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이 많아 슬픈 동물, 카지노 가입 쿠폰"
거의 모든 상담자는 열등감이 많다. 아니 열등감이 많은 이가 상담자가 되기를 꿈꾼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상담자는 뭔가 완성된 이가 자신의 훌륭한 인품과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기여하고 봉사하고자 활동하게 된 모습이 아니다. 소위 정신사업계의 어벤져스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상담자야말로 인간의 불완전성을 대변한다. 여기에 상담자의 역설이 있다.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하려는 의도를 갖고, 상담으로 어떤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담을 한다.
그렇게 상담자를 추동하는 것이 상담자가 경험하는 열등감이다. 여기에도 두 차원이 포개진다.
어떤 상담자들은 자신이 상담자로 서게 된 것이 자기의 열등감을 극복한 결과라고 말한다. 긴 방황의 시간과 불행했던 과거사를 극복하고 이제는 당당하게 자수성가를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묘사한다. 그렇게 어떤 상담자들은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한 소재로 상담을 활용한다.
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의도와 목적을 갖고 상담계에 들어서곤 한다. 상담은 이 경우 자신의 사회적 조건들에 좌절 및 결핍을 경험하며 스스로를 보잘 것 없게 생각해오던 이가 마법의 신분상승을 꿈꿀 수 있는 일확천금의 소재 같은 것이 된다. 미러링이니 소인격이니 언어적 모델링이니 말은 어려워보이지만 그 내용은 초등학교 산수 같은 몇 가지의 개념만 익히면 자신도 상담자로 활동하는 일이 가능할 법하다. 이러한 이들은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상담이라는 일 자체를 저질스럽게 몰락시키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그러나 또 어떤 상담자들은 -이쪽이 다수일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믿고 싶은-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열등감 자체를 인정한 뒤 자신이 열등감을 경험하게 된 상황에 대해 정말로 이해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정확하게, 참여하는 과학자의 입장이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그 의미를 밝혀낸다. 그리고 그 의미는 같은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인간을 지향한다.
자기만 열등감에 시달린다고 경험하는 것은 자폐적으로 열등감에 갇힌 상황과도 같다. 그렇지 않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이다. 내 마음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알게 된다. 내가 열등감을 경험하고 있다면 지금 무수한 사람들이 함께 동질의 열등감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함께 고통받고 있는 것이지, 자신만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직한 상담자들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통해, 열등감으로 고통받는 그 모든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낸다. 상담자는 누구보다 불완전하기에, 불완전한 이 모든 사태, 이 모든 유한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그것은 거의 신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가끔은 도취되어서도 말하고 싶은데, 그렇다면 이런 말이 나올 것이다. 신께서는, 신이 계시지 않는 곳에 대신 상담자를 보냈다고.
이것은 상담자가 전지전능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기독교의 신화에서 가장 무능한 모습으로 신께서 자기의 아들을 보내셨듯이, 그럼으로써 세상에 태어나 늘 속상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 그 자체의 마음이 이 우주에서 가장 이해받을 수 있도록 하셨듯이, 상담자의 눈도 그렇게 열리게 된다는 의미다.
열등감으로 돌아가 상담자의 눈을 통해 다시 한 번 들여다봐보자.
상담자는 자기 자신이 끝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열등감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상담자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는 인간의 행복조건도 비교에 달려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누구라도 열등감을 경험하는 일은 필연일 것이다.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던 결과 열등감이 만들어졌다는 이 사실에 상담자는 이내 도달한다. 남들보다 잘난 행복을 얻으려 했기에 남들보다 못난 것 같은 열등감을 얻게 된 것이다. 비교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바로 이 일이 일어나고 있다. 행복조건을 달성하려 할수록 오히려 더 열등감만 쌓여간다. 이것은 되지 않는 구조다.
상담자는 이제 자신이 현재 어떤 것을 놓치고 있는가를 투명하게 이해해보려 한다.
분명하다. 현재의 마음을 살지 않았다.
비교의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의 마음을 자꾸 버리고만 있었다. 앞에 존재하는 것을 보지 않고 저 멀리 있는 가상의 것만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니 현재는 늘 충족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느 때라도 내적인 충만감을 경험할 수 없으니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행복이 부재하니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바로 열등감이었다. 상담자는 거의 도착한 것이다.
즉시 내 마음을 살면 되겠구나, 그의 눈에는 분명 새로운 영토가 비추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곧바로 살면서 충만해지는 이에게는 열등감이 자리잡을 구석이 없다. 그의 행복은 더는 상대적인 비교의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 그에게는 언제라도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힘이 있는 곳에는 환상이 없으며, 자신이 열등한 존재라는 환상은 간 곳 없이 사라진다.
이제 상담자는 위대한 이 힘이 자신을 포함한 인간 모두에게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그가 눈을 뜨고 새로이 보게 된 지구의 모습은 정말로 푸른 별이었다. 희망의 빛으로 넘실거린다. 신의 창으로 엿본 풍경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담자는 조금 슬퍼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열등감 때문이다. 상담자는 열등감이 너무 많아서 슬프다. 조금도 열등하지 않은 우리 인간동료들이 자신이 열등한 줄로만 알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며 아파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많아서 상담자는 슬퍼진다.
상담자는 정말로 열등감이 많다. 그것은 그의 성질이 섬세해서 이 세상에 가득한 열등감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그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착각했던 적도 많다. 자기만 과도하게 예민해서 남들처럼 선량하고 무던하게 살 수 없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 그는 다만 고유하고 온전한 그 자신이었을 뿐이다.
상담자가 이처럼 '마음의 과학'을 통해 밝혀내게 된 진리는 바로 이 사실이며, 이 진리는 보편적 위상으로 모든 인간을 향한다. 누구다 다 고유하고 온전한, 아무 잘못없이 그 자체로 귀한 존재다. 형형색색 각기 다른 모습으로도 동일한 이 존재의 위상을 갖고 그 모든 개인들은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열등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나였을 뿐이다. 열등감이 많은 것이 아니라 더욱 나였을 뿐일 것이다.
열등감을 극복한다고? 내가 나라는 사실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나는 나를 이해할 필요만 있다.
상대적인 비교의 세상 속에서 극복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다른 비교우위적인 어떤 소재로 바꾸려 하는, 바로 그 자신에게 가하는 투박한 폭력 대신에, 나는 나를 향하고 있는 내 마음만을 정성스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껏 나를 막 대해왔던 현실이 비로소 이해됨으로써 큰 슬픔으로 다가올 때, 그것은 나와 같은 운명을 살아가고 있던 인간 모두의 속상한 현실을 향한 슬픔이 된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해 경험하던 무수한 아픔에 슬퍼할 수 있는 동물이 이제 이 행성 위에 출현한 것이다.
자신이 불완전하기에 불완전함을 사랑할 수 있는 온전한 동물, 이 동물의 이름을 인간이라고 부른다. 상담자를 꿈꾼다는 것은 언제나 이 인간을 꿈꾼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