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가을 부마항쟁을 진압할 때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 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확대되었을 당시, 군은 거리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인도적 이유로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 납탄을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소년이 온다 p206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 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카지노 게임 사이트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 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소년이 온다117p
6.10항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 중이던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는 모습이 로이터통신 사진기자에 의해 촬영되었다. 이 사진이 신문에 보도된 다음 날부터 대학에는 대형 걸개그림이 걸렸고, 시위 학생들은 이 사진을 손수건, 스카프등으로 제작하여 국민에게 배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사진은 군사독재 정권에 종지부를 찍도록 촉매제 역할을 한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