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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Feb 20. 2025

'제1차 세계대전'-동부 전선 혈투, 악몽의 참호전

[3]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온라인 카지노 게임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타넨베르크 전투.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 제2군을 박살 냈다.

■동부 전선 혈투

러시아군 지휘부는 독일군의 동부 전선 전력이 취약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오스트리아를 묶어두고 대규모 병력으로 독일의 동프로이센을 공격한 뒤 베를린을 위협할 수 있다고 봤다. 실제로 독일군이 초전에 동부 전선에 배치한 병력 규모는 크지 않았다. 독일군 제8군만이 프로이센에 주둔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서부 전선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군은 훈련 상태는 미비했지만 대규모 병력을 갖췄다. 러시아군이 빠르게 집중적으로 밀고 들어갔으면 독일군은 매우 어려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러시아군에게는 몇 가지 맹점들이 존재했다. 렌넨캄프의 제1군과 삼소노프의 제2군이 서로 협조하면서 진격했어야 했는데, 이들은 8월 중순에 사흘의 시차를 두고 따로 출발했다. 지리적 요인도 발목을 잡았다. 진격로 상에 있는 물의 장벽(앙게라프 강)이 진격을 지지부진하게 만들었다. 두 군대 사이에는 50마일에 달하는 호수 지대도 존재했다. 또한 두 군대 모두 별로 위험하지 않은 측면에 신경 쓰느라 전력을 분산하는 우를 범했다. 독일군은 우수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러시아군이 분리된 채 진격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감이 붙은 제8군 대부분이 러시아군 제1군 쪽으로 전개했다. 제8군에 소속된 제1군단이 야간을 틈타 러시아군에 선제공격까지 가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참호와 건물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응전했다. 의외로 포병까지 맹활약을 펼치면서 독일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독일군 제1군단은 사상자가 많아지자 전투를 멈췄다. 가까운 곳에 있던 독일군 제17군단도 러시아군의 측면을 공격하려다 실패했다. 여기서도 러시아군이 참호를 적절히 활용하며 적군에게 맹반격을 가했다. 독일군은 아군끼리의 오인 포격까지 겹치면서 지리멸렬해졌다.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공격을 물리친 데 이어 동프로이센을 공략할 수 있는 전략 거점인 굼비넨까지 점령했다. 독일군 제8군의 상황이 극도로 위태로워졌다. 사령관인 프리트비츠는 동프로이센을 포기하고 비스와 강 너머로 퇴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군의 전쟁 계획이 완전히 꼬이는 듯했다. 슐리펜 계획에 따르면 동부 전선의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승전보를 울리기 전까지 버텨줘야 했다. 벌써부터 퇴각 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다급해진 독일군 지휘부는 구원투수를 출전시켰다. 벨기에 전선에서 탁월한 전과를 올렸던 루덴도르프를 동부 전선으로 급파했다. 프리트비츠를 해임하고 퇴역 장군인 힌덴부르크를 임명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군사적 협력 관계를 선보일 터였다. 새로운 독일군 지휘관들이 온 이후, 전황은 극적 반전으로 치달았다. 독일군은 러시아군 무선 통신에서 중요한 정보를 취득했다. 러시아군 제1군이 얼마간 진격하지 않고 멈추리라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이를 틈타 상대적으로 취약한 러시아군 제2군을 쳐부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군 제1군을 상대했던 독일군 제1군단과 제17군단이 러시아군 제2군 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적군의 북쪽을, 독일군 제1예비군단과 제3예비군단은 남쪽을 틀어막는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해 나갔다. 독일군 제20군단이 정면에서 러시아군 제2군을 저지하는 사이, 양 측면에 있던 독일군이 포위 섬멸을 단행할 것이었다. 작전은 은밀하게 진행됐기에 삼소노프의 러시아군은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비스와 강을 향해 진격하던 러시아군은 이 포위망에 고스란히 걸려들었다. 독일군은 사냥감을 만난 호랑이처럼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었다. 삼소노프는 러시아군 제1군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타넨베르크 전투'로 명명된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 제2군은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10만 명이 넘는 사상자와 9만 명이 넘는 포로가 발생했다. 패장인 삼소노프는 상황을 비관해 자살했다. 독일군은 여세를 몰아 러시아군 제1군까지 궤멸시키려 했다. 힌덴부르크의 주도로 마주리안 호수에서 포위 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독일군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부분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필사의 퇴각 전투를 벌이며 자국 영토로 되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독일군의 극적 회생과 기대 이상의 승전이 빛을 발했다. 동부 전선에서 버티고 사수하는 것을 넘어 적군을 격파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독일군 지휘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러시아군의 공세가 재개됨으로써 재차 위기에 빠졌다. 러시아군 제1군과 제10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을 단행, 독일군을 다시 밀어냈다. 9월 말 아우구스투프 전투와 수바우키 전투에서 승리해 러시아 영토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나아가 러시아군은 네만 강을 넘어 독일 영토로 진입했고 동프로이센 일부 지역까지 점령했다. 적군이 심장부인 쾨니히스베르크마저 넘보는 상황에서, 독일군 제8군이 결사적으로 반격을 단행했다. 가까스로 러시아군의 진격이 저지됐다. 이들은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참호를 팠고 굼비넨-마주리안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에서는 한동안 교착 상태가 이어지다가 1915년 2월에 변화가 찾아온다. 이에 대해선 후술 하겠다.


