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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an 25. 2025

미혹迷惑 - 깨달음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다

『불교 철학사』(칼루파하나) 강독 후기

미혹하면 부처도 중생이고

카지노 게임 사이트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다.

무지하면 부처도 중생이고

지혜로우면 중생이 바로 부처이다.

마음이 거칠고 곧으면 부처도 중생이고

마음이 평등하고 곧으면 중생이 곧 부처이다.

거칠고 굽은 마음이 일어나면

부처도 중생 속으로 감추어져 버리지만

한 순간의 생각이 평등하고 곧으면

중생이 바로 부처 자신이다.

- 육조혜능六祖壇經


인문주의는 어디에 가닿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꽃피울 수 있는 것이구나. 카지노 게임 사이트은 어떤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늘 유동적인 것이며, 유동적인 것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구나.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상태는 근육과 비슷하다. 한번도 근육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근육을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근육을 만들어 근육이 붙었다고 해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은 다시 빠져나간다. 운동선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운동선수 중 의무적으로 했던 운동에 질려버려서 은퇴 후에 아예 운동에 손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 의무론에 시달려온 나는 그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평생 운동을 해온 사람이라도 운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 오래 되면 근육은 빠지게 마련이다. 근육이 빠지고 몸이 안 좋아지면 삶은 슬픔에 빠진다. 의무론에 시달렸던 운동선수들은 ‘운동’과 ‘의무’의 결을 쳐야 한다. 의무로서의 운동이 슬픔이었다고 해서 운동 자체를 부정해버리면 아무리 평생 운동을 해왔다 하더라도 근육은 빠지고 몸은 안 좋아진다. 그들은 운동 자체를 부정할 게 아니라 의무가 아닌 운동을 하는 법, 기쁜 마음으로 운동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슬픔과 연결되어 있던 운동을 기쁨으로 다시 연결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의무론에 고통받았던 나는 ‘의무’와 ‘기쁨’을 연결하는 수행을 계속 해야 한다.


평생을 열심히 운동해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고를 당하면 운동할 수 없다. 특히나 운동을 하다가 부상을 당한 경우라면 더욱 심하다. 몇달 전 레슬링 체육관에서 한 관원이 스파링을 하다가 어깨뼈가 으스러져 철심을 박는 부상을 당했다. 그 관원이 다시 운동, 그것도 격투기와 같은 격한 운동을 하는 데까지는 많은 수행이 필요할 것이다. 그 관원은 격투기를, 아니 운동 전반을 쉬게 될 가능성이 높고 아무리 그 관원이 지금까지 운동을 즐겨왔고 오래 해왔다고 해도 운동을 쉬는 시간이 오래 되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은 빠질 것이다. 그 관원이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다시 즐기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다짐이 필요할지 조금은 느껴진다. 그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결국 그 관원이 다시 튼튼한 몸이 되려면 그 무섭고 하기 싫은 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몸을 움직이고 단련하지 않으면 결국 카지노 게임 사이트은 빠질 테니까. 인생이 야박한 건 영원한 건 없기 때문이다.


유동적인 것이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의무에 시달려 운동이 싫어진 운동 선수, 부상을 당해 운동이 무서워진 관원이 마음 먹고 다시 운동을 시작한다면, 평생 운동을 안한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튼튼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다시 빠졌다고 해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머슬 메모리라는 것이 있다. 한번 생겼던 근육은 빠질 수 있지만, 다시 단련했을 때 훨씬 빠른 속도로 회복된다. 우리 몸이 한 번 그쪽으로 길을 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운동을 오래해왔던 사람은 어떻게 튼튼한 몸이 되는지 한번 해보아서 알기 때문에, 당연히 그 길을 처음가는 사람보다는 헛발질이 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또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은퇴한 운동선수 중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예전 몸으로 금방 돌아가지.” 그 말이 틀리지 않을 거다. 정말로 그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일반인들보다 훨씬 빠르게 튼튼한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사람은 결정적인 걸 모르고 있다. “나는 튼튼한 몸을 어떻게 만드는지 안다”는 바로 그 마음 때문에 그 사람은 지금 당장 튼튼한 몸을 만들 마음을 먹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공' 또한 '공'해야 하는 이유다. 튼튼한 몸은 지금 바로 이 순간 만들어야 한다.


