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10)
사람은 쉽게 변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는다. 예전의 나는 이 말이 절망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저 말을 절망적으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쉽게' 변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는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만 변할 수 있다. 내가 애를 써서 내 삶의 조금이라도 변화시켜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면 딱 그만큼 삶이 변한다. 내가 걸어간만큼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그리고 그 때 마치 기적처럼 "사람은 쉽게 변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는다" 라는 말은 절망이 아니라 구원이 된다. 저주처럼 느껴지던 말이 축복이 되어 나를 지켜준다. 내가 애를 써서 바꾼 나의 모습은 "쉽게 변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기 때문이다. 내가 피땀흘려 바꾼 그 만큼은 떳떳한 내 모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쉽게 변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적일 수 있다.
식물적 마비 상태는 무감각한 삶이다.
식물은 광물질을 가지고 유기물질을 직접 만든다. 이러한 특질로 인해 식물은 일반적카지노 게임 사이트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따라서 감각할 필요도 없게 된다. 동물들은 양분을 찾으러 가야 하기 때문에 이동 활동의 방향카지노 게임 사이트 진화했고 따라서 점차 풍부하고 점차 명확해지는 의식의 방향카지노 게임 사이트 진화하게 되었다 ··· 이러한 관점과 척도에서 우리는 동물을 감수성과 깨어난 의식카지노 게임 사이트, 식물을 잠든 의식과 무감각카지노 게임 사이트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에서 생명의 진화 과정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는 생의 약동(Elan vital)을 생명체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식물과 동물로의 분기는 진화의 방향성과 비율이 다른 두 종류 경향의 포착된 상태이다. 식물적 특성은 고착화, 무감각, 무의식 (프로이트의 무의식과는 다른의미의 '의식'이 없음), 축적을 두드러진 경향카지노 게임 사이트 가진다. 반대로 동물적 특성은 활동성, 감각, 의식, 발산을 두드러진 경향카지노 게임 사이트 가진다. 그는 식물 종도 동물적 특성을 가질 수 있으며 동물종도 식물적 특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모든 생명체는 잠재적인 상태로 다른 대부분의 형태의 본질적인 특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비율 속에 있을 뿐이었다.
2년전,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 수업을 들었다. 2년 전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 때의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행이 닥쳐오면 아무것도 카지노 게임 사이트 못한채 그 파도에 먹혀버렸다. 이전의 수업들을 돌려 보다가 2년 전 내가 했던 질문을 다시 보게 되었다. "잘 지내다가 느닷없이 슬퍼질 때가 많은데 왜 그런걸까요?" 라는 질문이었다. 그 때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너의 기억이 슬픈 기억으로 편집되어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쁜 기억을 많이 쌓아서 기억을 다시 편집해야 한다."
아리송했다. 그 때까지만해도 나는 스스로를 마치 땅에 뿌리 박힌 식물인 것처럼 생각했다. 식물이 내리치는 폭풍우나 장마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나에게 찾아오는 우울함과 슬픔이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처럼 느껴졌다.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슬픔의 감정이 찾아오는 것을 막을수는 없지만, 나는 내 스스로가 식물적(부동적) 존재이기에 그 슬픔을 덜어내기 위한 의지적 노력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한 동물 종의 활동이 아무리 충만하고 넘치는 것처럼 보여도 마비나 무의식이 언제나 노리고 있다. 동물의 활동은 노력에 의해 피로를 대가로 해서만 그 역할을 유지할 수 있다. 동물이 진화한 길을 따라 수없는 쇠퇴와 퇴락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대부분 기생적 습관들과 관련이 있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과거의 나는 삶에 불행과 곤경이 닥쳐올때면 밤이 두려웠다. 밤이 되면 우울과 불안과 무기력이 극도로 심해져 마음이 지옥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과음을 하기도 하고, 과식을 하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원나잇을 하거나 성적카지노 게임 사이트 피가학적이고 퇴행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외면적카지노 게임 사이트만 보면 나는 많은 활동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 때의 나는 쇠퇴와 퇴락을 거친 ‘식물적 마비’ 상태에 빠져있던 것이었다.