동부 전선에서는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 세르비아군 간의 전투도 벌어졌다. 당초 오스트리아는 오로지 세르비아를 응징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전쟁 계획도 세르비아와의 전쟁만을 염두에 두고 세워졌다. 다만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 도시인 갈리치아를 공격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계획이 수정됐다. 세르비아를 공격할 발칸집단군 이외에 러시아군과의 전쟁을 감안한 갈리치아행 A제대, 상황에 따라 세르비아 또는 러시아 전쟁에 참전할 B제대를 추가로 꾸렸다. 오스트리아는 발칸집단군과 B제대를 기반으로 먼저 세르비아를 공격했다. 적군을 크게 얕잡아봤던 오스트리아군은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하지만 세르비아군은 만만치 않았다. 베테랑 장군인 푸트니크의 지휘 하에 세르비아군은 드리나 강과 사바 강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패퇴시켰다. 세르비아군은 자국 영토에서 적군을 몰아낸 데 이어 9월 6일 오스트리아 영토로 넘어가기까지 했다. 다만 오스트리아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5000명 넘는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집요한 세르비아군은 포기하지 않고 오스트리아군을 계속 괴롭혔다. 포티오레크 방어선의 취약점을 돌파해 보스니아로 진입했다. 이후 40일 동안 보스니아 동부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만간 증원군과 중포를 앞세워 맹렬하게 반격했다. 치명상을 입은 세르비아군은 멀리 있는 모라바 강까지 퇴각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여세를 몰아 세르비아 영토로 진입해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함락시켰다. 이 상황도 오래가진 못했다. 머지않아 세르비아군의 반격이 이어졌다. 12일간의 전투 끝에, 오스트리아군은 베오그라드는 물론 세르비아 영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오스트리아군과 세르비아군 간의 전투는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1915년 가을에 재개된다.


오스트리아군 최대의 적은 러시아군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의 능선을 따라 포진했다. 이에 맞서 러시아군은 폴란드 돌출부의 남쪽에 주둔했다. 수적으로는 러시아군이 우세했다. 53개 보병사단과 18개 기병사단을 보유한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37개 보병사단, 10개 기병사단을 갖췄다. 향후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의 서부 갈리치아 및 동부 갈리치아를 겨냥해 포위 공격을 전개할 예정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바르샤바 남쪽의 폴란드 평원에서 러시아군의 측면을 포위 공격하고,동부 갈리치아에서 렘베르크와 프셰미실 요새를 활용해 적극 방어한다는 계획이었다. 지형상 러시아군이 유리해 보였다. 카르파티아 산맥에 있는 오스트리아군 진지는 왼쪽의 비스와 강과 오른쪽의 드네스트르 강 사이로 돌출돼 있었다. 이러한 강들은 오스트리아군의 활동을 제약하는 반면 러시아군에겐 공격의 이점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카르파티아 전선에서의 초반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이 선방했다. 오스트리아군 제1군은 산과 강을 건너 크라시니크에 있는 러시아군 우익을 공격했다. 러시아군 제18사단 등이 큰 피해를 입었고 루블린 방면으로 20마일 퇴각했다. 오스트리아군 제4군은 코마로프에서 러시아군 제3군과 싸워 승리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 제3군은 무리하게 나서다 참패했다. 당초 오스트리아 영토 내에서 방어에 전념해야 했던 이들은,러시아군이 타르노폴에서 서진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 공세로 전환했다. 대적해야 할 러시아군은 200개 보병대대, 700문에 달하는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결국 적군의 막강한 화력에 휘말려 츨로초프에서 패배한 뒤 급히 도망쳤다. 오스트리아군 제2군도 두 개의 리파 강 사이에 있는 러시아군을 공격했다가 수천 명의 사상자와 2만 명의 포로를 내고 퇴각했다. 제3군과 제2군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군 지휘관인 콘라트는 매우 낙관적이었다. 나름의 전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3군과 제2군을 렘베르크 후방(베레시차 강)까지 퇴각시켜 러시아군을 유인한 다음, 제4군을 북쪽에서 남하시켜 적군의 측면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당시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리는 것에 자극받은 콘라트는 어떻게든 전과를 올리길 갈망했다. 이에 따라 참패로 사기가 꺾인 군대를 엄하게 다그치며 나아갔다. 무리수는 불행한 결말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러시아군 기병대 등이 오스트리아군 방어선의 벌어진 틈을 돌파, 적군의 후방으로 진격했다. 허를 찔린 콘라트는 전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15만 명의 오스트리아군 수비대가 있는 프셰미실 요새는 덩그러니 남겨져 고립됐다. 지금껏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치명상을 입었다. 10만 명의 사상자와 30만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150마일에 달하는 영토까지 빼앗겼다.


