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오컬트"
깨달음은 오컬트인가?
오컬트(occult)의 뜻은 '숨겨진 것'이다. 그 뜻에 비추어보자면 깨달음은 전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니 오컬트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차원에서 깨달음이라는 언어의 주된 소비는 오컬트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야 할 카지노 가입 쿠폰다.
우리는 마이클 셔머의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로 대표되는 회의주의(Skeptic)의 목소리를 보다 중요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현대에 번창하는 오컬트 산업의 실체를 해부한다. 초능력, 외계인, 점성술, 고대의 지혜, 신비주의, 음모론, 사후세계, 유령, 예언, 이런 것들과 깨달음이 소비되는 방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신화를 잃은 현대인들이 과거의 신화를 대신해 새롭게 만들어낸 신화들이다.
종교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이 신화를 소비하고자 하는 주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모든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을 힘을 추구하려는 습성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신화는 힘의 획득을 위한 대표적인 도구로 개발되었다.
신화의 핵심적 특징을 살펴보면, 신화는 언제나 미지성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벼락이 쳐서 숲이 불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신화는 제우스가 노해서 이러한 일이 생겼다며 상황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그 설명을 듣고는 어떤 불확정적이고 불안한 우주로부터 해방되어 분명한 질서가 자리잡고 있는 안전한 우주로 이동된 것 같은 안도감을 경험한다.
그 설명이 가상의 소설이라고 해도 좋다. 사람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상황에 대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듯한 모종의 질서와 관련된 앎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이 어떠한 지성적 통제감을 얻은 것처럼 경험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하나의 신화로서 기능하는 카지노 가입 쿠폰다.
이처럼 신화는 우주를 통제할 수 있는 '지성의 힘'이 인간에게 담보된 것처럼 연출하려는 의도로 발명되었다. 그 힘은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이면에 담긴 '숨겨진 진리'를 알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숨겨진 힘'이다. 즉, 오컬트다.
현대에 들어와 오컬트 산업의 소비가 활발해진 이유는 그만큼 현대인들이 심리적으로 두려움에 더욱 취약해진 까닭이라고 말할 수 있을 카지노 가입 쿠폰다. 이것은 문명의 반작용이다. 문명은 언어로 쌓아올린 아주 거대한 가상현실과도 같다. 이 가상현실은 죽음의 냄새를 은폐함으로써만 발전되고 확장될 수 있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득이 있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가상현실에 힘과 자원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는 고전적으로 숲과 마을의 비유로 읽힌다. 숲은 혼돈으로 가득한 디오니소스가 관장하는 영역, 마을은 질서의 신인 아폴론이 관장하는 영역이다. 마을은 숲의 미지성을 성공적으로 통제해낸 결과로 점차 확장되어 간다. 문명의 발전이란 언어로 부여한 임의적 질서가 어떻게 세상의 혼돈을 정복해나가는가의 그 영웅서사라고도 할 수 있다.
언어를 무기로 든 영웅이 죽음을 극복하고 꿈의 유토피아를 만들어가는 그 과정에는 역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역사는 언어적으로 보다 믿을 만하다고 권장되는 신화다. 이 역사라는 것은 이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자기도취 속에 빠져들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이로써 자연에 대한 신화[역사]의, 바로 실제현실에 대한 가상현실의 우위가 명백하게 선포되었다.
문명은 신화의 반대편에 있던 것이 아니라, 문명화야말로 바로 신화화였던 카지노 가입 쿠폰다.
니체는 이 가상현실의 승리를 조작하고 획책하는 기만극에 아주 염증을 느낀 인물이다. 그가 디오니소스의 복권을 주장하면서 회복하고자 한 것은 인간의 생명성이다. 자신의 삶 자체를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삶의 활력 그 자체다. 이것이야말로 두려움에 의해 야기된 문명에 대한 강박 속에서 인간이 정말로 상실하고 만 것, 바로 이것을 상실했기에 인간은 두려움에 취약해지게 된 카지노 가입 쿠폰다.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없었기에 죽음은 더욱 두려워지고 만 카지노 가입 쿠폰다.
