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재미"
깨달음을 사는 이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표현으로 대개 이러한 감상을 자아낸다.
"병신같지만 멋있어."
다 좀 또라이들 같은데 그 삶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한 매력이 넘친다. 그 매력은 위악적이거나 키치한 특질과는 전혀 다르다. 뭔가 대담하고, 웅대하며, 그러면서도 아주 섬세한 질감이 삶의 곳곳에 묻어난다. 깃털과도 같은. 아니 오히려 어떤 날갯짓과 같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미답의 영역으로 경쾌히 활공해가는 아름다운 존재의 궤적을 보는 느낌이다.
그런 율동을 보면 우리에게 이내 찾아드는 것은 분명한 재미의 감각이다.
깨달음을 사는 이들은 지금 어떤 시연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깨우쳐주기 위한 계몽활동을 펼치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을 가르치기 위한 선생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사는 일이 재미있어서 그렇게 산다.
재미, 그것이야말로 자유의 징조다. 자유의 실현이며, 자유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필연의 선물이다.
사는 일이 재미있다니 도무지 믿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우리가 원하던 바로 그 삶의 모습이 아니던가.
사람들은 깨달음을 사는 이를 대체적으로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미지의 풍요로운 지식자원을 공급하고 있어서라든가, 친절한 선생이어서라든가, 또는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지켜줄 것 같은 슈퍼히어로처럼 행위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의 곁에 있으면 자신에게도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다. 자신의 삶도 재미있어질 것 같아서다. 그런 직감이 있다. 그리고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재미의 수원지, 이렇게 표현해보자.
솟아오르는 샘물은 숲속 동물들의 목을 축여주기 위해 샘솟지 않는다. 그냥 샘솟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스스로 일어나는 운동의 결과로 숲속 동물들은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게도 된다. 이와 같다. 깨달음을 사는 이들은 남들을 재미있게 해주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자신이 그저 재미있게 산 결과로 주위의 사람들도 재미의 수혜를 함께 입게 된다.
이 재미의 정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재미는 자유의 향기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자유는 존재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존재가 존재하는 그 표현이 자유다. 존재한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경험할 때 우리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대표적인 경우는, 생각으로 살고 있을 때다. 생각을 앞세운 뒤, 그 생각에 자신의 삶을 연극처럼 끼워맞추고 사는 모습이다. 모종의 이념을 좇아 사는 일도 동일한 경우다. 이런 것을 지성주의의 저주라고도 부른다. 저주에 걸려 몸을 잃고 유령과 같은 지성적 정신체가 되어버린 모습과도 같다.
놀랍게도 우리가 이 추상적인 정신체가 되기를 꿈꾼 것은 그렇게 되면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마치 어린 시절 몸이 없는 투명인간이 되면 몰래 여탕에 들어가는 재미를 느끼게 되리라고 공상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몸이 없다면 제약없이 어디에도 갈 수 있고, 에버랜드에도 입장권 없이 들어갈 수 있으며, 특히 자신보다 싸움을 잘하는 못된 애들을 일방적으로 혼내주고 다니는 짜릿한 특혜의 재미 또한 얻을 수 있으리라 미숙한 시절의 우리는 기대했다.
우리는 몰랐던 카지노 가입 쿠폰다.
지성이 명령체계라는 것을.
그리고 몸이야말로 그 무수한 명령어들의 압제로부터 우리가 숨쉴 수 있게 지켜주던 자유의 근거였다는 사실을.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지성으로부터 나온 생각이 명령한다.
"책상에 앉아 어서 빨리 자기계발을 하도록 해."
아, 그런데 몸이 무겁다. 춥고 떨린다. 몸살기운이 있다. 따듯하고 포근한 게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이불을 더욱 동그랗게 말아 밀착시키고 그 아늑한 공간에 담긴 온기를 보다 충만하게 느낀다. 태어나서 왠지 잘한 것 같다. 좋고 행복하다. 침대는 나만의 비밀기지. 이불은 무적의 방어막.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다 나를 위해 최대치로 기능한다. 세상이 다 내 편이다. 이런 감각이 무척이나 재미있게 느껴져서 웃음짓는다.
지구는 지금 푸른 별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에게 한참이나 친절한.
그 온화한 생기가 푸르게 넘실거린다. 살 만한 행성이다. 내가 터할 나의 집이다.
몸이 펼쳐낸 아주 멋진 현실이다. 나를 위해 가장 좋은 현실을 몸이 창조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을 창조하는 일이 지혜다. 지혜는 지성의 것이 아니라 몸의 것이다. 근본을 살펴보자. 지성은 그저 몸이 쓰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지성을 활용해 몸은 더욱 편안한 현실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장의 역전이 일어났다. 몸의 도구인 지성이 반역을 일으켜 오히려 몸의 위에 군림하기 시작하더니, 나아가서는 몸을 도구로 삼아 오히려 몸이 자꾸만 불편하게 되는 현실을 만들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런 것이 더 위대하고 성공적인 삶이라면서.
