재탈환하기 위해 전차 수십대를 앞세워 공격해 왔다. 한때 독일군은 스톤 인근 고지군에서 격퇴당하고 아군의 실수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불운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적군의 역습을 견뎌냈고, 끝내 스톤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제10기갑사단은 제16보병사단에게 해당 지역을 인계한 뒤 제1,2기갑사단과 합세하기 위해 이동했다.
■프랑스군의 실책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주공이 어디인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벨기에 북부가 아니라 아르덴과 뫼즈 강 등을 거치는 공격이 진짜임을 눈치챈 것이다. 이에 병력을 파견해 주공을 겨냥한 역습을 단행해야 했다. 하지만 어이없는 실책이 잇따르면서 결정적 실패를 맛보게 된다. 프랑스군 제55보병사단장인 라퐁텐은 제10군단으로부터 2개 보병연대 및 2개 전차대대를 지원받아 셰에리, 불송, 아로쿠르를 연하는 선에서 방어 및 역습을 행해야 했다. 제10군단장인 그랑사르는 5월 13일 19시 라퐁텐에게 해당 부대의 지휘권을 이양한 뒤 역습을 가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라퐁텐은 23시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 통신 상황이 녹록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24시가 됐을 때, 라퐁텐은 역습과 관련한 문서화된 명령서식을 받아야 한다며 제10군단 지휘소를 향해 떠났다. 다음날 3시 라퐁텐이 군단장을 만나지도 못한 채 돌아왔다. 교통 체증이 심해서 군단 지휘소까지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전장으로 이동해 역습을 해도 모자랄 판에, 석연치 않은 행동으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라퐁텐은 3시 45분 카슈 중령을 통해 역습 명령 서식을 수령했고, 4시 15분에 역습 명령을 하달했다. 군단장이 역습을 명한 지 9시간이나 흐른 뒤였다. 실제로 프랑스군이 역습을 단행한 시간은 6시 45분이었다.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우유부단한 라퐁텐과 프랑스군이 지체하는 사이, 독일군은 주요 지점을 돌파하고 있었다. 만약 프랑스군이 적기에 역습을 했다면 서부 전역의 향방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뒤늦은 역습을 주도한 프랑스군 제213보병연대 및 제7전차대대가 불송과 콘나주 인근에 이르렀을 때, 독일군 탱크들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군은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거의 비슷한 시점에, 메종셸에서 역습을 시도한 프랑스군 제71보병사단 예하 제205보병연대도 참담한 실패를 경험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을 궤멸시키는데 기여할 공군력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독일군이 아르덴에서 교통 정체에 시달릴 때나 뫼즈 강을 도하하기 위해 스당에 밀집해 있을 때, 대규모 프랑스군 항공기가 날아가 맹폭을 가했다면 독일군은 재앙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군 지휘부는 일찍이 해당 지역이 주공격지라고 판단하지 못한데 더해 공군력 사용 자체를 극도로 꺼렸다. 독일군 항공 전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으며, 적군이 이를 통해 강력한 보복을 행할 수도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에 독일군 항공기들이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뫼즈 강 인근에 나타났을 때, 이를 저지할 만한 프랑스군 항공기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다가 프랑스군 항공기가 스당의 독일군을 공격한 적이 있지만, 그 효과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프랑스군 지휘부는 도하 지점에 가설된 교량에 대대적인 공중폭격을 가하라고 명했다. 폭격기 152대, 전투기 250대가 출격했다. (영국군 항공기까지 포함된 수치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이를 예측하고 만반의 대비 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주요 표적인 골리에 교량 인근에 200문이 넘는 대공포를 설치했다. 설상가상으로 연합군 항공기들은 집중화된 전력으로 공격을 하기는커녕 축차적으로 공격을 하는 우를 범했다. 결과는 막대한 피해로 돌아왔다. 출격한 항공기의 11% 이상이 순식간에 파괴됐다. 독일군과 교량은 연합군 항공기의 폭격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프랑스 공군 내에서 상충되는 명령이 나옴으로써 적잖은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당초 스당에 대한 항공지원 명령이 떨어졌는데, 어느 순간 메찌에르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라는 명령도 하달됐다. 병사들은 어떠한 명령을 따라야 할지를 두고 상당히 애를 먹었다.
