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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04. 2025

지혜는 카지노 가입 쿠폰 미소를 통해서만 전해진다.

『가르침과 배움의 현상학』(스즈키 다이세츠) 강독 후기

구지 화상은 무엇인가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단지 손가락 하나를 세울 뿐이었다. 뒤에 동자 한 명이 절에 남아 있게 되었다. 외부 손님이 "화상께서는 어떤 불법을 이야기하고 계시나요?"라고 묻자 동자도 구지 화상을 본떠 손가락을 세웠다. 구지 화상이 이런 사실을 듣고, 동자를 불러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는 카지노 가입 쿠폰으로 울부짖으며 방 밖으로 나가고 있는데, 구지 화상은 동자를 다시 불러세웠다. 동자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 순간 구지 화상은 손가락을 세웠다. 동자는 갑자기 깨달았다. 구지 화상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천룡 스님에게서 '한 손가락의 선'을 얻어 평생동안 다함이 없이 사용했구나!"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입적했다. 『무문관』「제3칙 구지화상」




“고통 없이는 깨달을 수 없는 건가?” 작년 하반기에 나를 사로잡고 있던 화두였다. 연말에 불교 강독 공지가 올라왔다. 『가르침과 배움의 현상학』(스즈키 다이세츠). 강독하는 책 제목을 본 순간 알았다. '아, 역시 고통 없이는 배울 수 없는 게 맞구나.'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깨달음은, 사랑하는 이가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견디는 고통, 그리고 사랑하는 이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견디는 고통 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이구나!' 전자가 배움(제자)의 고통이라면, 후자는 가르침(스승)의 고통일 테다. 동자승은 사랑하는 구지 스님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버린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내야만, 그리고 구지 스님은 사랑하는 동자승의 손가락을 자르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내야만, 진정한 배움-가르침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문헌 중 하나인 『전등록』의 ‘전등(傳燈)'은 등불燈(빛, 깨달음)을 전한다傳는 의미이다. 깨달음(빛)은 고통(어둠)을 매개로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서양 철학자 후설은 현상학을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어 설명한다. "돌리면 열리는 문이 있다. 돌리면 열릴 때 우리는 문을 인식하지 않는다. 어느 날 문고리를 돌렸는데 문이 카지노 가입 쿠폰 않는다. 그때가 우리가 문을 인식하는 순간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사유를 시작할 수 있다." ‘돌려도 카지노 가입 쿠폰 않는 문’. 이걸 다른 서양 철학자의 개념을 빌려 설명하면, ‘사건’ 혹은 ‘차이’, 좀더 포괄적으로는 ‘타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정한 타자는 언제나 ‘돌려도 카지노 가입 쿠폰 않는 문’ 같은 존재이니까.


후설의 비유는 적절하지만 약간 실험실 속의 예시 같은 느낌이 있다. 우리가 삶에서 이런 ‘현상학’적 순간을 마주할 때는 언제일까? 나의 경우 언제 처음 ‘돌려도 카지노 가입 쿠폰 않는 문’을 만나보았나? 제일 먼저 기억나는 건 첫 남자친구를 사귈 때였다. 당시 나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잘해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생각해보지조차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문고리를 돌려본 적도 없었다. 그저 엄마에게 배웠을 뿐이다. 엄마가 말했다. "문을 열려면 문고리를 돌려야 돼." 나는 엄마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을 그대로 남자친구에게 해주었다. 그게 내가 배운 ‘누군가에게 잘해주는 것’이었으니까. 엄마가 나에게 해주었던 대로, 매일 밥도 해주고 도시락도 싸주고 청소도 해주고 냉장고 정리도 해주었다. 그러면 문이 열릴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남자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너 이렇게 구는 거 나 좀 부담스러워.” 그날의 당황스러움과 수치심이 기억난다. 그것이 내가 ‘돌려도 카지노 가입 쿠폰 않는 문’을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이는 비록 타자(사람)와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삶에서 어떤 사건 자체가 '타자'일 때가 있다. 나에게 ‘돌려도 열리지 않는 문’ 같은 사건은 언제였나? 스타트업할 때였다. 사업을 하기 전까지 나는 열심히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정말로 열심히 하면 안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리면 문은 언제나 열렸다. 그런데 스타트업을 할 때는 아무리 돌려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사실 그때보다 더 열심히, 더 간절히 문고리를 돌린 적도 없었다. 대입 공부를 할 때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사업은 잘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안 됐다. 심지어 열심히 카지노 가입 쿠폰 더 안 되는 느낌마저 들었다. 실제로 그 당시 우리 회사에 투자를 했던 투자자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김 대표, 사업은 오르막에서 눈덩이를 굴리려고 애쓰는 게 아냐. 내리막을 찾아서 톡 치면 알아서 눈덩이가 불어나게 해야지.” 그 말에 설득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몰랐다. 나는 문고리를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니까. 5년 간 열심히 돌린 끝에 문고리가 부서졌다. 나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좌절했다. 남자친구의 말이 당황과 수치심으로 다가왔다면, 사업 실패는 절망과 공포로 다가왔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 아니 열심히 카지노 가입 쿠폰 더 안 되는 일마저 있다면 대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 거대한 혼란('판단중지')에 빠졌다.


