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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Feb 28. 2025

'제1차 세계대전'-제3의 전선, 고기 분쇄기

[4]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카지노 게임 추천베르됭 전투와 더불어 최악의 소모전으로 꼽히는 솜 전투. 이 전투에서 역사상 최초의 전차인 '마크 원'이 출현했다.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서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머물렀다.

제3의 전선

동부 전선에 공을 들인 독일군은 조만간 열매를 보게 될 터였다. 이들은오스트리아군과 연합해 고를리체-타르누프 지역에 병력과 대포를 집결시켰다. 공격 준비는 철저했다. 적군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은밀히 이동했고, 2000문이 넘는 포와 수많은 탄약이 마련됐다. 동맹군 측은 과거에 비해 취약해진 러시아군의 전력에 주목했다. 1915년의 러시아군은 여전히 병력 규모는 컸지만 군수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러시아 군수공장의 생산량이 떨어져, 러시아군의 개인화기 및 포탄 부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맹점으로 말미암아 동부 전선의 무게추가 동맹군에게 급격히 쏠리게 된다. 공격에 앞서 독일군 내부에선 방향성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정면 돌파가 아니라 카르파티아, 발트 전선을 통해 포위 기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군이 다른 곳에 있는 군대와 교류하지 못하게 고립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반면 동프로이센 전투에서 맹활약을 한 마켄젠은, 러시아군이 증원군을 동원하기 전에 정면으로 '신속하고 깊숙이 침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잠시간의 논쟁 끝에, 엄청난 성공으로 이어지는 마켄젠의 주장이 채택됐다. 1915년 5월 초에 동맹군의 기습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러시아군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맞서 싸울 수단인 화기와 탄약의 부족은 공포감마저 유발했다. 일순간 전의가 흐트러진 러시아군 병사들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는 현상이 발생했다. 호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동맹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러시아군 전선 곳곳이 도미노처럼 붕괴됐다. 6월에 렘베르크가 함락된 데 이어 8월에는 바르샤바까지 무너졌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코브노, 노보게오르기옙스크, 빌나, 핀스크 등 러시아 국경 지대에 있는 주요 요새 및 도시들도 동맹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죽거나 다쳤으며, 75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패배의 여파로 수많은 러시아군 장군들이 해임되거나 투옥됐다. 보다 못한 니콜라이 2세가 스스로 최고사령관에 올라 전쟁을 직접 지휘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 기후가 동맹군의 진격을 멈춰 서게 만들었다. 가을철에 흑토대의 토양이 진흙탕으로 변하는 현상인 '라스푸티차'가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자국의 영토까지 침략당하지는 않았다. 또한 (적군의 진격으로) 전선 범위가 축소되면서 중앙부와 발트해에 병력을 집중시켜 방어할 수 있었다. 군수공장에서의 생산량도 증가해 군수물자가 충당됐으며, 가용할 수 있는 예비군도 많아졌다. 러시아군은 건재한 상태를 유지했다. 더 이상 나아가진 못했지만, 독일군은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동부 전선에서 여유를 갖게 된 이들은 1916년 서부 전선에서 공세로 전환하게 된다. 자국 영토를 대거 빼앗길 수 있었던오스트리아도 위기에서 벗어났다. 한편,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전쟁이 발발했다. 독일 식민지에서의 전쟁이 대표적이다. 주로 연합군 및 이들과 친선 관계에 있는 세력이 독일이 장악한 해외 영토들을 빼앗으려 하면서 촉발됐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은 독일의 영향력 하에 있는 중국 칭다오와 태평양 중부 섬들을 공격했다. 칭다오에 있던 독일군은 맹렬히 저항하며 일본군 1455명을 소멸시켰다. 일본군은 11인치 곡사포 등을 동원해 가까스로 칭다오를 함락시켰다. 독일령 뉴기니와 토고도 연합군 측에게 공격을 받고 장악됐다. 카메룬은 칭다오처럼 공략이 쉽지 않았다. 연합군이 나이지리아를 넘어 침투했으나 거센 저항에 휘말렸다. 폭우도 쏟아져 진격이 크게 지체됐다. 다행히 증원군 도착과 순양함 지원, 건기가 나타나면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고 수도인 두알라 등을 점령했다. 이후 연합군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를 장악한 데 이어 동아프리카(탄자니아)도 공격했다. 여기서는 1918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투가 지속됐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독일군의 폰 레토프 대령이 교묘한 게릴라전을 펼치며 연합군을 장기전의 늪으로 빠뜨렸다.


