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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즈 Apr 14. 2025

[16] 움직이는 게임 라이프

게임을 되찾기 위해 이곳을 나가고 싶다면

회사에 혼자 고립되어 매일 죽음을 떠올렸다. 이대로는 마음이 계속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해소할 방법이 필요했다. 기숙사에 게임기를 들고 가긴 했지만, 다른 직원들이 신경 쓰여서 게임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 공간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검도였다. 자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도장에 등록했다. 게임 업계와 달리 제조업은 퇴근 시간이 명확하기 때문에 무리 없이 학원을 다닐 수 있다. 이런 부분은 좋네. 검도는 하면 할수록 빠져드는 맛이 있었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들도 많이 오셨는데, 고수의 면모가 풍겼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할 수 있는 운동이라 좋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대련은 즐겁지 않았다. 치열하게 치고 박기보다는 타이밍과 눈치와 속도, 기술이 중요했는데, 당시의 나는 마음껏 때리고 또 맞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점심시간에는 회사 옥상에서 죽도를 휘둘렀다. 아침에도, 잠을 자기 전에도 기숙사 주변 공원에 가서 죽도를 휘둘렀다. 마음이 조금은 맑아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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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간이 지나 현장의 모든 부서 근무를 마치고 사무실 근무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부서는 설계 반이었고, 두 번째는 품질 관리 부서였다. 캐드를 사용해서 도면을 만드는데, 제품에 대한 이해가 중요했다. 0.01mm만 잘못되어도 불량이 나오는 정밀 제품을 만드는 곳이었으니까. 현장과는 다른 의미로 쉽지 않았다. 절삭 공구나 기계 재료 관련 책을 사서 퇴근 후 기숙사에서 공부해야 했다. 품질 관리 부서는 제품을 정밀 측정해서 불량품을 찾아내는 일이었는데, 처음 다루는 도구가 많았다. 불량이 있는 경우 설계 팀과 의논해서 수정이 가능한지를 파악 후 현장에 변경 도면을 전달하는 일도 함께 했다. 게임 업계에서의 QA의 역할과는 조금 달랐기에 신선했다. 이 두 부서의 직원들은 대체로 젊었다. 신 기술(?)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었을까? 또래들이 많기도 하고 오랜만에 PC를 사용하니 마음이 편했다. 나는 뼛속까지 IT 인간이구나. 품질 관리 부서의 한 직원은 기숙사에서 나와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상대가 불편해하는 것이 눈에 보여서 일부러 늦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머무를 곳이 불편해지니 우울감이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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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회사 근처에 땅을 두 군데 샀다. 뭐지 싶었는데, 5층 높이의 회사 기숙사를 짓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 공사 현장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으셨다. 전기와 인터넷까지 들어오자 나에게 기숙사에 머물라고 하셨다. 직원들과 가까이 있으라고. 기숙사 관리를 위해 이사님도 들어오셨고 샌딩 반의 중국 아저씨는 외국에서 가족들까지 데리고 와서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 두 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2인 1실로 배정되었다. 이사님은 자기 방으로 나를 자주 부르셨다. 함께 차를 마시며 아버지의 무용담과 회사의 일대기를 들었다. 불편했지만 종종 필요한 정보가 있었기에 열심히 들었다. 녹음기는 항상 켜둔 상태였다. 이사님은 자주 말씀하셨다. 너를 특별하게 생각해야 해. 너는 작은 호랑이야. 장차 이 회사 직원들을 책임져야 할 거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이 회사가 게임 회사라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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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인 사무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생산부였다. 설계부에서 나온 도면을 가지고 자재 창고부터 시작해서 제품의 완성과 포장까지 모든 공정을 관리했다. 게임 개발 과정에서 기획자의 역할과 가장 유사했다. 외주 관리도 해야 했고 이 모든 데이터를 엑셀로 관리했다. 생산부의 차장님은 호남이셨는데, 이 회사의 유일한 G코드 프로그래머이기도 했다. 내가 C&C를 배우고 왔다고 하자 도면을 주시며 한번 코드를 짜보라고 했다. 소중한 기회였다. 내가 작성한 코드로 커다란 기계가 제품을 깎는 것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생겼다. 차장님은 회사의 모든 어른 중 유일하게 나를 특별대우 하지 않은 분이셨다. 이제 슬슬 제조업에도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이민 갔던 사촌 동생이 방문했다. 어릴 때 친하게 지냈던 터라 반가웠다. 20년 만인가? 30년 만인가? 녀석은 미국에서 변호사들과 일하고 있다고 했다. 대단하네. 미국 변호사가 된 거야? 아니, 변호사 시험은 아직 못 붙었어. 일하면서 준비하는 거지 뭐. 그런데 여기는 왠일이야? 삼촌 뵈러 온 거야? 아버지가 이 회사 같이 운영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어 너도? 나도 그래. 그런데 나는 싫다. 하던 일이 있는데 억지로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도 그래. 싫은데 왜 온 거야? 내가 안 오면 동생에게 부탁한데. 어? 나도 그래. 그리고 보니 우리 둘 다 장남이네. 너나 나나 아버지들 욕심에 휘둘리고 있구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아버지들에게 한 방 먹여볼까? 같이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녀석은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드디어 생기나 싶었는데.