나는 더 기쁜 삶카지노 게임 사이트 나아가려고 할 때 필수적카지노 게임 사이트 수반되는 피로와 고통을 회피했다. 대신 내가 늘 해왔던 기생적 습관들에 의지했다. 나는 슬픔이 찾아왔을 때 주로 충동과 자기처벌 (자해)카지노 게임 사이트 인한 부정적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카지노 게임 사이트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습관에 기대에 살아간 결과 ‘동물' 에서 '마비'된 '식물성' 을 얻게 된 것이다.
주변 친구들 중에 게임에, 술에, 주식에, 포르노에 중독된 친구들을 많이 본다. 그런 친구들 곁에 있으면 마치 흑백 사진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 역시도 길고 어둡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충동과 중독의 터널에 있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마음을 마비시키는지 안다. 그리고 아직도 그 터널 속에 도로 갇힐때가 있기에 그것이 얼마나 식물적인 삶인지 안다. 식물은 제자리에서 광합성을 하기에 움직일 필요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감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실제로 나는 저 시기를 거치며 점점 무감각해졌고 세상은 빛과 색을 잃어갔다.
'본능'에 치우친 활동성 = 운동 중독 = 지혜롭지 못한 삶
동물계의 모든 진화는 식물적 삶으로 후퇴한 것을 제외하면 분기된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 하나는 본능을 향해 가고 다른 하나는 지성을 향해 나아갔다. 식물적 마비, 본능, 지성. 이 세 가지는 결국 식물과 동물에 공통적인 생명적 추진력 속에서 동시에 생겨난 요소들이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다시 시간이 흐른 2년 후의 오늘, 다시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 수업을 듣는다. 나는 감당할 수 없었던 슬픔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났다. 시간이 슬픔의 기억을 망각시켜 준 덕분도 있겠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만 나라는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 달라졌다. 이제 나는 과거에 내가 질문했던 것처럼 "느닷없이 슬퍼지는" 기억들을 갖고 있지는 않다. 나의 기억들에는 사랑받았던 기억과 기쁨의 기억이 더 많이 쌓였다. 슬픔이 찾아와도 기쁨으로 바꿔낼 수 있는 가느다란 근육이 생겼다.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베르그손이 말하는 '행동'의 중요성을 협소하게나마 '운동'의 중요성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였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는 나가서 걸었다. 그러면 음침하게 꼬이고 말려들어가던 생각들에 미세하게 탄력이 붙곤 했다. 발을 굴리며 생각도 굴러가는것 같았다. 그렇게 했던 생각들마저도 지혜롭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지만 적어도 극도로 후회할 정도의 실수는 막아주었던 것 같다. 생각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때면 복싱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했다. 그러면 다시 슬픔으로 빠지려고 했던 생각을 불러세울 수 있었다. '식물적 마비' 상태에 빠져 있던 나는 복싱이라는 '운동 (활동)'을 통해 '지성'을 조금은 회복했던 셈이었다.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 이라는 수업의 반복 사이 2년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얼마간은 변하고 얼마간은 변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았다.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 중 슬픔을 유발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과 불안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점점 몸을 혹사시키며 운동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운동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건 곤경에 대처하는 차선이자 차악의 방법이었지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다.
당장의 슬픔은 막을 수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퇴행했다고 느껴졌다. 그건 바로 '지성'의 영역이었다. 나는 생각과 성찰이라는 걸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불타는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빠져나올 수 없자 살기 위해 생각의 스위치를 꺼버린 것이다. 저주받은 밤은 여전히 찾아왔고 낮의 시간동안 무럭무럭 자라난 무서운 나무들이 두려웠다. 그 어둠에 굴복해 더 큰 불행의 씨앗을 심고 싶지는 않았다.그렇게 나는 점점 '본능'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동물적인 유기체, 즉 움직이는 유기체는 실제로 자신의 운동성을 이용하여 식물뿐만 아니라 무방비 상태에 있는 동물들을 찾아 나서서 그것들을 먹고 산다. 이처럼 종들은 더 많이 움직이게 될수록 아마 더욱더 탐욕스럽게 되고 서로에 대해 위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본능'은 짧은 사정거리 안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여 생명체에게 직접적인 이득을 준다.나는 삶의 곤경을 다루는 법을 몰랐다. 그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나에게 닥쳐온 곤경에 굴복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본능적이고 피상적인 싸움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2년동안 복싱과 주짓수에 빠져 살았다. 싸움에 대한 공포가 있던 나는 싸움이라는 기질을 가장 닮아 있는 격기 종목에 무서운 속도로 빠져들었다.