'제3의 전선'이 열리기도 했다. 캅카스 전선이었다. 이는 독일 편에 선 오스만 제국(튀르키예)이 러시아를 공격하면서 형성됐다. 오스만 제국은 캅카스가 러시아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중심지라고 생각했다. 총사령관인 엔베르는 공격 시 해당 지역에 있는 반 러시아 세력 및 이슬람교도들이 도움을 줄 것이라 믿었다. 병력도 러시아군보다 많은 상태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어처구니없는 패배였다.무엇보다 혹독한 추위를 간과한 게 치명적이었다. 눈도 높이 쌓여서 진격이 지지부진해졌다. 최악의 여건 속에서 러시아군의 역공이 가해졌다. 오스만 제국군은 속절없이 밀리며 7만 명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화가 난 오스만 제국 정부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기독교도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편에서 전투에 참가했다고 주장하며, 자국 내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을 겨냥한 대규모 종족학살을 자행했다. 1915년 6월부터 1917년 말까지, 무려 70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캅카스 전투와 관련한 영국, 프랑스군의 움직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스만 제국의 캅카스 공격 직후, 영국 프랑스군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이동했다. 발칸의 강자인 오스만 제국 참전에 놀란 러시아가 서구 연합군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연합군은 위기에 처한 동맹국을 도와주기 위해, 오스만 제국 인근에서 육해상 합동 공세를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서부 전선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작전은 윈스턴 처칠이 주도했다. 그는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오스만 제국군의 요새들에 해상 포격을 가한 뒤, 지상군을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시키려 했다. 해상 포격에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오래된 군함들이 동원될 터였다. 모험의 성격이 짙었지만, 작전이 잘 풀린다면 이스탄불까지 진격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봤다. 이 작전 계획은 연합군에 우호적인 정치적 효과를 발생시켰다. 그동안 모호한 입장을 취했던 이탈리아가 연합군 측으로 참전할 가능성이 높아졌고, 불가리아는 독일과의 협상을 중단했다. 그리스도 연합군에 병력을 지원하며 참전했다. 대다수 국가들이 연합군의 작전 성공을예상했고, 이로 인해 남부유럽 전선을 포함한 서부 전선 전체에서 연합군이 유리해질 것이라 판단했다.


본격적인 공세는 1915년 3월 초부터 개시됐다. 일각에서 제기된 낙관적 전망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오스만 제국군의 대처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포들을 빠르게 이동시키며 적군의 해상 포격을 피해나갔고, 안정적인 지점에서 맹렬한 반격까지 가했다. 더욱이 바다에 기뢰가 촘촘히 부설돼 있어서 군함이 해안가에 다가가는 게 매우 어려웠다. 소해정이 기뢰를 제거하려 하면, 여지없이 오스만 제국군의 포탄이 날아와 방해했다. 첫 공격이 실패한 뒤, 연합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16척의 군함을 동원해 재차 공세에 나섰다. 이번에는 작전이 순조롭게 전개될 것처럼 보였다. 적군의 포격을 회피하며 상당한 거리를 전진했고 해상 포격이 뚜렷한 효과를 발휘했다. 오스만 제국군의 방어력이 점차 약화돼 갔다. 소해정이 많아서 기뢰 제거도 빠르게 이뤄질 것 같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불행이 발생했다. 프랑스 군함인 부베 호가 내부 폭발을 일으켰다. 머지않아 그 안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과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뒤이어 오션 호도 내부 폭발을 일으켰다. 군함들이 낙후됐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연합군 전체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졌다. 이를 틈타 오스만 제국군은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쉬프랑 호, 골루아 호, 샤를마뉴 호 등 수많은 군함들이 포격에 노출돼 큰 손실을 입었다. 날씨마저 어두워지자 연합군 함대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담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약 1개월가량 고민한 끝에, 상륙을 용이하게 할 만한 장소로 헬레스 곶을 선정했다. 4월 25일, 맹렬한 포격과 함께 연합군 군함들이 헬레스 곶의 다양한 지점들로 빠르게 접근했다. 상륙 지점들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지중해의 Y해변, X해변, 다르다넬스 해협 안쪽의 S해변에서는 적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무사히 상륙했다. 다만 아래쪽 해안의 W해변, V해변에서는 참극이 벌어졌다. 연합군 병사들이 단정에서 내려 해안가에 닿았을 때, 참호 안에 있던 오스만 제국군이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이내 바닷물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연합 군단(앤잭)은 당초 계획했던 해변에서 북쪽으로 1마일 떨어진 지점에 상륙했다. 이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정면의 능선을 올랐다.


