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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철 Mar 07. 2025

파우스트적 고민. 9화

두 동강난 카지노 게임와 대자보

8화 요약


과대표가 된 경수는 문학동아리를 활성화하며 ‘벨에포크’로 이름을 바꾼다. 그는 K를 존경하며 가까이 지내게 되고, K의 말과 철학을 흡수하며 동경한다. K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박식함으로 동아리 분위기를 고무시키고, 경수는 그의 말을 수첩에 기록할 정도로 깊이 빠져든다.하지만 조교 소진은 K의 내면에 감춰진 어두운 과거를 느끼며 불안해한다. K를 맹목적으로 따라갔던 또 다른 인물의 비극적인 결말을 떠올리며, 경수가 같은 길을 걷게 될까 걱정하게 된다.



9화. 두 동강난 카지노 게임와 대자보


오전 내내 찌뿌드 등 하던 날씨가 오후가 되면서 거짓말처럼 맑아진다. 구름 한 점 없는 오후의 햇살은 따갑고 강렬하다. 연인들의 다정한 속삭임 같기도 하고 흰옷을 입은 여자들의 거대한 춤사위 같기도 하다. 델 듯이 벌겋게 달아오른 시멘트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한참 동안 작열 하는 태양을 바라본다. 어릴 적의 무모함이 다시 살아 난 듯 붉은 태양과 한바탕 눈싸움을 벌인다.


눈물이 질금질금 비어져 나오는 실눈을 뜨면서 끝까지 저 붉은 태양을 응시해 보려 하지만 결국엔 한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 비겁하게 눈을 감는다. 그 어릴 적에 태양을 향해 품었던 불가해한 질투가 또렷이 되살아나려 한다. 때로는 슈퍼맨이라도 된 것처럼 3층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리던 무모함도 되살아난다. 바닥에 추락하기 직전까지도 하늘을 향해 다시 비상할 수 있을 거라는 무모함이었다. 결과는 언제나 이카로스처럼 뼈아픈 실패와 고통뿐이었다.


바른 생활 사나이 경수도 가끔씩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미처 몰랐던 모습을 발견했다. 집착 혹은 집요함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갑자기 벨에포크의 에어컨이 고장 나는 바람에 무더위 속에서 창작 모임을 가져야 했던 우리들은 과대표인 경수에게 에어컨을 수리하던가 아니면 에어컨을 고칠 때까지 카지노 게임라도 가져다 놓을 수 없냐고 몇 번 건의를 했다.


카지노 게임pixabay


며칠 후 벨에포크엔 대형 카지노 게임가 한 대 놓여 있었다. 경수가 누나의 지인을 통해 구해다 놓은 것이었다. 카지노 게임는 새것은 아니었지만 깔끔하고 성능도 훌륭했다.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사건이 발생했다. 누군가가 그 카지노 게임를 망가뜨렸다. 금요일 아침 동아리 모임을 위해벨에포크로 들어서던 경수가 두 동강 난 카지노 게임를 보게 된 것이다. 두 동강이 난 카지노 게임를바라보던 경수의 표정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균열이 경수의 불안한 내면으로 스며드는 듯한, 마치 무언가가 격렬히 무너지는 듯한 감정이었다.


그다음 날 학교 정문의 게시판엔 다소 섬뜩한 문구를 담은 대자보가 하나 붙여 있었다.


<대자보

제목 : 벨에포크의 동강 난 카지노 게임.

어젯밤에 벨에포크의 카지노 게임를 두 동강 낸 자는 똑똑히 보시오. 오늘 아침 창작 모임이 있어서 동아리방에 들어서는데 며칠 전에 힘겹게 구해 놓은 카지노 게임의 모가지가 거의 두 동강이 나 있었소. 찌는 듯이 무더운 날씨라 오늘 있을 창작모임에서 사용할 요량으로 어떻게든 고쳐 보려고 했지만 결국 카지노 게임는 아예 두 동강 나고 말았소. 게다가 그 카지노 게임를 고치던 중 내 왼손이 날카로운 카지노 게임 날개에 베이는 바람에 손목이 5cm 정도 찢어졌고 오른 손목도 그 비슷한 크기로 베이고 말았소. 그 후로 붕대를 감은 내 손목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에게 이상한 시선을 보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소. 카지노 게임를 두 동강 낸 자는 보시오. 그대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생각해 보시오. 그대가 술을 먹고 동아리방에 들어와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카지노 게임를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던가 아니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분노에 찬 상태에서 홧김에 카지노 게임에게 화풀이를 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나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그렇지만 그런 일을 벌여놓고도 지금 이 시간까지 무책임하게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지금 심히 분노하고 있는 것이오. 그대가 진정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나타나서 사과를 하기 바라오. 지금부터 삼일 여유를 주겠소. 만일 삼일이 지나도 그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의 두 손으로 그대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말 것이오!


"나의 두 손으로 그대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말 것이오!"


경수의 대자보를 읽은 학생들은 마지막 문장에서 소름이 돋았다. 마치자신의 영혼이 갈기 갈기 찢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그 마지막 문장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경수는 카지노 게임를 망가트린 범인의 사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두 동강이 나버린 카지노 게임를 통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균열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 카지노 게임가 자신의 어떤 질서, 혹은원칙의 일부가 어긋난것처럼. 카지노 게임가 두 동강이 났다는 것은 단순한 기물 파손이 아니라, 그가 지켜왔던 질서가 산산이 부서졌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소진은 카지노 게임 망가트린 범인을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 가방을 놓고 오는 바람에 다시 벨에포크에 와야 했다. 그곳엔 평소에 동아리 식구들과 친하게 지내던 다른 과 학생 한 명이술에 만취 한 채카지노 게임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때까지 카지노 게임는 멀쩡했었고 다음 날 아침에 카지노 게임가 두 동강이 났으니 그 친구가 벌인 짓이 분명했다. 대자보 앞에서 웅성거리던 학생들 중에서 낯빛이 하얗게 질리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그녀였다. 이미 그녀는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으므로 소진은 경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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