한창 격투기에 빠져 있을 때에 나는 꽤나 공격적인 사람이 되어갔던 것 같다. 도장에서나 링에서 나는 종종 아니 꽤 자주 매너없는 관원이 되었다. 격투기 하는 사람들이 욕하는 소위 '쎄게충'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그 때엔 내 마음이 그랬다. 그 2년 전 어떤 사건을 계기로 내 안의 공격성이 옷을 찢어발기고 튀어 나와서 쿵쾅거리며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나를 아껴주던 친구들과 스파링을 하는 도중에도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타고난 몸과 힘이 약하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세게 해봤자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의 공격적인 감정을 파트너들도 느끼고 감정이 상하는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스파링을 하게 되면 내 앞의 상대를 씹어먹어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통제가 되질 않았다.
나를 비롯해서 많은 운동중독자와 '헬창'들을 거리둬서 바라보면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운동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처음에는 건강한 몸을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을테지만 그것에 또다시 중독이 되어 버려 건강하지 않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운동에 중독된 사람들은 베르그손이 말하는 '지성'과 '본능' 중에 '본능' 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가진다. 그리하여 더욱더 탐욕스럽게 되고 서로에 대해 위험하게 된 것이다. 지금보다 더 격기 종목에 강박적으로 빠져 있을 때에 공격적인 마음과 내 것을 챙기려는 마음이 점점 강해져 스스로가 짐승처럼 느껴질때가 많았다.
사람들이 습관은 노력의 반복을 통해서 획득된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반복된 노력이 항상 같은 것만 재생할 뿐이라면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인가?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사실 내가 이기고 싶었던 것은 보이지 않게 덮어두었던 불안이었다. 2년전, 너무 뜨거워서 화들짝 놀라 스위치를 꺼 버렸던 화염. 그것은 스위치를 내리듯이 꺼버린다고 꺼지는 불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갇힌 화염은 마음을 모두 그슬려 없애고 화상은 짓물러서 진물을 흘려댔다. 격투기라는 행동은 나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화상 입은 자리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상처를 덧나게 했다. 덧난 마음의 내부를 제대로 돌보아주지 않자 그 부분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피부가 괴사하듯이 내 마음은 뻣뻣하게 굳어갔다. 감정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세계의 벽이 점점 나를 향해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불안을 이기고 싶었다면 나는 그 불안의 중핵을 마주했었어야 했다.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들여다 볼 용기는 없이 똑같은 삶을 습관처럼 반복해서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때까지 나는 복싱 생체시합 1번과 주짓수 생체시합 1번 나갔던 것이 전부였고 두 번 모두 이겼다. 그 때의 승리는 물론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그러나 나에 대한 불신과 불안은 다시 찾아왔다. 나는 여전히 진정한 실전이라는 삶의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겁쟁이가 되었다.
그 무렵 나갔던 주짓수 시합에서 나는 시원하게 패배를 당했다. 시합에서 맞는 첫 패배였다. 사실, 시작부터 나는 내가 질거라고 생각했다. 그 시합은 '진짜 싸움' 을 포기한 채 나간 싸움이었으니까. 나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었다. 싸움을 피해서 임한 싸움에서는 이길 수 없는게 당연했다. 나는 그 시합을 계기로 진정한 싸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전히 나의 진짜 싸움에 대해서 정면승부카지노 게임 사이트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절망적이었지만 절망만 하고 있을수는 없었다.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했다.