결과적으로 연합군 전체가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합군이 내륙에 있는 핵심 도시인 크리티아를 점령하려 했으나 오스만 제국군이 증원군까지 동원해 막아섰다. 연합군도 증원군을 동원했지만 유의미한 전진을 이뤄내지 못했다. 앤잭도 험준한 지형 및 적군의 반격에 휘말려 1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멈춰 섰다. 오스만 제국군은 신속히 참호도 팠다. 진격이 더욱 어려워지게 됐음을 직감한 연합군도 참호를 팠다. 서부 전선과 같이, 한동안 참호전의 양상이 나타났다. 희생은 날로 증가하지만 특별한 전과가 발생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됐다. 연합군 내에서는 전쟁 회의론과 철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설상가상으로 해당 지역에 폭풍우가 찾아오면서 참호에 있는 병사들은 더욱 힘들어졌다. 결국 연합군은 1915년 12월 28일부터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오스만 제국군이 미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이뤄졌다. 지금껏 전투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약 3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연합군 사상자도 26만 5000명에 달했다. 소득 없이 값비싼 대가만 치른 갈리폴리 전투는, 추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위업을 달성할 처칠의 흑역사로 기록됐다. 한때 기대됐던 정치적 효과도 일부 사그라졌다. 특히 불가리아는 독일과의 협상을 재개한 뒤 동맹군으로 참전했다. 제2차 발칸전쟁의 여파로 그리스와 세르비아에게 빼앗겼던 마케도니아 영토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작용했다. 불가리아는 독일군,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세르비아 공략에 나섰다. 세르비아를 도와주려던 연합군을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그 사이에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북쪽에서 밀고 내려와 세르비아를 압박했다. 중과부적에 직면한 세르비아군은 수많은 피난민들을 이끌고 다른 나라로 탈출했다. 탈출 과정은 매우 혹독해 15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동맹군은 세르비아의 영토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탈출한 세르비아군은 그리스나 프랑스로 가서 항전을 지속했다. 이탈리아의 경우는 불가리아와 달랐다. 3국 동맹을 배신하고 연합군 측에서 참전했다. 이탈리아군은 이손초 강과 산악지대의 장벽을 넘어 오스트리아의 심장부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뜻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이손초 강 너머는 이동하기 힘든 지형이었고, 카르파티아 산맥보다 더 험준한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군은 이손초 강 일대에서 12차례나 전투를 치르며 돌파를 시도했다. 결과는 비참했다. 많은 사상자만 내고 유의미한 영토는 전혀 확보하지 못했다. 유럽의 강국으로 인식됐던 이탈리아는 동맹군에게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하는 그저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루마니아도 연합군으로 참전했지만 재앙만을 초래했다. 동맹군에게 삼면에서 포위 공격을 당해 31만 명의 사상자와자국영토 대부분을 빼앗겼다. 독일군은 루마니아 점령을 통해 100만 톤의 석유와 200만 톤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고기 분쇄기