내가 걸어온 길이 전부 잘못되었을 수는 없다. 운동을 해서 근육을 만들어보았다면 나는 근육을 만들어본 것이다. 지금 카지노 게임 사이트 빠졌다고 해도 그 경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전에 근육을 만들어보았다고 하여 그 카지노 게임 사이트 영원한 것은 아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은 다시 빠진다. 근육을 다시 붙이는 법을 ‘안다’고 해서 지금 내 몸이 튼튼해지는 것은 아니다. 근육을 다시 붙여야 다시 카지노 게임 사이트 생기는 것이다. 운동을 하고 카지노 게임 사이트 붙을 때 비로소 ‘튼튼한 몸’은 다시 잠재성이 실재성으로 가는 과정에 놓이는 것이다. 인문주의도 마찬가지다. 인문주의적인 실천을 행하고, 그 실천이 삶에 붙을 때, 비로소 다시 ‘인문주의적 삶’이 잠재성에서 실재성이 가는 과정에 놓이는 것이다. 그 과정 자체가 바로 인문주의다. 그래서 내가 멈추면 나의 인문주의도 멈추는 거다.


인문주의를 어딘가에 가닿아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보물섬처럼. 예전에 돈에 굉장히 집착했던 사람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에게 늘 말하고 싶었다. “저기, 돈은 뽑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 같은 게 아니야.“ 그런데 그의 돈에 대한 집착과 나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대한 집착이 뭐가 그리 다른가 싶다. 부처도 미혹되면 중생이 되는 것이고, 중생도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한 걸음에 있는 것이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하다가 질려버릴 수도 있고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운동이 지겹고 무서워질 수 있다. 하지만 결국 튼튼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운동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철학(수행, 인문주의)도 마찬가지다. 철학을 하다가 질려버릴 수도 있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철학이 지겹고 무서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지혜로운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철학과 수행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뗏목에 타고 있다면 멍 때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뗏목은 언젠가 사라질 거고, 거센 파도가 쳐서 내가 튕겨져 나갈 수도 있다. 그러니 뗏목에 타고 있을 때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물에 빠졌을 때는 허우적대지 말고 몸에 힘을 빼야 하는구나. 파도가 잔잔해지면 수영을 연마해서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구나. 섬에 다다르면 내가 뗏목을 만들 수도 있는 거구나. 아, 뗏목은 이렇게 만들고 이렇게 젓는 거구나. 나를 물에서 건져 뗏목에 태운 사람이 나를 왜 태웠는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 사람은 이 뗏목이 공하다는 것을 알고 나를 태운 것이다.


튼튼한 삶은 튼튼해질 행을 매일 행하는 삶이고, 지혜로운 삶은 지혜로워질 행을 매일 행하는 삶이다. 인문주의적 삶은 인문주의적인 행을 매일 행하는 삶이고, 불교적 삶은 불교적인 행을 매일 행하는 삶이다. 이 단순한 진실을 또 이렇게 다시 깨닫는다. 부처도 미혹되면 중생이고, 중생도 깨달으면 부처다. 불교는 매 순간에 피어나는 것. 절대적인 진리도, 가닿아야 할 보물섬도, 뽑으면 무적이 되는 엑스칼리버도 없다. ‘아, 알았다’라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도 유동적이다. 유동적인 것은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도 아니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은 근육이다. 근육이 많다고 자만할 것도, 근육이 많았는데 빠졌다고 좌절할 것도 없다. 오늘도 그냥 운동을 하면 된다. 그게 튼튼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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