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게임가 제아무리 국수 기계처럼 글을 죽죽 뽑아낸다 하더라도, 그 기술이 아직 쓰지 못하는 글이 있다. 그건 내 실제 이야기를 담은 글이다. 내가 아직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를 카지노 게임가 생성할 수는 없다.
물론 머지않은 미래에 내 일상을 모조리 실시간 학습해서 내가 들려 주지 않은 이야기까지 자동 생성하는 카지노 게임가 나올 것 같기는 하다. 예컨대 애플이 그런 카지노 게임를 만들 수 있겠다. 나는 회사에서는 맥북 앞에 앉고, 움직일 때는 애플와치를 끼고, 화장실에 휴지가 없을 때에도 아이폰은 손에 쥐고 있을 헤비 유저니까, 애플이 마음먹고* 수집하는 내 일상의 조각들은 그런 카지노 게임가 쓸 이야기의 기본 재료로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도대체 내 일상의 어떤 일이 특별했는지 결정하는 일은 카지노 게임의 몫이 아니라 내 몫이기 때문이다. 그 선별 작업까지 추천 알고리즘에 넘겨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내게 특별한 일이란 대개 애초부터 특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특별한 일은 오히려 개인적인, 상황 의존적인, (무)의식적인, 혹은 우연한 어떤 이유 때문에 그것을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바라보기 때문에 특별해진다.
만약 카지노 게임가 내게 중요한 이 모든 맥락까지 복제한다면, 그건 사실상 내 정신을 복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내게 너무 중요하기에 그렇게 복제되고 싶지 않다. 내 정신을 복제한 카지노 게임가 내 직업을 대체하는 건 어찌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삐 풀린 카지노 게임가 나 자신 그 자체를 대체해 버리는 상상은 끔찍하다. 그런 정신의 침해는 평생 내 정신을 몰카 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내 정신은 내 복잡한 사정 만으로 충분히 어수선하다. 역시 올해도 직접 내 이야기를 전부 쓰는 게 좋겠다.
카지노 게임에게 쓰기의 전부를 맡기는 게 아니라 일부만 맡기는 방법도 고려해 보았다. 예컨대, 글의 메시지는 내가 정하고 그 메시지의 디테일한 표현만 카지노 게임에게 시키는 것이다. 이 방법은 마감이 임박한 회사 보고서를 작성할 때나, 온라인에서 사람들을 제멋대로 가르치거나 혼내는 글을 쓸 때는 효과적일 것 같다. 카지노 게임는 그 일의 생산성을 확실히 높여 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이야기를 쓸 때만큼은 경제적인 인간이기를 잠시 그만두고 싶다. 사회 전체가 매년 더 높이 받드려는 효용이라는 큰 돌을 잠시 내려놓고, 내게 가장 귀한 내 존재 자체를 정확하고 충분하게 표현하는 말을 쓰고 싶다.
그런 말을 쓰고 싶다면,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걸 직접 쓸 수밖에 없다. 달리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게 정확하고 충분하게 느껴지는 말은, 말하고는 싶은데 아직은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구멍이 숭숭 난 마음과 생각에서 시작한다. 거기서 한 단어, 한 문장, 한 단락 씩 썼다 지우고, 써놓고 보니 뜻이 아리까리한 단어의 뜻을 찾아보고, 다시 제대로 고쳐 쓰고, 그래도 이 건 여전히 쓰레기라며 지우고, 또다시 컨트롤 V를 눌러 지운 걸 복원하는 사이에, 처음의 헐거운 마음과 생각들은 나도 모르게 적확한 말로 변신한다. 그건 마치 이 상점 저 상점 들어가 보고 이 옷 저 옷 입어보다가 내 몸에도 마음에도 꼭 맞는 옷을 결국에 찾는 경험과 비슷하다. 이 느낌이 평생 글을 손수 쓴 인간의 에고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 이야기를 그렇게 쓸 때 느껴지는 즐거움이다. 카지노 게임와 함께 더 빨리 더 손쉽게 쓰느라, 그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 글에는 내 주장과 빈약한 근거만 가득하고 내 이야기는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글은 카지노 게임가 이미 더 잘 쓸 테니 이제는 내 이야기를 쓰겠다.
올해 초 내 마음을 맹렬히 뒤흔든 어떤 만화를 읽었다. 그 만화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감정보다 이성이 인간을 만들고, 개인의 감정을 촌스럽고 오글거린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감정의 진정한 힘과 가치를 정면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만화의 글은 어설픈 감성팔이 없이 논리적으로 정교하고 뾰족했다. 그래서 몹시 아름다웠고 재밌었다.
훌륭한 작품을 읽으면 똑똑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을 읽고도 그랬다. 덕분에 쓰고 싶은 말이 생겼다. 카지노 게임가 어떤 글이든 인간보다 잘 쓴다고 쉽게 믿는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쓸 이유가 있다고. 그런 궁리를 하며 이 글을 썼다. 설득이 되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이 글을 손수 쓰는 동안은 무척 즐거웠다.
*:애플이 이렇게 마음을 먹더라도, 유저 동의 없이 데이터를 수집할 수는 없다. 애플이 선해서가 아니라,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애플의 모든 고객 데이터는 기술적으로 프라이버시 보호를 받는다. 내가 안다. 왜냐하면, 내가 애플에서 그런 기술을 구현하고 있기때문이다. 첨언 끝.
**: 이 글에 담긴 주장과 예측은모두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애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