역습의 핵심이었던 프랑스군 제21군단의 실책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제3흉갑기병사단, 5경기병사단, 3차량화보병사단 등 대병력을 거느렸다. 이 정도 규모라면 독일군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이 시기 독일군은 측면 방어보다 진격에 중점을 두고 있었던 만큼, 제21군단이 재빠르게 움직여 적군 측면에 치명타를 가한다면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제21군단은 라퐁텐의 제55보병사단처럼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그 사이에 독일군은 측면 방어의 핵심 지역인 스톤 일대를 장악했다. 원래 제21군단이 노렸던 스당 역습은 후순위로 밀렸고, 스톤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가 장시간 이어졌다. 사실상 프랑스군이 측면에서 독일군에게 막혀있는 동안,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독일군 주력 제1,2기갑사단은 신속하게 서쪽으로 돌진했다. 전황이 프랑스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제21군단장인 플라비니는 치명적인 결정을 하고 말았다. 프랑스군 제10군단의 역습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제21군단의 스당 역습 계획을 취소했다. 군단에 소속돼 있던 기갑부대는 해체돼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전선 소식을 접한 프랑스군 지휘부는 화들짝 놀랐고 스당에 대한 역습을 즉시 재개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전의가 이미 꺾여버린 군단을 추슬러서 역습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스톤 일대 전투는 독일군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 제6군에 소속된 53보병사단이 너무나 쉽게 철수한 것도 문제였다. 이들은 독일군이 샤포뉴와 동 르 메닐을 공격한 뒤 사단의 양측방에서 압력을 가할 때, 방스 강 서안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격전에 휘말리지도 않았고 충분히 버틸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철수함으로써 독일군의 진격로를 쉽게 개방해 버렸다. 불행히도 일부 대대가 철수하다가 독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무너지기도 했다. 실책과 더불어 프랑스군 가운데 명성이 가장 높았던 제14보병사단의 실패도 치명적이었다. 푸아 테롱, 부벨몽, 샤니를 연하는 선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던 이들은 샤니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붕괴됐다. 푸아 테롱에서는 독일군 제2기갑사단 탱크의 강습을 받아 격멸됐고, 부벨몽에서도 무지막지한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다. 페이술과 라 바퀼에서도 적군의 돌파를 고스란히 허용했다. 그만큼 르텔에 도달하기 위해 남서쪽으로 공세를 펼치는 독일군의 기세가 막강했던 것이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프랑스군 제2기갑사단이 어이없는 이유로 (우 지역에서 도하하는) 독일군의 측면에 대한 역습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사단의 임무와 목적지가 수시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벨기에로 진격하는 군대의 예비대였다가 어느 순간 제9군의 일부로서 디낭에 대해 역습을 가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다가 제6군에 배속돼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또한 도로가 아닌 철도로 병력을 수송하면서 시간을 낭비했다. 독일군의 지속적인 폭격으로 이의 지연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전차의 고장률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철도 수송을 고집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대서양으로의 질주
