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시위와 미중 패권 경쟁을 보는 카지노 게임의 시선
2014년 민주주의 연구자로서 홍콩에 직접 가 우산혁명 현장을 취재했던 나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던 가을·겨울 중국 본토에 있었다. 시위 초반, 중국 본토에선 관련 보도가 전혀 없었다. 11월 폭력 사태가 확대되면서 홍콩 접경 지역에 중국 인민해방군 병력이 집결했고, 언제 무력 진압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즈음 시진핑 주석이 공개적으로 상황의 엄중함을 언급하며 폭력 중단을 촉구하는 발언을 했다. 시위대에 최후통첩을 보낸 것이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 중국 본토의 평범한 시민들은 이때야 비로소 홍콩 상황을 인지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외국인이 민감한 정치 현안을 중국인에게 물어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특히 중앙정부에서 멀리 있는 서부 소수민족 집거지를 다니면서 이런 소식으로 지역 주민을 들쑤시는 것은 여차하면 반체제 인사로 오해받기 쉽다. 다만 현지에서 만난 중국인들이 먼저 이 얘기를 꺼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홍콩 사태를 바라보는 중국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중국인은 홍콩 시위를 모르거나 관심이 없었다. 뉴스를 통해 상황을 인지한 사람들은 이 사태를 미중 무역전쟁 국면에서 미국의 사주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보도 기조는 중국 정부의 상황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여기다 시위대가 중국 정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홍콩 독립’까지 외치면서, 타협점을 찾기 힘든 극단의 싸움이 되었다. 상황을 신중하게 바라보는 젊은 중국인도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서운함이 있는 듯 보였다.
“홍콩이 지금껏 발전한 데는 그 뒤에 중국이 있었기 때문이죠. 홍콩 사람들도 부인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 중국으로부터 받은 혜택은 생각하지 않고, 나쁜 점만 얘기하면서 독립까지 외치다니. 이건 너무 이중적이잖아요.”
서운함을 넘어 싸늘하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우리에겐 선전(深圳, 심천)이 있어요.”
홍콩과 인접한 선전은 1980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본토에서 가장 먼저 경제특구로 지정된 도시다. 이후 비약적 발전을 거듭해 이미 1인당 GDP가 홍콩을 넘어섰다. 신기술·디지털 기업들이 몰려들면서 매일 젊은 부자가 탄생하는 ‘중국의 실리콘밸리’다. 이런 선전이 금융도시로 더욱 성장해 홍콩의 기능을 대체하게 된다면, 홍콩의 위상과 입지 또한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이미 중국 정부는 선전을 ‘중국 특색 사회주의 선행 시범구’로 지정하고 2050년까지 글로벌 금융 비즈니스 도시로 육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일국양제 모범생’ 마카오에도 증권거래소 개설을 허용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온다. 이대로라면 글로벌 금융기관의 홍콩 탈출, 헥시트(HK+Exit)가 현실화될 날도 멀지 않은 듯 보인다. 2010년대 들어 홍콩에서 거듭된 반정부 시위는 단순히 정치체제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아시아의 금융허브’였던 홍콩의 경제적 위상 하락으로 인한 위기감이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분석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진보 진영과 시민사회, 촛불시민은 지난 수년 간 민주화 시위를 이어온 홍콩 시민들에게 응원과 지지를 보내왔다. 홍콩 시위 현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우산혁명의 주역이 "오늘 홍콩은 39년 전 광주"라며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홍콩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을 때, 으쓱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홍콩의 조슈아 웡은 한국의 과거에서 동질감을 느꼈다지만, 나는 홍콩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가늠해보고 싶었다.
오랜 분단으로 이미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갖게 된 두 집단, 특히 이질적 정치 체제를 가진 두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게 되었을 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가 내가 주목하는 지점이다. 막상 일국양제 수준의 통합이 이뤄지고 인적 물적 교류를 가로막던 장막이 사라진다면, 그 때의 남북은 과연 「사랑의 불시착」 속 남녀 주인공처럼 애틋하기만 할 것인가? 우리는 중국-홍콩의 선행 사례를 보며,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없을까?