뒤이어 하이데거는 아예 죽음, 비존재, 무 등과 같이 문명이 은폐하려 했던 소재들을 직접 가지고 와 존재론을 구성한다. 그가 특별히 죽음애호가였던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도 결국 삶이다. 어떻게 인간은 존재가 개시하는 이 삶의 모험에 아름답게 동반할 수 있는가, 바로 그러한 입장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자리를 마련하려 했다. 바로 인간 자신의 삶 위에.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대립을 눈치챌 수 있을 카지노 가입 쿠폰다. 실상은 대립이 아니었지만, 두려움에 너무나 압도되어 있던 인간은 이를 대립처럼 만들게 되었고, 임의적으로 대립의 승자를 규정하려 해왔다. 그 억지스러운 행위가 실은 인간에게 더 큰 고통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앎 대 삶.
인간은 자신의 앎을 들고 자신의 삶에 싸움을 걸어왔던 카지노 가입 쿠폰다.
자신의 앎으로 자신의 삶을 정복하는 그 일이 바로 자신이 힘있는 존재가 되는 길이라고 믿으며.
현대의 심리상담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앎에 의해 억압받아 고통을 경험하게 된 인간의 삶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이 심리상담의 총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은 심리상담은 깨달음의 과정과 그 방향성을 공유한다. 신학자 틸리히와 인본주의상담자 로저스가 나눈 종교와 심리상담의 대화에서도, 또 에리히 프롬과 스즈키 선사가 함께 집필한 『선(禪)과 정신분석』에서도 종교적 길과 심리상담의 길이 얼마나 유사한지에 대해 거듭 얘기한다.
그 길은 바로 개인의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길이다. 그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생명성으로, 미지의 삶으로 개인이 눈을 돌리도록 안내하고 있는 길이다.
깨달음은 절대적으로 삶과 관련된 현상이다.
삶 앞에 앎이 설 수 없다. 이것은 실존주의 선언이다. 동시에 선(禪)의 핵심종지다.
어떤 위대한 앎을 통해 삶을 평화롭게 다스리거나, 삶을 통합해내거나, 삶의 길을 인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것이 바로 신화의 방식, 곧 오컬트의 방식이다. 오컬트도 물론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을 카지노 가입 쿠폰다. 그러나 그 회복은 삶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 위대한 앎이 더 열등한 삶을 굽어 살펴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가장 큰 폭력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컬트적 사유 속에 있는 이들은 아주 빈번하게 인간의 몸을 무시하고 하대한다. 자신의 위대한 정신 또는 영혼이 육체라는 비루한 감옥에 구속되어 있는 것처럼 판타지소설의 설정을 이루곤 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나는 육신에 갇힌 것이 아니라, 기꺼이 이 육신이 된 카지노 가입 쿠폰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비유하는 육화의 의미다.
왜 육화했는가?
살고 싶어서다.
이 삶이라고 하는 것을 가장 충만하게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사랑스러운 것으로서 이 삶을 노래하고 또 노래하고 싶었던 연유다.
몸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삶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언제나 몸을 산다는 카지노 가입 쿠폰다.
느낌이라는 핵심적인 몸의 작용이 있다. 마음의 가장 실천적이며 일상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곧 느낀다는 카지노 가입 쿠폰다. 자신의 몸을 느끼는 것이며,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삶을 느끼는 카지노 가입 쿠폰다.
스즈키 선사는 선(禪)이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너무나 분명하게 말했다.
"선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 몸이라는 것, 또 느낌이라는 것은 어디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인가? 무의식의 비밀 같은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무 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이미 전부 다 드러나 있다.
느끼며 사는 일이 전부라고, 그게 깨달아 사는 일이고, 곧 나로 사는 일이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게 대답할 카지노 가입 쿠폰다. 어떻게 해야 깨닫는지를 묻는 물음 앞에서도 그 대답은 같다. 정직하게 느끼는 일이 눈을 뜨게 한다고, 그렇게 대답할 카지노 가입 쿠폰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풀어쓰면 이렇다.
우리는 몸이 있기에 깨달을 수 있다.
몸이 없다면 깨달음도 없다.
몸이야말로 우리의 온전한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저 유명한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몸을 가진 카지노 가입 쿠폰 아닙니다. 내가 바로 몸입니다(I don't have a body, I am a body)."
진실로 아무 것도 우리에게서 숨겨져 있지 않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숨긴 것은 우리다.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숨겼다. 두렵지 않은 척, 두려움을 통제하고 극복할 수 있는 척, 앎의 맹신 속에 우리의 두려움을 숨겼다.