영업부에서는 출장이 잦았다. 아버지는 접대 영업을 절대 금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영업부에서는 사비를 들여서까지 접대를 했다. 대기업의 결정 권자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조합 간부들에게도 해야 했다. 어떤 제품을 사용할지는 관리자들보다 현장에서의 발언이 더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번은 모 대기업 노조 간부가 접대 자리에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온 적도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까지 우루루 와서 한우를 마음껏 먹으라고 호탕하게 외쳤다. 참 더러운 세상이구나 싶었다. 유흥 주점에 접대해야 할 분들을 모셔다 놓고 과장님과 함께 나와 편의점 커피를 마셨다. 참 살기 힘들다. 그렇지? 접대하는 거, 절대 비밀이다. 알지? 사장님은 우리 제품에 자부심이 대단하셔. 이렇게 계약하는 거 알면 힘드실 거다. 접대 안 하면? 당연히 다른 회사 제품을 쓰겠지. 더러운 세상이야. 그 이야기를 들으며 좋은 약점 소스를 하나 얻었다고 생각했다.

대다수 부서를 돌고 나서부터 아버지에게 자주 찾아갔다. 매번 새로운 제안서를 작성해서였다. 자동차 관련 제품만 만들어서는 회사에 미래가 없다. 전기 자동차도 곧 나올 것이고 그때에는 생산 방식이 달라질 텐데 우리 제품이 필요할까? 무엇보다 대기업 자동차 노조와 일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나 역시 접대 같은 것을 싫어했으니까. 유일하게 아버지와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에어컨이나 의료 기기, 항공기 관련 제품부터 그 사이에 하나씩 아케이드 기기나 PC 관련 제품도 제안했다. 시장 조사를 꼼꼼히 했고 우리 기술로 가능한지까지 비교 분석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새로운 분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시는 것 같았다. 당시에는 답답했지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회사의 가치는 단순한 수익 창출이 아니었다. 직원들의 안정적인 삶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2년 차가 되면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다녔다. 기계 전시회에 부스를 돌며 명함을 돌렸고, 아버지의 지인이라는 중견기업 회장님들께 인사를 다녔다. 그분들은 마왕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고, 이어서 자신의 일대기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대단하십니다. 존경합니다. 본받고 싶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곳은 큰 규모의 회사보다는 작은 공장과 대리점들이었다. 내가 다니는 곳이 최초에 마왕이 70년 전에 설립한 회사이기 때문에 오랜 거래처들 사장님들은 어린 나를 기억했다. 어떤 공장은 기계 5대가 덩그러니 있었는데, 사장님이 혼자 운영하신다고 했다. 견학을 부탁드려서 이틀간 그 공장에 머물렀다. 대단했다. 자동 기계에 물려두고 수동 작업을 동시에 했고, 밤에는 도면을 보고 코드를 짜서 오전에 C&C를 돌렸다. 우리 회사에서 최소 10명이 하는 일을 혼자 다 하는 격이었다. 이 분야에서는 유명한 분이시라고. 직접 일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수백 명이 일하는 기업의 오너보다 더 거대하게 느껴졌다. 꼭 제조업을 해야 한다면 이 분의 제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아버지는 회사에서도, 밖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가족들에게는 그렇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버지의 생일 파티는 자율 참여라고 공지해도 수십 명의 직원이 모였다. 명절에는 회사로 엄청난 양의 선물이 들어왔다.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라서 연휴를 앞둔 조회 날에는 추첨 이벤트를 통해 이를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명절 당일에는 아버지 집을 찾아오는 직원들도 있었다. 기술과 능력 면에서도 인정받았지만, 그보다 더 존경받는 것은 직원들을 향한 마음이었다. 정년퇴직을 하는 직원에게는 본인이 사용하던 기계를 선물로 준다고 했다. 수천만 원에서 비싸면 억대가 넘는 가격이다. 원한다면 작은 공장을 차릴 수 있게 도움을 주고 그 회사가 자립할 때까지 외주를 보낸다고. 은퇴 후의 삶까지 돕는 것. 말 그대로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이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현장의 한 직원 분은 기계를 판 돈과 모아둔 돈으로 시골에 작은 학교를 지을 거라고 했다. 근속 연수 평균 30년, 평생을 한 직장에서 일해 오셨기 때문일까? 사장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내가 다니던 회사의 직원들과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는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직원이 100명이라고 치면 사장이 책임지는 것은 300명, 500명이다. 그들에게 딸린 가족들까지 어깨에 짊어져야 하는 거야.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 왜 우리 가족은 어깨에서 내리셨나요?라고 묻고 싶었다.