20대 후반에 내가 이직한 회사는 막 워크아웃을 졸업하고 매각된 기업이었다. 입사 후 며칠 지나지 않아 회사명이 바뀌었다. 해체된 모그룹 이름 대신 인수한 그룹명이 붙었다. 몇 주 후에는 새 모기업 본사 건물로 사무실을 이사하게 되었다. 홍보실에서 내가 했던 일 중 상당 부분은 기업 문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전환기에 새로운 경영 방침을 전파하고 우리가 가진 저력을 재발굴해 자긍심을 높이면서도, 회사 구성원에게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혁신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일이다. 특히 중공업과 소비재라는 전혀 다른 전통을 가진 모기업의 이질적 기업 문화, 그 간극을 매우고 연착륙 시키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기업의 인수합병(M&A) 성공을 결정짓는 것은 서류에 사인하기까지의 협상이 아니다. M&A 성사 이후 PMI(Post Merger Integration), 즉 합병 후 통합 관리다. 세계적 기업들도 대형 M&A 이후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수년 만에 회사를 다시 매각하는 실패를 한다. 무리한 인수로 인한 재무 부담과 피인수 기업의 실적 부진으로 유동성 위기에 몰리며 ‘승자의 저주’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M&A 실패는 피인수 회사에 대한 이해 부족, 효과적 커뮤니케이션 부재, 문화적 충돌 등에 기인한다.
정치와 경제의 원리를 마구 뒤섞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경영학을 조직에 대한 경험적 기술로 이해한다면 PMI의 중요성은 남북문제에서도 결코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PMI의 실패는 기업의 M&A 실패보다 더 파국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이런 고민 때문에 나는 홍콩 사태에서 무력 진압과 인권 탄압을 규탄하면서도 화끈하게 어느 한 쪽 편을 들며 ‘치킨 게임’ 구경하듯 할 수 없었다.
윈난에서 만난 항저우 출신 젊은 여성은 가장 신중하게 홍콩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던 중국인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한국의 선거제도는 미국과 어떻게 다른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무엇이 다른 것인지, 동일하게 자본주의 시장제도가 보장된다면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민주주의보다 안정적 사회주의가 더 나은 것은 아닌지 내게 물었다. 그녀는 홍콩 사람이 요구하는 민주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이해하고 싶어 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아편전쟁과 난징조약으로 100년간 홍콩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른 정치체제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무엇이 더 나은 제도인지 합의하긴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과 홍콩이 이질적 체제를 갖게 된 비극적 역사의 시작만큼은 함께 탄식하며 공감할 수 있었다.
카지노 게임의 근대는 ‘무역전쟁’으로 시작되었다.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는 서구 열강에 영토 할양과 강제 개항, 경제 이권을 내주는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양무운동으로 근대적 군사력 양성을 시도했지만 청프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잇달아 패배하면서 반(半) 식민지로 전락했다. 조계지에서 발행되던 영국계 신문은 카지노 게임을 ‘동아시아의 병자’(Sick man of East Asia)라고 대놓고 조롱했다. 그 이후 1950년 신카지노 게임이 성립하기 전까지 100여 년의 시간을 카지노 게임은 ‘굴욕의 세기’라 부른다.
서구 제국주의에 당한 치욕은 중국의 영토와 카지노 게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트라우마는 두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카지노 게임이 세계를 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카오 반환 20주년을 맞은 2019년 12월 19일, 현지를 찾은 시진핑 주석이 힘주어 외친 한 문장이 그 현실을 잘 보여준다.
“아편전쟁의 굴욕사를 잊으면 안 된다.”
카지노 게임이 왜 미국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다면 ‘굴욕의 세기’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