그렇게'숨겨진두려움'에대해'숨겨진진리'를찾아내어'숨겨진힘'을얻겠다며오컬트의소비에매진하게되었다. 가장숨겨져있지않은깨달음조차오컬트의소재로바꾸어소비하게되었다. 나만아는숨겨진주식정보처럼, 나만아는숨겨진게임메뉴얼처럼, 나만아는숨겨진어떤특별한정보자원처럼, 깨달음이라고하는것을다루게된카지노 가입 쿠폰다.
신화가 소비되는 방식, 소설이 소비되는 방식, SNS의 이미지가 소비되는 방식으로, 오늘날 오컬트화된 깨달음은 더 큰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일에 일조하고 있다. 그리고 정직하게 떠올려보면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을 구성하는 것은 게임 속에서 우리 자신이 쌓아온 레벨과 장비를 잃을 것에 대한 그 걱정이었다. 곧, 가상현실 속에 사는 지성적 정신체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만큼 우리는 두려워졌던 카지노 가입 쿠폰다.
이처럼 실제의 몸이 없는 가상현실 속에서 우리는 더욱 안전하게 된 카지노 가입 쿠폰 아니라, 실은 가상현실 때문에 더욱 두려워졌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제적인 몸을 망각하거나 상실하고 사는 만큼, 또 망각과 상실의 형태로 우리의 몸을 통제하려 시도해온 만큼, 우리는 두려워진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당연하다. 애초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하면 반작용은 더 크게 일어나며, 우리는 더욱 무력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뿌리깊은 혐오가 있다.
오컬트, 그것은 몸에 대한 아주 강한 혐오에서 비롯한 카지노 가입 쿠폰다.
혐오가 근거한 자리는 좌절이다. 좌절의 소재가 곧 혐오의 소재가 된다. 이성에게 거절당해 좌절한 이가 이성을 혐오하게 되는 것과 같다.
자신의 몸에 좌절했기에 그 몸을 혐오하게 된 반동의 결과로 깨달음을 추구하게 된 이들의 수는 상상 이상으로 많다. 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도 거기에 위치했다. 혐오와 원망으로 일그러진 어떤 정신승리적 회피책을 위해 종교가 기능한다는 카지노 가입 쿠폰다.
자신의 몸에 좌절한 이가 대신 자신의 지성으로 그 좌절을 보상하려는 일은 지배적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우회다. 오컬트는 이 우회의 기제다. 몸의 삶에 좌절한 까닭에, 몸을 우회해서 초월한 척하기 위해 어느 깊은 곳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다고 하는 정신의 앎을 추구하게 되어버린 카지노 가입 쿠폰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오컬트에는 숨겨진 어떤 진리의 앎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에게 중요한 어떤 마음을 숨기고자 한 것이 오컬트다. 심리적으로 매우 불건강한 억압의 상태다. 이런 것을 영적 우회라고도 부르며, 켄 윌버와 같은 이의 표현으로는 전초오류라고도 부를 카지노 가입 쿠폰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회피하고 있기에 생겨나는 일이다.
정직하게, 자신이 숨겼던 마음으로 돌아가보자.
혐오와 좌절을 발생시킨 그 두려움,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는가?
몸이 그토록 두려웠는가? 무력하고 약한 자신의 몸이 그렇게 떨고 있었는가?
표현 그대로다. 느낌 그대로다.
몸을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몸이 두려워하고 있던 카지노 가입 쿠폰다.
소중한 이 몸을 잃을까봐.
소중한 이 삶을 잃을까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다 우리가 이 몸으로 살아가는 이 삶을 실은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내주는 자기증명이다.
그토록 사랑해서 이 몸이 된 것이기에, 이 몸이 잃어질 것 같은 두려움은 그 사랑의 크기를 다시 상기하게 만든다. 두려움의 크기는 정확하게 사랑의 크기다.
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그 크기로 우리 자신의 삶을 사랑했던 카지노 가입 쿠폰었나?
그 크기가 훅 다가와 우리 자신의 크기로 실감되는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그 사랑은, 결코 어디에도 숨겨져 있지 않았다. 우리 자신의 생동하는 몸으로 처음부터 이미 다 드러나 있었다. 그런 것이 우리의 삶이었다. 몸이 있기에, 삶이 있기에, 깨달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