이 회사를 장악하려면 나의 영향력을 키워야 했다. 아버지가 열처리 기술을 개발하고 제조반의 상징인 DOS 프로그램을 만든 것처럼. 게임 업계 출신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지 고민하다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공장 자동화. 영업부와 함께 방문했던 대기업들의 생산 라인은 대부분 자동화가 되어 있었고, 우리처럼 발로 뛰어다니지 않아도 사무실에서 상품의 위치와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RFID를 공부해서 창고의 재고 체크를 테스트했고, 전기 담당인 주사 님과 함께 공장 안을 돌아다니면서 배선을 확인했다. 기계 배치와 통신망 설치를 종합적으로 고민하며 끊임없이 실험했다. 그렇게 연구하던 중 ERP를 알게 되었다. 게임 업계에서는 익숙하지 않지만 제조업이나 무역업 등 대부분의 회사에서 회계나 경영 사무에 사용되는 일종의 툴이었다. 만약 여기에 생산 라인 자동화 기능이 더해진다면? 한 번에 외주 처리와 회계, 경영 사무까지 묶어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문 업체를 찾아다닌 끝에 구로 디지털 단지에서 커스텀 ERP를 만드는 회사를 찾을 수 있었다. 예전 직장이 있던 곳이라 마음이 쓰렸다. 그때부터 ERP 교육을 받고, 개발 PM이 되어 해당 업체의 프로그래머들과 작업을 시작했다. 게임은 아니었지만, 익숙한 일이었기에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었다.

ERP를 제작하며 회사의 회계에도 접근할 수 있게 되며 그 관련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어느 날 장부를 확인하는데, 이상한 이름이 이사로 들어와 있었다. 확인해 보니 아버지와 살고 계신 여성분과 관련된 내용인 것 같았다. 몇 년 전에 N사에 찾아왔던 가업 승계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그는 내가 훌륭히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자세한 내용을 거리낌 없이 공유했다. (회사를 물려받지 않기 위해 빠져나갈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나서는 이렇게 튼실한 회사를 준다는데, 대체 왜요? 라며 여러 번 되물었다. 사람마다 가치는 다른 거니까.) 결론은 아버지의 재혼 문제였다. 이제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상무님과 나, 그리고 거의 20명이나 되는 영향력 있는 주주들 뿐 아니라 아버지의 상속권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를 처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했다. 아직 처리가 안된 지금 이 타이밍뿐이다. 지금이라면 나도 동생도 빠져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며칠 뒤, 사장실로 쳐들어갔다. 최대한 분노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이 타이밍에 재혼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가업 승계가 끝나고 하셨어야죠. 일을 자꾸 어렵게 만드십니까! 사장실 옆에 붙은 벽 너머 총무부에서도 들릴 수 있도록 큰 소리를 냈다. 소문이 돌아야 했다. 아버지 책상에 서류 봉투를 던지듯 내밀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모든 대화를 녹음하며 만들어 둔 자료였다. 아버지와 회사의 모든 약점이 담겨 있는 폭탄이었다. 나를 붙잡아 두고 싶다면 더 큰 손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과연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이제는 나와 동생이 없어도 되는 상황이 되었잖아? 아버지는 재혼하셨으니까. 그분의 아이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시지요. 사장실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빠져나왔다. 자꾸만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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