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조그맣게 사는 굴뚝새처럼
사회에서 남성들이 가장많이 써먹는 말이 있다.누군가를 알아가려 한 테이블에서 상대한테 먼저 다가가는 말.
“몇년생이세요?”
“으음, 나는 그보다 두 살 위여요.”
믿거나 말거나 먼저 물어보는 쪽이 형 대우를 받으려고 한다. 배려나 베풂이 아닌 형님 소리 듣게 하려거나 대화 시 상대한테 무조건 이해해주려는 의도가 아닌 것이 포함돼있다.
여성도 사회에서 자존감을 내세우기 위해 몇년생이냐고 먼저 묻는다. 나이는 뭣 하러 물어봐. 가깝게 지낼 이유도 없고 네네 존댓말로 예우를 해주는데 예의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동안이어도 가늠하는 연령대가 있는데 대답 주는 나이보다 한 두살을 덧붙이거나 또래라고 해서그를 마주하게 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면서 내 주관만 가지면 된다.
요즘 사실 피곤하다. 정신적으로 곤하다.
ㅇㅁㅎ 교인들이 내 사무실에 성가시게 드나들고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려 든다. 끊이지 않는 본인의 종교관을 내게 쇠귀의 경 읽기로 전도하려는데 열 번이 아니라 백 번여도 넘어가지 않는데 귀찮음을 준다.
안먹힌다 싶으면 다른이를 동행해서
오는데이러다가 나는피하다가 지쳐서 소리 지르게 생겼다.
종교를 갖지 않았거나 인간의 도를 넘어선 사람이나 어려운지경에 놓인 사람을 전도 하지 않고 남의 사무실을 기웃하며 씨알이 먹히지 않는 포섭을 끈질기게 한다.
사람이 좋아보인다고 교제하려는 것은 착오다.
불필요한 관계는 정리하고 모임도 아니다 싶으면 빠져야 한다. 이타적이고 욕심을 갖고 접근하는 이들은 세상천지에 흔하다.
나의 귀한 시간을 허비해 가며 불필요한 관계를 맺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삶에 오물을 묻히게 하는 오버랩이다.
싫은 것은 아니다로 강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 선하게 보인다며 접근하는 이들에겐 대부분이 꿍꿍이를 가지고 가깝게 오려고 한다.
나에게 영양가가 없는 이들은 눈여겨보지 말고 피해 가는 게 상수다.
그들은 하나같이 셋을 이루었을 때 하나는 팽개치고 둘이 뭉치게 된다. 같은 식사 자리를 갖고도 아니다 싶으면 자리를 먼저 요구한쪽이 배반을 때린다.
쳐다보지 않았다가 컴컴한 시간에 연락해 오는 비겁한 이유의 접근은 낯간지럽다.
그들은 알맹이라 스스로 칭하고 같이 소통을 추구했던 이를 껍데기라 부른다.
구약에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칭했던 하나님 아버지이었는데,신약으로 성경 말씀이 거듭나면서 용서가 강구되는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 사랑을 전파하게 되는 부활절을 맞았다.
같이 음식을 나누며 마음의 자리를 가졌다고 해도 상대의 주관을 뺏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의 자유에 껍데기로 비유하며 도대체 무얼 채우라고 강요하는지 하나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이들은 먼저 본인의 언행을 살펴야 한다.
그래 알았어. 해놓고 시커먼 밤이 되려고 할 때의 연락 의도는 역시 검은색이다. 알맹이라며자칭 기만하는 이들은 껍데기라고 보았던 이의 감싸줌을 내친 것이 된다.
먼저 손을 내밀었으며 아니다 싶을 땐 바로 내친 자가 진짜 껍데기 아닌가.
뽀득여사 작가의 거울방에서 재우할배와 뽀득할매 그리고 삼각관계로갈뻔한 새미여사의 이야기는 셋이 친구 관계로 북을 마감시켰다.
세 사람이 가는 길에는 거의 한 사람이 사라지게 된다. 둘은 연애의 감정을 갖게 되고 하나는 내쳐진다. 그리고서 피하는 게 세상이다.
어제 비가 종일 내리는데 동태탕을 두 번 계산 받아서 환불받으러 간 자리도 그랬었다.
느닷없이 다른 이를 동행해서 오고 설득력이 먹히지 않아서 계산 먼저 하고 나올 땐 그러라고 냉정하더니 쳐다보기는커녕 인사도 없더니 늦게 어떻게 다시 시도한 것 같다. 느낌은 받았지만 인사를 하는데 식비가 두 번 계산된 것을 알게 됐다.이날 손님 좌석도 별로 없는데 두 번 값을 물게 한 식당도 문제다.
사람들의 이중성이 눈빛에서 먼저 나온다. 눈을 보면 상대의 마음 평수가 저절로 재진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대림절에 다들 한 번쯤은 각성해 볼 문제다.
껍데기의 참 의미는 무엇인가.
어머니들은 자식을 낳았으니 속의 많은 것을 내주지 않으셨던가. 그러면 세상의 어머니들은 껍데기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