'몸의 지성'은 삶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을 분별한다.
지성은 의식을 향해 본능은 무의식을 향해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지성의 본질적 기능은 임의의 상황에서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을 분별하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반복의 진정한 효과는 우선 해체(décomposer) 하고, 다음으로 재구성(recomposer)하며, 그리하여 몸의 지성에 말을 거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나는 '무지성 파이터'였다. 격기 종목은 사람 대 사람이 맞붙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와의 마찰 그 자체다. 그러나 나는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살피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공격을 퍼붓곤 했다. 무지성으로 상대방을 읽지 않고 공격하다가 너무 많이 맞는 나머지 관장님과 스승에게 "덜 위험하게 싸울 수 있는 법을 익혀라" 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무지성 파이터와 첫사랑을 하는 사람은 닮은 점이 있다. 첫사랑을 할 때를 떠올려보자. 상대방보다 나의 감정이 앞서서 흑역사가 될만한 삽질과 실수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마음에는 이런 유아적인 마음 상태가 깔려있다. "내가 이렇게 너를 좋아하는데!". 무지성으로 싸워댔던 나의 마음에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싸워보겠다는데!".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이었을 뿐 '너'가 아니었다. 그렇게 함께 해야만 하는 '싸움'과 '사랑'에서조차 너를 무화시키고 말았다.
진짜 싸움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 나에게 닥쳐오는 곤경들을 잘 대처해 나가는 것일테다. 분명 나는 과거보다 곤경을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운동' 이라는 습관을 획득했다. 눈이오나 비가오나 슬프나 기쁘나 운동을 하러 갔으니까. 그러나 '몸의 지성' 없이 '본능'으로만 반복하는 노력은 항상 같은것만 재생할 뿐이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그건 쓸모없는 습관에 불과하다. 나는 그 반복을 우선 해체하고 다음으로 재구성 했어야 했다. 그리하여 몸의 지성에 말을 걸었어야 했다. 그렇게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을 분별하고 창조해 냈어야 했다.
중독된듯이 했던 격투기 운동을 덜어냈다. 덜어낸 곳에 틈이 생겼고 다시 고통이 밀려들었다. 고통을 피하려고도 극복하려고도 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아보았다. 과거의 습관이 있기에 나는 금새 그 고통을 덮어버리려 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고통을 조금 더 잘 다루고 싶었다. 고통에 압도되지 않고 고통을 피카지노 게임 사이트도 않는, 그런 자세로 고통을 맞이하고 싶었다. 진짜 싸움에 진지하게 임하고 싶었다.
고통을 어깨에 이고서 생각을 잘 굴려 나가야 했다. 그래야 헐벗은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을 할 수 있었다.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어서 나는 수영을 택했다. 오랜만에 하는 수영은 내가 그간 얼마나 내 몸을 딱딱하게 만들어 왔는지 절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수영을 할 때에도 해체와 재구성이 필요했다. 되지 않는 동작을 하기 위해서는 상체와 하체를 분절시키고, 머리부터 목 그리고 척추를 따라 골반까지의 움직임을 쪼개서 생각한 뒤 그것을 다시 결합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다.