독일군의 신속한 기동과 프랑스군의 무능이 겹쳐지면서 서부 전역의 판세는 독일군 쪽으로 확연히 기우는 듯했다. 프랑스군은 새로 만든 제6군 등으로 어떻게든 방어선을 형성해 서쪽으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저지하려 했다. 독일군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재빠르게 돌파한 뒤 5월 16일 아르덴 운하의 서쪽 구릉지대까지 나아갔다. (독일군은 제19기갑군단, 제41기갑군단, 제15기갑군단이 합쳐져 막강한 상태였다. 프랑스군 방어선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프랑스군은 엔 강을 따라서 동서로 뻗은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독일군이 파리로 향할 것이라 예측했지만 이는 완전히 빗나갔다. 독일군은 파리가 아닌 대서양으로 향할 것이었다. 마치 낫 모양처럼 진격해 벨기에 북부에 있는 연합군의 배후를 공략할 터였다. 유일한 전략 예비대였던 제7군이 딜 방어선에 투입됐기 때문에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낼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샤를 드골이 이끄는 제4흉갑기병사단이 무모할 정도의 역습을 감행,독일군의 후위를 찌르며 선방했다. 잠시 주춤했던 독일군은 병력을 재정비하고 가용할 수 있는 대전차 전력을 총동원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공군 지원도 요청했다. 독일군은 육군과 공군의 유기적 협조를 기반으로 성공적으로 대처했다. 드골의 제4흉갑기병사단은 적절한 시간대에 용맹하게 싸웠으나 독일군의 기민한 대응과 공군 지원 부재 등으로 인해 무너졌다. 그런데 이 시기에 독일군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히틀러였다. 그는 전과 확대에 기뻐할 법도 했으나 되레 불안에 떨고 있었다. 여전히 측면 방어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더가 군대(A집단군)를 신속히 이동시켜 연합군을 포위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안감이 극에 달한 히틀러는 총참모부의 권한을 박탈한 뒤, 진격을 중지하고 남측면 일대의 방어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과도한 불안에 불과했다. 이미 이 시점부터 프랑스군과 지휘부는 패배주의에 휩싸여 무너져 내렸다. 실제로 프랑스 수상인 레이노는 처칠에게 "우리는 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가믈랭도 비슷한 반응을 나타냈다. 허를 찔려 심리적으로 붕괴된 마당에 효율적인 역습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신경 쇠약에 가까울 정도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히틀러의 노선을 무시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치고 나간 부대가 있었다. 롬멜의 제7기갑사단이었다. 신속한 기동 전술을 신봉하고 구데리안의 기갑교리까지 심도 있게 터득한 롬멜은 과감한 진격만이 승리의 열쇠라고 확신했다. 이에 제15기갑군단에서 공세 명령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제7기갑사단은 이미 아벤 방면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프랑스군 101요새사단의 방어선을 연이어 돌파한 데 이어 진격로 상에 있는 프랑스군 숙영지도 궤멸시켰다. 프랑스군 제1흉갑기병사단의 탱크들이 독일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5월 17일, 롬멜의 군대는 아벤을 무난하게 점령했다. 뒤이어 서쪽으로 더 진격해 상브르 강에 도달했다. 여기서 2개 대대가 강을 도하한 뒤 르카토 일대까지 진출했다. 그런데 제7기갑사단의 본대가 진격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쳐지는 일이 발생했다. 롬멜은 르카토에서 진격을 멈추고 사단 본대와 합류했다. 이처럼 롬멜 제7기갑사단의 맹활약은 프랑스군 방어선에 돌파구를 형성함은 물론 여타 독일군의 사기까지 북돋웠다. 고무된 할더는 다시 나서서 히틀러를 설득했다. 여전히 불안해하던 그에게 확실한 승기를 잡을 기회가 왔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마침내 히틀러는 5월 19일 대서양 연안으로의 진격을 허용했다. 할더는 "혈통 좋은 명마가 입에 물린 재갈이 풀려 결승선으로 질주하게 됐다"라고 기뻐했다. 제19기갑군단은 됭케르크로, 제15기갑군단은 아라스로 맹렬하게 질주했다. 이들이 벨기에 북부에 있는 연합군의 후방 지역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동안, 독일 B집단군은 연합군이 후방 대처를 못하도록 격렬한 공세를 펼쳤다. 연합군은 앞에서는 독일 B집단군을, 뒤에서는 독일 A집단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다만 연합군이 반전을 꾀할 만한 순간이 없지만은 않았다. 독일 A집단군이 대서양 연안으로 진격할 때, 속도 차이로 선두 부대와 후위 부대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발생했다. 이때 연합군(프랑스군)이 간격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면 독일군을 저지할 가능성이 있었다. 프랑스군은 이번 기회도 살리지 못했다. 당초 가믈랭은 작전명령 12호를 발령, 특수임무 부대에게 독일군의 간격을 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가믈랭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이 된 막심 베이강이 즉각적인 역습 계획을 취소해 버렸다. 베이강은 자신이 직접 전황을 살펴보고 판단하겠다면서 소중한 시간을 허망하게 낭비했다. 그 사이에 독일군은 간격을 좁혀 나갔고 선두 부대는 솜 강 하구에 있는 아브빌까지 다다랐다.