오스트리아군의 패배로 독일군도 다급해졌다. 자칫 독일의 영토가 공격당할 수도 있었다. 자구책으로 독일군은 제9군을 창설했고, 9월 23일 방어가 아닌 적극적 공세에 나섰다. 비스와 강 상류를 넘어 러시아군의 핵심 거점인 바르샤바로 진격했다.루덴도르프 등은 바르샤바의 러시아군을 과소평가해 쉽게 포위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했다.오산이었다. 러시아군 지휘부는대비책을 마련해놨다. 러시아군 제4군과 제9군을 독일군 정면에서 맞서게 하고, 제2군과 제5군, 제1군을 측면 공격에 투입할 계획이었다.측면을 급습할 준비는빠르게완료됐다. 더욱이러시아군 병력 규모가독일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루덴도르프는곧 현실을 자각했고 독일군의 철수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비슷한 시점에 오스트리아군 제1군이 무모하게 러시아군을 공격했다가 4만 명의 사상자만 내고 퇴각하기도 했다. 러시아군은 양호한 전황에 힘입어 더 큰 목표를 상정했다. 제2군 및 제5군으로 구성된 중앙군으로 베를린을 향해 진격하려 했다. 남쪽에 있는 군대는 갈리치아 등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완전히 격파하기 위해, 크라쿠프와 프셰미실 사이에서 공세를 전개하기로 했다. 다만 독일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들은 서부 폴란드 평원에서 러시아군의 측면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11월 11일, 독일군 제9군은 러시아군 (제2군에 소속된) 제5시베리아 군단에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었다. 독일군은 비교적 병력이 적었지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제5시베리아 군단과 나머지 러시아군 사이에 틈이 벌어진 이점을 적절히 활용했다. 러시아군은 전황이 녹록지 않다고 판단해 우치로의 퇴각 결정을 내렸다. 뒤이어 우치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서부 전선으로부터 온 증원군으로 구성된 독일군 제10군은 북쪽에서 정면 공격을 단행, 12월 초에 우치를 함락시켰다. 이후 바르샤바 남서쪽에 위치한 비스와 강의 작은 지류인 라프카 강과 브주라 강까지 진격했다. 러시아군은 해당 지역 인근에 참호를 파고 방어 태세를 갖췄다. 독일군은 더 이상 나아가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개활지여서 무리하게 진격했다가 총탄 세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군도 러시아군처럼 참호를 파고 대치에 들어갔다. 이로써 동부 전선의 중앙부는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다.


