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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씀 Apr 09. 2025

카지노 게임 봉인한 자리, 말의 무덤 위에 선 우리

영화 [파묘] 리뷰

*많은 분들이 이미 접한 항일 주제에서 다소 벗어난 영화 이야기를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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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외할아버지는 ‘산 밑 마을 사람들은 입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곤 하셨다. 대문 너머 산기슭이 보이는 집에 살며 자란 나는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오래 몰랐다. 조용해야 하는 이유, 말하지 말아야 할 것들, 그리고 되묻지 말아야 할 순간들이 있었다. 마치 그 말 한마디가 어디론가 빠져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래’의 무언가가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듯이. 영화 파묘는 바로 그 말 아래를 들여다본다. 봉인된 이야기들, 꺼내지 말아야 했던 기억들, 그리고 도면에 나오지 않는 세계를.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 세대와 결이 다른 배우들이 어우러져 긴장과 균열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이 영화는,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한국인의 무의식 깊은 층위에 새겨진 두려움의 '형태'를 드러낸다. 외지인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곁에 머무르되 끝내 들여다보지 못했던, 혹은 외면해온 ‘우리의 역사적 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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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 전문가인 지관 ‘김상덕’(최민식), 무녀 ‘이화림’(김고은), 장례지도사 ‘고영근’(유해진), 그리고법사‘윤봉길’(이도현)은 가족에게 반복적으로 닥친 재앙의 근원을 ‘조상의 묘’에서 찾는다. 깊은 산속에 봉인된 묘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장소에 있었고, 무언가를 감춘 듯한 흔적을 지닌 채 산에 묻혀 있었다. 이장을 위해 모인 이들은 묘를 파헤치며 단순한 지리적 불운이 아닌, 말해지지 않은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입을 열지 말았어야 했던 말, 파헤치지 말았어야 할 기억. 영화는 그 ‘파묘’의 대가를 기록한다.


민속학적으로 보자면, 파묘는 단순한 귀신 이야기라기보다는, ‘말의 저주’에 관한 영화다. 말과 침, 피, 물, 그리고 입의 구멍. 이 구멍은 죽은 자와 산 자의 통로이자, 재앙의 경계다. 한국 무속에서 입은 종종 금기의 장소다. 말 한마디로 복이 들고, 또 말 한마디로 화가 들어온다고 믿었던 사람들. 그래서 말을 삼키고, 침을 뱉지 않으며, 입을 맞추지 않았던 시간들. 파묘 속에서 반복되는 ‘입’의 상징은 우연이 아니다. 봉인된 묘의 입구, 입에서 시작된 사건들, 침묵을 강요당한 가족사. 모두 말하지 못한 말과, 말할 수 없었던 말이 만들어낸 구멍들이다. 영화는 이 ‘구멍’들을 닫기보다, 오히려 천천히 벌려 보여준다. 어디선가 시작된 행위가 세대를 건너며 어떻게 재앙이 되고, 질병이 되고, 죽음이 되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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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게임은카지노 게임 틀어막는 존재다. 어떤 말은 흙으로 덮어야 하고, 어떤 말은 그 위에 돌을 올려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봉인이 실패했을 때, 즉 기억을 묻는 데 실패한 자들이 남긴 흔적을 응시한다. 말을 거둔다는 건 곧 죽음과 공존하는 방식이다. 입을 다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음을 이 영화는 암시한다. 그러니 파묘는 말보다 더 오래 침묵한 이들의 이야기이며, 입을 틀어막은 카지노 게임 아래, 소리 없이 흐르던 것들의 귀환이다. 그 소리는 귀신의 울음이 아니라,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말들의 뒤척임에 가깝다.

또한 영화는 ‘굿’과 ‘장례’의 중간 지점에 서 있다. 굿은 혼령을 달래고, 장례는 그를 보내는 의식이다. 굿이 푸는 일이라면, 장례는 묻는 일이다. 파묘는 그 둘의 실패가 불러온 파국을 다룬다. 보내지 못한 자와 돌아오지 못한 자. 장례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한 죽음은 종종 공동체에 귀환하지 못한 서사로 남고, 굿이 생략된 시간은 그 죽음을 사적인 비극으로만 격리시킨다. 물론 다른 영화들에 비해 굿에 할애한 씬이 많음에도 현대의 단편적인 행위가 지독히도 오래된 시간을 덮기엔 다소 부족했음을 보여준다.영화는 그 틈에 질문을 건넨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어떻게 보냈으며, 누구는 여전히 묻히지 못하고 남아 있는가.또한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말이다.

결국 이 영화는 묘가 아니라 ‘죄의 자취’를 묻은 공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묻는다. 조상의 카지노 게임은 과거를 기리는 장소가 아니라, 때로는 정리하지 못한 기억이 남긴 공동체의 균열이다. 우리가 조상이라 부르던 자들이 과연 모두 ‘복’을 품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 우리가 그 복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덮어왔는지. 어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산 사람의 삶 속에 뿌리를 내려 번져간다. 그 뿌리가 닿은 자리는 때로 병이 되고, 파멸이 되고, 때로는 입을 닫은 아이가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외할아버지가 생전에 불렀던 한 맺힌 노래를 떠올렸다. 곡조 없이 흐르던 그 노랫말은 대체 누구에게 가닿았을까. 어쩌면 그 노래 역시, 카지노 게임을 덮는 또 하나의 흙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억 위에 기억을 덮으며 살아온 사람들. 말하지 못한 말들이 입 안에서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어느 카지노 게임 앞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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