한편, 이 당시 영국군은 무능한 프랑스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전황 역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고 판단했다. 다급해진 영국 육군 총참모장 아이언사이드의 주도로 아라스 일대에 대한 역습 계획이 세워졌다. 역습에 동원될 군대의 규모는 영국군 2개 사단, 프랑스군 2개 사단 등으로 상당히 컸다. 계획대로 역습이 이뤄진다면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무위에 그쳤다.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역습 시점을 놓고 의견차가 발생했다. 영국군은 5월 21일에 역습하자고 제안했지만 프랑스군은 22일에나 역습 준비가 완료된다고 했다. 21일 역습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영국군이 단독으로 역습을 전개했다. 이들은 롬멜이 지휘하는 제7기갑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사단을 지원하는 무장친위대 토텐코프 사단을 격퇴하는 등 크게 선방했다. 승전을 거듭했던 독일군은 영국군의 일격에 상당한 충격을 받고 주춤했다. 그러나 프랑스군과 함께 하지 못한 영국군의 선방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제7기갑사단은 대공포를 동원해 반격을 가했고, 급강하 폭격기인 슈투카까지 날아와 영국군에게 맹폭을 퍼부었다. 전력의 열세를 절감한 영국군은 대서양 해안으로 퇴각했다. 이후 베이강 계획 등 프랑스군이 계획한 역습도 무위에 그치거나 시행하기도 전에 취소됐다. 5월 23일, 독일 A집단군은 북프랑스 일대에 있는 항구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연합군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항구인 됭케르크 일대에서 고립됐으며, 양면에서 압박해 오는 독일군에 의해 포위섬멸될 위기에 처했다. 서부 전역 초기, 예정된 지점에서 독일군을 막겠다며 호기롭게 나아갔던 연합군이 졸지에 전멸될 운명이었다. 바로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히틀러가 됭케르크로의 진격을 정지시킨 것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독일군이 곧바로 됭케르크로 밀고 들어갔다면, 해당 지역에 있던 30만 명 이상의 연합군은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 히틀러의 진격 정지 명령으로 독일군은 3일 8시간을 지체했다. 그 사이에 연합군은 방어 진지를 구축했고, 군용 및 민간 선박들을 총동원해 (영국으로의) 필사의 철수를 단행했다. '다이나모 작전'이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연합군 병력은 추후에 벌어질 전역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독일군으로서는 매우 뼈아픈 실책이었다. 히틀러는 왜 이러한 결정을 내렸을까. 극도의 불안감이 또다시 발현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는 영국군의 아라스 역습과 같은 일이 재현될 가능성을 심하게 경계했다. 부대 간 간격 조정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A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도 히틀러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동안 가열한 진격을 주장해 왔던 할더 등은 격하게 반발했다. 즉각 됭케르크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히틀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5월 26일에 가서야 정지 명령이 해제돼 독일군이 진격했으나 때늦은 감이 있었다. 연합군의 방어선이 공고했고 폭우로 인해 바닥도 진창이었다. 상술했듯 연합군 병력 대부분이 철수를 완료한 상태이기도 했다.
■파리 함락
됭케르크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 이제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를 향해 총공세를 펼칠 작정이었다. 연합군 주력이 북동부 전선에서 궤멸된 이상 순조로운 전개가 예상됐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패전을 예감하면서도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저항할 태세였다. 베이강은 프랑스 제7군과 제10군을 새로 만들었고 고슴도치형 진지가 있는 탄탄한 방어선인 '베이강선'을 형성하려 했다. 이는 영국해협 해안에서부터 솜강, 엔강의 선을 따라가다가 마지노선과 합쳐졌다. 진지는 수많은 군인들과 대전차 무기들로 채워질 계획이었다. 그런데 계획상으로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취약했다. 6월 5일, 독일군 기갑부대가 아미앵과 해안 사이에서 베이강선 우측을 공격하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물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 병사들은 싸울 의지가 충만했지만 전차와 대전차 무기가 부족했다. 항공 엄호조차도 받지 못했다. 독일군이 막강한 항공 전력으로 방어선에 집중화된 폭격을 가한 것과 달리, 프랑스군은 공군 전력을 가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베이강선의 다른 곳에서는 독일군이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수많은 병력이 전사하고 상당량의 기갑전력이 파괴됐다. 프랑스군의 부분적인 선방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이미 정해졌다. 독일군은 돌파구를 통해 들어가 베이강선 좌측에 있는 적군을 후방에서 공략했다. 