1916년에 접어들자 독일군 지휘부에선 서부 전선 대공세 의견이 대두했다. 팔켄하인은 그동안 프랑스군이 열심히 싸웠지만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분석했다. 1915년에 입었던 극심한 피해의 여파가 프랑스군에게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봤다. 이제 핵심 지점에 공세를 가해 프랑스군 주력을 격파한다면, 전황을 매우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 강력한 영국군이 프랑스에서 손을 떼게 만드는 효과도 노려볼 만했다. 그 핵심 지점은 '베르됭' 일대였다. 이곳은 프랑스군이 자랑하는 강력한 요새로 여겨졌다. 공세가 펼쳐지면 프랑스군 병력이 대거 몰려올 것이고, 함락된다면 프랑스군의 전력과 사기가 크게 꺾일 수 있었다. 독일군은 '심판 작전'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대규모 병력과 수천문의 중포, 수백만 발의 포탄을 비축했다. 공세가 개시되면 프랑스군 방어선 전체에 엄청난 포격을 퍼부을 것이었다. 독일군은 초반 포격전으로 기선을 제압할 계획이었다. 1916년 2월 21일 오전, 계획대로 포격이 시작됐다. 포탄이 18마일에 이르는 프랑스군 방어선에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포격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이날 하루에만 총 8만 발의 포탄이 쏟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포격 이후에는 보병이 돌진할 차례였다. 이들은 양 측면에서 맹렬히 돌진했다. 외곽 참호선에 있던 프랑스군은 적군의 기세에 눌렸다. 참호선이 조금씩 무너져갔다. 프랑스군이 퇴각하면서 외곽 참호선이 완전히 돌파됐다. 독일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두오몽 요새까지 공격했다. 이 요새는 철조망과 높은 담벼락, 해자들이 즐비한 최강의 요새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독일군이 함락시킬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의외로 쉽게 함락됐다. 펠릭스 쿤체 중사가 지휘하는 독일군 공병 1개 분대가 우연히 방어가 취약한 곳을 통해 요새 내부로 들어갔다. 요새를 지키고 있던 프랑스군 수비대는 일순간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적군의 대규모 병력이 진입한 것으로 오판했기 때문이다. (수비대는 요새 바깥에 있던 부대와 통신 연계가 돼있지 않았던 만큼, 독일군의 병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수비대가 허겁지겁 퇴각함에 따라 독일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두오몽 요새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제 베르됭 일대가 위기에 처할 판이었다.


프랑스군은다소 흔들렸지만,뛰어난지휘관들이 기강을 다잡았다. 드 카스텔노와 필리프 페탱은 베르됭 일대에 와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이곳을 반드시 사수할 것을 명했다. 그런 다음 병력과 군수 물자를 매우 신속하게 보충해 나갔다. 수송 과정에서 약 1만 2000대의 트럭이 동원됐다. 효과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도록 포대도 정비했다.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포대를 전선 가까이에 배치하려 했다. 이에 말들을 대거 동원해 포들을 이동시켰다. 그런데 물기가 많아 축축한 땅을 건너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결과 말들에 대한 혹사가 이뤄지면서 수천 마리의 말들이 죽었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군은 뫼즈 강 동쪽 강둑의 협소한 지점에 포격을 퍼부었다. 프랑스군 방어선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독일군은 뫼즈 강 서쪽 강둑까지 공격하기로 했다. 여기에 숨어있는 프랑스군 포대를 파괴한 뒤, 베르됭 요새를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을 점령하려 했다. 서쪽 강둑으로 향하는 길은 개활지여서 (동쪽 강둑에 비해) 독일군의 진격이 비교적 수월했다. 진격 과정에서 프랑스군 제67예비군 사단을 격파했다. 하지만 전의가 드높았던 프랑스군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해당 지역에 있는 모르 옴과 304고지에서 격렬한 사격을 가해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비슷한 시점에 독일군이 뫼즈 강 동쪽 강둑에서 보 요새 방면으로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4월 초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나흘간 전선 전체에서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펼쳐졌다. 이번에도 여의치 않았다. 동부 전선의 라스푸티차에 버금가는 폭우로 인해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다. 공세가 잇따라 좌절되자 독일군 지휘부 내에선 작전의 지속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일각에서 작전 중단 의견이 나왔지만 최종적으로 작전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전황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독일군은 5월에 모르 옴 고지를 공격해 정상을 차지했으나, 프랑스군이 인근 산비탈에서 버티면서 저항했다. 이에 독일군의 공세 효과는반감됐다.