‘돌려도 열리지 않는 문’을 만나고 나는 ‘판단중지’에 빠졌다. “어? 잘해주는 게 부담스럽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어?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지?” 겹겹의 ‘판단중지’에 빠져 내 삶은 멈춰버렸다. 그 당시 나는 스스로 사유할 힘이 없었다. 철학이 나에게 해준 일은, 나를 ‘판단중지’ 상태에서 ‘사유’로 나아가게 해준 것일 테다. 배우고 수행카지노 가입 쿠폰 점점 깨우쳤다. 아, 진정으로 잘해주는 건 무작정 밥하고 빨래해주는 게 아니구나. 아, 진정으로 열심히 하는 건 시험 공부 열심히 하는 거랑 다른 거구나. 그때 그 남자친구의 문은 문고리가 아니라 번호키로 되어 있었다는 것도, 그때 그 ‘내리막을 찾아 눈덩이를 굴리라’는 말은, (사업에서 인문주의까지 확장카지노 가입 쿠폰 생각하면) 나에게 자연스러운 것을 찾아 거기서 쇼부를 봐야 한다는 의미였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나는 점차 ‘판단중지’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철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삶을 살아가면서 ‘돌려도 열리지 않는 문’을 피할 수는 없다. 반드시 '사건'은 들이닥친다. 하지만 철학 없는 삶에서는 그 사건을 굉장히 수동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돌려도 열리지 않는 문’을 그저 맞닥뜨릴 뿐 그 상황을 제대로 해석하지도 적절히 대처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철학을 배우면 문이 열리지 않을 때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어? 이 문은 왜 안 열리지? 혹시 돌려서 여는 게 아닌가? 그러면 노크를 해봐야 하나? 어? 문이 잠겨있네. 창문은 없나?' 이런 식으로. 나는 불교에서 하는 선문답과 화두 풀이, 수행 등이 그 ‘돌려도 열리지 않는 문’을 미리 시뮬레이션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에게 ‘돌려도 열리지 않는 문’과 같은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야 제자가 삶을 살아가면서 진짜로 ‘돌려도 열리지 않는 문’과 같은 상황을 만났을 때 당황과 수치, 절망과 공포에 잠식되지 않고 적절히 대처해나갈 수 있을 테니까.


여기서부터 제자와 스승의 '목숨을 건 도약'이 시작된다. 스승은 문을 잠가버린다. 후설의 비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돌려도 열리지 않는 문’이 있는 곳이 그 사람이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곳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집에 안 쓰는 창고의 문이 잠겼다고 해서 우리는 당황하거나 공포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집의 대문이 잠긴다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살던 집의 대문이 잠겨버린다면 어떻겠는가? 후설은 그 전제조건을 빼먹었다. 반드시 열어야 할 문이 아니라면 우리는 문이 잠겨도 잠시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다. 진정한 고통은 집의 대문이 열리지 않을 때만 찾아올 테니까.


집에 문이 잠겼을 때 다른 집을 찾아갈 사람이라면 그 역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애초에 그 집은 그 사람에게 '집'이 아니었을 테다. 잠긴 문 앞에서 제자는 당황하고 수치심을 느끼며 절망하고 공포에 빠진다. 제자는 집 안에 스승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스승이 왜 문을 잠근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이게 집을 떠나라는 소리인지 아닌지, 스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닫혀버린 문을 사이에 두고 제자는 밖에서, 스승은 안에서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제자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고통을, 스승은 제자를 집밖에 홀로 두는 고통을 참는다. 그 고통의 시간 동안 둘은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구지 스님이 바로 손가락을 들지 않았다면, 동자승 역시 선방에 가서 피나는 손을 움켜쥐고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손가락을 자른 스승의 의중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까지. 스승도 마찬가지다. 스승도 동자승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동자승이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 동자승은 거대한 '판단 중지'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한다. 화두는 뚫는 것이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뚫는 것이다. 뚫는 곳이 보여서 뚫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뚫어야 하는 것이다. 화두를 뚫는 과정, 깨달음에 다다르는 과정은 애벌레에게 더듬이가 생기는 과정과 비슷하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으려고 이곳저곳 부딪치던 애벌레에게 어느 날 더듬이가 생긴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기에 더듬이가 생기는 게 아니라, 더듬이가 생겼을 때 어둠이 빛이 되는 것이다. 그 더듬이가 바로 구지스님의 ‘손가락’이자 '깨달음'이다. 어둠 속에서 헤메던 제자는 문이 뒤에 있었다는 걸 안다. 문을 열자 스승이 기다리고 있다. 고통의 시간을 보낸 두 사람에게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렇게 카지노 가입 쿠폰는 고통과 미소를 통해 전해진다. "귀가 여섯이어서는 도모할 수 없다(六耳不同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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