동부 전선 남쪽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존폐 위기에 처해있었다. 독일군의 지원에 힘입어 크라쿠프와 쳉스토호바 사이에 있는 비스와 강 북쪽의 영토를 잠시 얻었다가, 러시아군 남서전선군의 맹공으로 후퇴해야 했다. 크라쿠프 남쪽에서도 러시아군의 공세에 휘말렸다. 이에 카르파티아 산맥에 있는 병력이 크게 희생됐다. 산맥을 통과할 수 있는 주요 고갯길도 빼앗겨 부다페스트가 적군의 공격에 노출됐다. 그런데 러시아군 지휘부 내의 혼란으로 오스트리아군이 기사회생했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공격을 이어갈지 아니면 (우치 전투 패배의 여파로) 북서전선군을 바르샤바로 철수시킬지를 두고 고심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를 틈타 역공을 가했다. 제14군단이 크라쿠프 남쪽의 러시아군 제3군과 카르파티아의 러시아군 제8군 사이에 상당한 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뒤 공세를 펼쳤다. 독일군 제43사단도 가세했다. 4일 간 전개된 공세가 어느 정도효과거두면서 러시아군은 후퇴했다. 러시아로선 뼈아픈 패배였다. 크라쿠프를 거쳐 베를린으로 진격한다는 계획과 부다페스트를 공격한다는 계획 모두가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한 달 뒤 오스트리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 동쪽 방면으로 추가 공세를 펼쳤다. 초반에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콜로메아 전투를 통해 러시아군을 격퇴했고 체르노비츠로 나아갔다. 다만 더 이상의 진격은 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산맥의 험준한 지형과 혹독한 추위로 인해 전의를 상실해 갔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군의 강력한 반격이 뒤따르면서 오스트리아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의 프셰미실 요새가 함락됐고, 러시아군은 카르파티아 전선을 완전히 장악했다. 한계점에 도달한 오스트리아군은 독일군의 지원 없이는 자력으로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게 됐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독일군 제8군과 제10군이 동프로이센 일부 지역에 있는 러시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움직였다. 혹독한 추위를 뚫고, 마주리안 호수 지대의 남쪽과 북쪽에서 적군을 포위해 나갔다. 독일군을 깔보던 러시아군은 큰 코를 다쳤다. 포병의 지원 없이 저항하다가 한쪽으로 서서히 몰렸다. 결국 러시아군 제10군은 독일군에 항복하거나 도망쳤다. 동프로이센은 러시아군의 지속적인 위협에서 벗어날수 있게 됐다.


■악몽의 참호전

1915년 봄, 서부 전선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전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양 진영의 군대가 방대한 참호를 기반으로 대치했다. 참호는 병사들이 엄폐하기에 충분할 만큼 깊었다. 참호들을 연결하는 교통호도 광범위하게 조성됐다. 참호 밑에는 계단을 통해 내려갈 수 있는 지하 대피호도 존재했다. 참호 주변에는 적군이 다가올 수 없도록 촘촘한 가시철망까지 만들어졌다. 최일선의 참호 뒤에 2중, 3중의 참호도 구축됐다. 병사들의 참호 생활은 끔찍했다. 비가 많이 내려 참호 안은 항상 물이 가득했고 쥐떼들이 득실거렸다. 질병도 만연했다. 병사들은 마치 '미로'처럼 된 참호 및 교통호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무엇보다 병사들을 힘들게 만든 것은 무기한 교착 상태와 극악한 소모전이었다. 어느 군대도 적군의 참호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정면은 물론 우회 돌파도 불가능했다. 전 전선에 걸쳐 병력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기관총 야포 철조망 등이 철저히 방어하고 있는 만큼 취약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무작정 돌격했다간 희생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참호전에 열심이었던 쪽은 독일군이다. 이들은 시간이 갈수록 동부 전선으로의 병력 수송을 늘렸다. 동맹국인 오스트리아가 심각한 타격을 입어 지원이 불가피했다. 또한 동부 전선에서의 공세를 통해 결정적 승기를 잡는 게 전쟁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우세해졌다. (팔켄하인과 몰트케는 서부 전선을 중요시했지만, 동부 전선에 있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입김이 더 세어진 상태였다.) 동부 전선에서 승부를 보는 동안 서부 전선에서는 버티는 전략으로 나가려 했다. 자연스럽게 독일군의 동부 전선 전력은 크게 강화된 반면 서부 전선 전력은 약화됐다. 방어가 핵심이 된 (서부 전선의) 독일군은 아르투아와 솜 강의 백악토 지대, 엔 강의 고지대 등에 있는 참호를 요새화시켰다. 독일군과 달리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공세에 중점을 뒀다. 과거에 비해 병력 규모가 눈에 띄게 커진 이들은 플란데런과 아르투아, 샹파뉴를 주된 공격 목표로 삼았다.