프랑스군이 역공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페탱의 뒤를 이어 니벨이 베르됭 방어군 사령관이 된 후 두오몽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움직였다. 독일군 병사의 부주의로 요새 안에서 탄약고가 폭발하자 프랑스군의 사기는 높아졌다. 샤를 망젱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제5사단이 중심이 돼 요새에 대한 집중 포격을가했다. 요새 안의 독일군은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포격에 이어 보병이 요새의 서쪽과 남쪽으로 몰려들었다. 프랑스군은 한때 요새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증원군이 부재한 상황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까지 단행돼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6월이 되자, 독일군은다시 공세에 나서려 했다. 목표는 보 요새였다. 포 600문을 갖춘 독일군은 6일 간 요새를 겨냥해 맹렬한 공세를퍼부었다. 이에 맞서 프랑스군도 격렬히 저항했다. 가까스로 독일군이 보 요새를 점령했으나 병력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팔켄하인은 막대한 희생과 솜 전투, 동부 전선 상황을 감안해 추가공세를 망설였다. 그러나 측근인 크노벨스도르프의 설득으로 보 요새 주변 지역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다. 티오몽 진지는 점령했지만 수빌 요새가 문제였다. 독일군은 이틀간 포격을 가한 뒤 요새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프랑스군은 기다렸다는 듯 무차별 기관총 사격으로 응수했다. 또다시 희생이 불어나자 팔켄하인은 공격을 중단시켰다. 어느덧베르됭 일대의 독일군은공세 종말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공격을 전개하기보단 취득한 지역을 사수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힌덴부르크가 새로운 참모총장으로 부임하면서 이 같은 기조는 더욱 강화됐다. 명확한 공수 교대가 이뤄졌다. 프랑스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대규모 반격을 감행했다. 기진맥진해 있는 독일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에 두오몽 요새 등이 프랑스군에게 다시 넘어갔다. 결국 전선은 전투가 개시됐을 때로 되돌아갔다.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가량 지속된 베르됭 전투는 '고기 분쇄기'로 불리며 대량 살육전으로 기록됐다. 양 진영에서 각각 2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막대한 희생만 치르고 어느 것 하나 얻은 것은없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약 200만 발의 포탄이 쏟아져 전투 지역의 지형도가 크게 변하기도 했다.


베르됭과 더불어 '솜 강' 일대에서도 전쟁의 참혹함이 발현됐다. 이 전투를 주도한 인물은 새로이 영국군 사령관이 된 더글러스 헤이그였다. 무모했던 그는 세르와 몽토방 일대의 독일군 참호선을 반드시 허물어버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솜 강 고지대 먼 쪽에 있는 바폼까지 진격하려 했다. 영국군 제4군이 선봉에 서고, 그 좌우에 영국군 제3군과 프랑스군 제6군이 존재할 것이었다. 베르됭에서 독일군이 그랬던 것처럼, 영국군도 무지막지한 포격을 먼저 퍼붓기로 했다. 1916년 6월 24일부터 8일 간, 약 300만 발의 포탄이 적진에 쏟아졌다. 중포에서 발사된 포탄은 적 포대와 참호를, 야포의 포탄은 참호 앞의 철조망을 겨냥했다. 영국군 지휘부는 독일군의 참호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상은 전혀 달랐다. 독일군 참호는 포격을 꿋꿋이 견뎌낼 정도로 탄탄하고 깊었다. 철조망 등의 걸림돌로 인해 불발탄이 된 포탄도 적지 않았다. 독일군 병사들은 포격 개시 직전에 무기를 갖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이 모든 요인들이 영국군의 포격 효과를 반감시켰다. 영국군 지휘부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보병을 진격시켰다. 7월 1일, 무거운 군장을 둘러멘 병사들이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고 돌진했다. 대피호에 숨어있던 독일군은 적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접한 뒤, 서둘러 기관총을 설치하고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영국군은 대다수가 기초훈련만 받은 병사들로 구성돼 있어, 적절한 회피를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쓰러져 나갔다. (영국군은 포격에 따른 이동탄막의 형성이 독일군의 시야를 가려 진격에 도움을 줄 것이라 예상했다. 이마저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전장은 대규모 살육장으로 변했다. 하루에만 5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국군은 진격을 멈췄다. 희생이 막대했던 만큼, 영국군 지휘부는 다른 전술을 고민할 법도 했다. 그런데 헤이그는 독일군도 큰 피해를 입었고, 예비부대가 거의 없다라며 재차 공세를 명했다. 독일군은 이미 여러 개의 예비부대를 끌어와 방어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다시 영국군의 무리한 정면돌파가 행해진 가운데, 첫 돌격 때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희생이 동반됐다. 사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럼에도 약간의 전과를 올리기는 했다. 솜 강 양안에 있는 구역들을 확보했고, 콩탈메종 등 독일군 제2방어선에 도달했다. 그러자 독일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베르됭에 있던 병력 일부를 솜 강으로 이동시켰으며, 포격에 의해 깊게 파인 구덩이를 중심으로 한 '종심 방어'를 채택했다.