육지에서와는 다르게 수영은 물이라는 비교적 더 밀도가 높은 매개변수가 작용한다. 얼핏 생각하면 물이라는 것이 공기보다 더 부자유하게 느껴지는 조건일수도 있다. 물 속에서는 물의 저항 때문에 빠르게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그러나 물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물의 저항의 결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면, 그 진득거리는 결을 쓰다듬으면서 발생하는 마찰을 디디고 물 속에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물 속에서 자유롭다고 느낀다. 물의 부력 때문이다. 부력은 유체보다 밀도가 낮은 물체를 중력에 반하는 방향카지노 게임 사이트 떠오르게 하는 힘이다. 물은 그 밀도로 인해 자유와 부자유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본능과 지성에서 그것들이 선천적 인식으로서 간직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선천적 인식은 전자에서는 사물들에 기초하고 후자에서는 관계들에 기초한다고 말하자.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물의 흐름을 다시 느끼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영을 잘 한다는건 물의 호흡을 잘 느끼고 그것에 올라타는 것이다. 종종 남자친구와 함께 누워있을 때면 그의 호흡에 내 호흡을 맞춰보려고 할 때가 있다. 그의 들숨에 나의 날숨을, 그의 날숨에 나의 들숨을 맞추어 넣는것이다. 나의 굴곡의 오목한 곳에 너의 굴곡의 튀어나온 곳을 맞추어 포개듯이. 수영을 할 때에도 그렇다. 물속을 헤엄치는 고기들을 보면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인다. 새들이 하늘을 날 때 바람을 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류를 타고 단 한번의 날개짓카지노 게임 사이트 활강하여 저 멀리까지 흘러간다. 물에도 들숨과 날숨이 만들어내는 흐름이 있다. 그 요철에 내 몸을 유체처럼 만들어서 통과하는 것이다.
물 속에 완전히 잠수하여 잠영을 하다보면 조급하던 마음이 달래어지는 것을 느낀다. 잠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온 몸으로 웨이브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때 절대 조급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끈하게 미끄러지듯이, 이미 무수히 진동하고 있는 물 입자들의 틈새의 모서리를 세심하게 열어가며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평온을 만난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파랗고 뭉클거리는 물의 세계. 고막을 가득 채운 물의 고요를 듣는다. 나는 그렇게 '몸의 지성'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수영을 해 나가며 내가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과 그 방식이 떠올랐다.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타자의 진동에 대해 얼마나 무심했는지. 스파링을 할 때 타자는 무화되고 나의 감정을 쏟아내느라 급급했던 지난날들도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나는 타자라는 '물' 속에서 답답하고 부자유하다며 첨벙대고 있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쉐도우 복싱을 하며 물의 흐름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그저 내 몸이 가벼워져서 좋다며 물의 밝음만을 취했고 동시에 왜 이렇게 앞으로 안 나가지냐고 불평하며 물의 어둠은 취하려 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았다. 나는 너를 읽으려는 고통을 제대로 짊어진 적이 없었다.
'몸의 논리'는 생략을 인정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는다.
지성만이 찾을 수 있으나 지성 자신에 의해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본능만이 발견할 수 있으나 본능은 그것들을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 ··· 직관은 우리를 생명의 내부로 인도해 준다. 직관은 무사심하게 되어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대상에 대해 반성할 수 있으며 그것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게 된 본능이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몸의 논리는 생략(les sous-enendus)을 인정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는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인간은 '지성'과 '본능'적 특성을 모두 가진 존재이다. 그것은 나의 '몸' 이라는 장소 한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 행복한 삶은 이 두 가지에 치우쳐 있지 않다. '지성' 그 자체는 대상을 부동의 고체로 다룬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너'는 매순간 떨리며 변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성'만으로는 너를 있는 그대로 식별하지 못한다. 반면 '본능'은 순간적인 이득을 얻는데에는 유리하지만 반성(성찰)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너'를 향한 마음으로는 확장되지 못한다. 베르그손은 지성을 통하여 확장된 본능인 '직관'이 우리를 생명의 내부로 인도해 준다고 말한다. 즉, 더 행복한 삶으로 인도해주는 것은 '직관'이다.
이것은 '몸의 논리'를 거쳐야만 느낄 수 있는 상태일 것이다. 지금의 나는 어떤 '몸'을 가지고 싶을까? '무지성 파이터'의 몸에서 진짜 몸을 쓸 줄 아는 '지성적 파이터'의 몸으로 변화하고 싶다. '직장인'의 몸에서 '소설가'의 몸으로 변화하고 싶다. '몸의 논리'는 생략을 인정카지노 게임 사이트 않는다. 그러한 몸의 잠재적인 상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다면 그 몸이 실재적으로 드러나게 될 수 있는 행동 (훈련, 소설쓰기 등)을 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반복해야 할 반복은 어떤것이 있을까? 잠재적 꿈이 뜬구름 잡는 꿈카지노 게임 사이트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