1915년 3월, 영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 인도군단이 아르투아 구역에 있는 뇌브샤펠을 공격했다. 영국군은 초전에 의미 있는 전과를 올렸다. 보병이 적군 참호 인근에 은밀히 다가간 뒤 맹공을 퍼부어 방어선에 틈을 내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강력한 포격도 가해져 독일군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퇴각하는 적군을 추격해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멈춰 섰다. 영국군이 지체하는 사이, 독일군은 예비군을 신속히 동원해 저지하려 했다. 조만간 영국군의 공격이 재개됐으나 난관에 부딪혔다. 독일군 기관총 진지에서 무차별적인 사격이 가해졌다. 순식간에 1000명에 달하는 영국군 병사들이 쓰러졌다. 이후의 공세도 짙은 안개와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여의치 않았다. 영국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반면, 독일군은 후방에서 급파된 예비군으로 적군을 밀어내고 방어선의 틈을 메워나갔다. 공수 교대도 이뤄졌다. 이번에는 독일군이 반격할 차례였다. 이들은 영국군의 참호로 맹렬히 돌진했다. 영국군은 20 정의 기관총으로 응수했다. 독일군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 세례를 받고 쓰러져 나갔다. 유의미한 공격은커녕 막대한 희생만 낳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뇌브샤펠 전투에서는 참호전의 부정적 양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공격 측이 공세를 펼치면 참호에 있는 방어 측이 기관총 등으로 대응, 공격 측은 무수한 사상자만 내고 퇴각했다. 다음으로 방어 측이 공세를 펼치면 비슷한 현상이 반복됐다. 그야말로 일진일퇴의 공방전, 비참한 소모전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양태는 앞으로의 참호전에서 계속될 것이었다. 4월에는 제2차 이프르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는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만행이 발생했다. 독일군이 염소 형태의 '살인가스' 160톤을 담은 실린더 6000개를 이프르 북쪽 랑에마르크 반대편에 투하했다. 회녹색 연무가 밀려오고 있었지만, 참호 안의 프랑스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느 순간, 프랑스군 병사들이 기침을 하고 토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했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도망치는 병사들도 많았다. 예상치 못한 비대칭 전력으로 인해 프랑스군 방어선에 틈이 생겼다. 독일군은 당장 공격하지 않고 참호 안에 머물렀다. 북쪽에 이어 이프르 남쪽에서도 독가스 공격이 행해졌다. 독일군 보병의 공격도 병행됐다. 이때 프랑스군 도르셋 연대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전선 사수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독일군은 수포성 겨자, 질식제 포스겐 등 치명적 가스를 자주 사용했다. (동부 전선에서도 염소 가스가 사용돼 다량의 러시아군이 희생됐다.) 살인 가스는 전황에 영향을 줬지만, 승패를 가를 만한 요인은 아니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물에 적신 천을 입에 두르거나 방독면을 써가며 대처했다. 적군과 마찬가지로 독가스를 살포하기도 했다.


연합군은 5월에 이르렀을 때, 아르투아 지역에서 공세를 단행했다. 영국군은 오베르 능선, 프랑스군은 비미 능선을 겨냥했다. 이곳에서 자신들의 진지를 내려다보는 독일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전과를 올리진 못했다. 영국군은 손쉽게 저지당했다. 프랑스군은 능선 점령에 성공했지만, 머지않아 독일군 예비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했다. 이 시기 연합군은 지지부진한 전황에 더해 내부 의견 충돌까지 겹치면서 골머리를 앓았다. 영국군은 준비가 부족하니 추가 공세를 연기하자고 주장했다. 프랑스군은 가급적 신속한 공세를 주장했다. 실제로 전투를 치르기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병력과 군수물자를 비축하고 진지와 도로도 건설해야 했다. 이에 따라 당초 8월이었던 추가 공세 개시일이 9월 말까지 미뤄졌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지체를 틈타 공격이 예상되는 지점을 강화해 나갔다. 참호선을 겹겹이 마련했고, 그 주변에 포대와 기관총 초소도 설치했다. 연합군이 어떠한 공격을 가해도 돌파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들어맞았다. 영국군이 아르투아의 루스에서 10열 종대로 진격해 들어갈 때, 독일군이 기관총을 무자비하게 난사했다. 기관총 1 정당 1만 2000발 넘는 총탄이 쏟아졌다. 영국군 병사들은 풀밭에서 줄줄이 쓰러져 나갔다. 적군의 총탄 세례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해도, 촘촘히 설치된 가시철조망에 막혔다. 영국군은 투입된 병력의 절반을 잃은 채 퇴각해야만 했다. 이들은 이후에도 3주 간 공격을 이어갔지만, 영토는 거의 차지하지 못하고 3만 명 넘는 사상자만 발생했다. 루스 전투는 비참한 패착으로 귀결됐다. 프랑스군이 주축이 된 샹파뉴 전투는 더 심각했다. 먼저 독가스를 살포한 뒤 20개 사단이 중포의 지원을 받으며 돌격했다. 애국심과 전의가 남아있던 병사들은 샹파뉴 고지대 등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독일군의 무지막지한 기관총과 포탄 세례 앞에 뚜렷한 한계를 드러냈다. 날이 갈수록 사상자가 급증했고, 목표로 했던 영토 획득은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14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전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의 1915년 전황은 '악몽' 그 자체였다. 전술의 부재 속에 주로 돌격만을 감행하다가 독일군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전과는 없고 희생만 남았다. 반면 독일군은 당초 계획대로 참호를 기반으로 버티는 데 성공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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