인간이 쓰던 도구가 역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된 이 상황을 우리는 '인간소외'라고 부른다. 재미를 느끼는 주인공인 인간이 잃어졌는데, 이런 삶 따위 재미있을리가 만무하다. 아무리 지성이 만든 재미의 소재가 널려 있다 해도 그걸 느낄 인간이 파멸해있다. 불감증의 상황이란 이런 것이다.
깨달음 얘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깨달음은 어떤 물건이냐면, 인간이 재미있게 사는 일에 쓰는 것이다. 그게 깨달음을 산다는 의미다.
지성의 소재로 깨달음을 착각한다면, 그러한 깨달음은 오히려 삶 위에 군림해 삶을 억압하는 결과를 빚어낸다. 어떻게 해야 더 올바르고, 선하며, 진정하게 늘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명령체계로만 기능할 뿐이다.
우리는 깨닫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위해 깨달음이 있는 카지노 가입 쿠폰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잃어 많이 아프고 속상할 때 그 삶을 회복하고자 깨달음은 발명되었다.
자기 자신으로서 재미있게 살고 있는 이에게는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없다. 이미 있어서다. 알아차림, 자각, 마음챙김, 이런 것들도 필요없다. 우리는 하루 종일 그런 것들이나 하고 살려고 이 삶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의 재미를 누리고자 이 세상에 왔다.
곧, 이 살아있는 몸으로 사는 재미를 온전히 만끽하고자 이 푸른 생명의 별에 태어나있다.
지성은 치맛바람이 센 엄마와 흡사하다. 완전히 틀린 비유는 아닌 것이, 지성은 결국 자신이 모방으로 학습한 그 내용을 반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지성이 명령체계로 발화하는 생각으로 사는 이는 그래서 늘 잔소리하는 엄마를 머리 위에 올리고 사는 것과 같다. 자신을 위해 기능한다고 믿었던 생각이 이제는 자신을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 떠올려보면 이것도 사실에 가깝다. 우리를 두렵게 한 것은 실제의 그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 겁을 주던 엄마의 위협어린 표정이었다.
결국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양육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과도 같을 카지노 가입 쿠폰다.
그런데 이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또한 상기해보건대 우리는 매우 자연스럽게 이 일을 해왔다.
우리의 몸이 집밖으로, 놀이터를 향해, 동산을 향해, 친구를 향해, 이미 신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몸은 직감한다. 몸은 영감의 원천이다. 창조적 느낌체다.
어디에 가야 자신이 가장 재미있을지를, 가장 자유롭게 피어나고, 또 가장 온전하게 존재할지를 몸은 이미 다 직감한다. 자신이 어떤 것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몸이 느끼고 있는 그 사실에만 정직하면 된다.
물론 지성은 몸을 신뢰하면 안된다고 명령한다. 두려움을 조장한다. 몸을 그냥 자연스럽게 두면 반드시 몸은 악의 길로 타락하게 될 것이라면서.
그러나 몸은 악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몸이 바라는 것은 언제나 단 하나 자유뿐이다.
이를테면 여러 중독재들에 대해 이해해보자. 몸은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원해서 중독되지 않는다. 반대로 지성의 강압적 명령들에 지친 몸이 그러한 소재들을 소비하면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반동으로 중독에 빠져든다. 직장생활을 억지로 참고 버티며 살아가는 이가 술을 마시며 해방감을 경험하는 일과 같다. 지성이 억압하고 있기에 몸은 그 반동을 드러낼 뿐, 가만히 둘 때 몸은 오히려 자신이 속박될 수 있는 중독현상과 멀어진다. 말했듯이, 몸이 바라는 것은 언제나 자유일 뿐이기 때문이다.
몸을가만히두어본이는오히려어떤멋진일이일어나는지를잘알고있다.
인간이 자유로울 때는 반드시 이 일이 일어난다.
몸은 노래하기 시작한다.
아니, 처음부터 노래였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도 이 세상에 온 설렘으로 떨리는 존재들. 우리는 설렘의 울림이다.
자신이 이미 이처럼 노래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 이는 이제 더욱 울리기 시작한다. 목소리를 울리고, 공간을 울리고, 자기 자신을 울린다.
나는 표현되고 있다. 아니, 나를 표현하고 있다.
나로 존재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그 설렘의 느낌을 살려 나를 표현하고 누리는 이 존재의 일로부터 창조의 시간이 시작되며, 이제 삶에는 재미가 찾아든다.
나의 말을 하는 재미, 나의 노래를 부르는 재미, 나의 삶을 사는 재미.
모든 것을 나의 눈으로 새롭게 다시 보며, 처음으로 본다. 모든 것을 나의 말로 새롭게 다시 말하며, 처음으로 말한다. 나는 새롭게 다시 나인 카지노 가입 쿠폰며, 처음으로 나인 카지노 가입 쿠폰다. 미답의 영역. 설렘이 잡아끈다. 몸이 달려나간다. 삶이 전개된다. 나는 푸른 별을 횡단하는 노래소리. 나는 자유였다.
지구에서 사는 일은 이렇게도 재미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는 일이 재미있으면 우리는 깨달음을 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