강대강 대치로 인해 솜 강 전투는 소모전으로 변모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9월에 모르발, 플레르, 장시, 기유몽 등을 겨냥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으나 막대한 희생만 치렀다. 확보한 영토는 거의 없었다. 물론 독일군도 방어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철통 같은 적진을 뚫기 위한 몸부림으로써, 사상 최초의 전차인 '마크 원'이 출현했다. 기관총 및 대포로 무장한 36대의 전차들은 초반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다. "괴물"이라는 외침이 절로 나오게 할 만큼 독일군을 크게 당황시켰으며, 연합군 보병의 진격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플레르, 쿠르슬레트 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차의 효용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군은 재빨리전차에 적응했고, 적절한 포격전을 펼치며 이를 무력화시켰다.전차가 고장 나서멈춰 서는 경우도 많았다. 뚜렷한돌파구 없이 전선은 다시금 교착 상태로빠져들었다. 악명 높은 솜 강 전투는 11월 18일까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연합군은 티에프발, 르 사르 요새 등을 점령했지만, 매우 조그마한 성취에 불과했다. 당초 목표(바폼)의 절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전투를 종료해야 했다. 양 진영의 사상자 규모는 베르됭 전투를 능가했다. 영국군은 42만 명, 프랑스군은 20만 명, 독일군은 6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결과적으로 베르됭과 솜에서 펼쳐진 대량 살육전은 서부 전선을 바꾸지 못했다. 악몽과 같은 전황은 지속될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동부 전선에서도 눈에 띄는 전투가 벌어졌다. 1916년 6월 4일,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지휘하는 러시아군 제8군이 오스트리아군과 맞닿아 있는 전선에 정밀 포격을 가했다.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고, 베르됭에서 난관에 처한 연합군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갑작스러운 공세에 오스트리아군은 극도로 당황했다. 곧이어 러시아군 보병이 빠르게 치고 나가며 적군을 압도했다. 특히 드네스트르 강과 카르파티아 산맥 사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크게 격파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오스트리아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면서 수만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프리피야트 습지 북쪽에 있는 러시아군 제9군도 공세를 감행해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브루실로프 러시아군의 승승장구는 계속돼 체르노비치, 부코비나 등을 잇따라 함락시켰다. 다급해진 오스트리아군은 독일군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일부 병력을 빼내 동부 전선으로 급파했다.


7월 말에 러시아군은 철도 요충지인 코벨도 노렸다. 이곳을 점령하면, 후방에 있는 대규모 병력을 신속히 전선으로투입할 수 있었다. 병력이 적군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손쉬운 승리가 예상됐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독일군 및 오스트리아군은 방어에 용이한 장소를 선점한 뒤, 러시아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해 나갔다. 게다가 항공기까지 동원해 적군의 포격과 보병 돌격을 무력화시켰다. 초반에 60마일이 넘는 거리를 진격하며 맹위를 떨쳤던 브루실로프 공세는 코벨에서 확연히 꺾였다. 다른 지역에 있던 러시아군도 렘베르크 탈환전에서 실패를 맛봤다. 향후 러시아군이 탈환한 영토를 사수하고 추가 공세를 이어가기 위해선, 증원군의 신속한 도착이 필수였다. 하지만 열악한 철도망으로 인해 이것이 불가능했다. 적군의 한계를 눈치챈 독일군은 러시아군의 돌출부를 강하게 조여오기 시작했다. 브루실로프는 전투를 지속했다간 막대한 희생만이 뒤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지휘부를 설득해 후퇴를 단행했다. 3개월 이상 전개된 브루실로프 공세는 사실상 러시아군의 마지막 노력으로 기록됐다.조만간 내부에서 발생할 거대한 폭풍이 러시아의 심대한 변화를 초래할 것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독일군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최소 6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수많은 무기들을 노획당했다. 오스트리아군의 군사 지휘권도 독일군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은 육상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해상에서도 전투가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 간의 유틀란트 해전이 있었다. 이는 드레드노트급 전함 44척이 동원된 대해전으로 평가된다. 독일군은 영국의 해상 봉쇄를 뚫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선방했다. 다만 영국군이 워낙 막강해 목표한 바를 달성하지 못했다. 독일군은 해상 전력의 근본적 한계를 절감한 뒤 드레드노트 함대전을 포기했다. 대신 유보트를 기반으로 한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열을 올리게 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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