결국 베이강선의 프랑스군은 궤멸됐고 독일군의 파리 진격에 가속도가 붙었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중심으로 저항을 지속할지 아니면 포기할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드골을 중심으로 결사 항전하자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갈수록 후자에 무게가 실렸다. 항전할 경우 아름다운 도시인 파리가 잿더미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6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무저항 도시로 선언했다. 쿠르트폰 브리젠이 지휘하는 독일군 제30사단이 가장 먼저 파리로 다가섰다. 이들은 파리 내부에서 격렬한 저항이 있을 것을 우려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본대 입성 전에 선두 부대가 파리 군정청 및 경찰청장 등을 만나 협조를 당부했다. 방송을 통해 "파리 시민들은 가급적 건물 밖으로 나오지 말라"라고 전했다. 6월 14일, 독일군 제30사단 본대 병력이 두 갈래로 파리 시내로 입성했다. 파리 에투알 개선문을 지나는 모습은 독일 승전 및 프랑스 패망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이를 지켜보는 파리 시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거나 눈물을 흘렸다. 유럽을 대표하는 국가이자 세계 최강의 육군 전력을 보유한 프랑스가 이렇게 빨리, 너무도 쉽게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이후 독일군은 파리의 주요 시설들을 차례로 점령했고 에펠탑에 나치를 상징하는 깃발도 게양했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드골은 처칠에게 영국-프랑스 연방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끝까지 싸우려 했던 것이다. 해당 제안을 수용한 처칠이 프랑스 정부에 연방 선언문을 내놨지만 레이노 수상과 장관들이 거부하면서 무산됐다. 프랑스가 영국의 자치령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 곧 죽어도 자존심은 남아있었던 셈이다. 드골은 좌절했으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항의 불길이 꺼져서는 안 된다"라고 호소했다.
수도는 함락됐지만 전역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독일군은 잔존 프랑스군을 소탕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독일 C집단군이 마지노선을 공략했고 구데리안이 이끄는 기갑집단은 프랑스 남부로 빠르게 진격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군은 손쉽게 무너졌고 약 5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에 잔류해 있던 영국군은 급히 본국으로 탈출했다. 이제 프랑스 항복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새롭게 수상이 된 필리프 페탱이 독일에게 정식으로 휴전을 제의했다. 6월 22일, 마침내 콩피에뉴에서 양국 간 정전 협정을 체결하기로 했다. 말이 정전 협정이지 실은 항복이나 다름없었다. 히틀러는 1차 대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연출을 준비했다. 그 당시 독일군 장군들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던 장소인 객실 열차를 콩피에뉴로 가져와 조인식을 하라고 명했다. 주변에 설치돼 있던 프랑스의 1차 대전 승전 기념물을 나치 깃발로 덮어버리기도 했다. 프랑스 대표단이 콩피에뉴의 객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히틀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옆에 있던 카이텔이 프랑스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고 맹비난했다. 이어서 정전협정 조건도 전달했다. 히틀러는 이 직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프랑스는 매우 불리한 조건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육군 병력은 10만 명으로 축소돼야 했다. 자국으로 도피해 온 반나치 독일인들을 송환하고 프랑스 북부 지역을 독일에 넘겨야 했다. 남부 지역에 비시 정부라는 독일 괴뢰 정부가 들어서는 것도 허용해야 했다. 6월 25일이 되자 전역은 완전히 종결됐다. 약 6주 만에 프랑스의 패전이 확정됐을 때, 전 세계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불가침 조약을 맺은 히틀러에게 축전을 보내면서도 군사 강국인 프랑스의 패전을 매우 의아해했다. 바다 건너 미국도 비슷한 반응을 나타냈다. 대세를 파악한 이탈리아는 본격적으로 독일 측에 붙었다. 충격은 곧바로 두려움으로 발전했다. 독일군은 패배를 모르는 무적의 군대로 여겨졌으며, 이들에게 대항할 군대는 감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전 세계가 독일군의 위세 앞에 숨을 죽였다. 히틀러는 한동안 자신의 군대가 거둔 눈부신 전과를 만끽했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와 에투알 개선문을 방문했고, 에펠탑 인근에 가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프랑스 점령이 의외로 쉽게 현실화된 만큼,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다음 전역으로 서서히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제 영국과의 대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