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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23. 2025

토마스 카일리, <애니멀 킹덤

육체의 자유

토마스 카일리(Thomas Cailley), <애니멀 킹덤(The Animal Kingdom)

- 육체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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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한 신화에선 기상천외한 '변신'이 만연하다. 변신의 유형도 다채롭다.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변신, 반대로 인간에서 동물로의 변신, 둘이 혼재된 '수인' 형태를 띠는 등…… 이 같은 변신의 상징과 의미를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신화학』에서 연구하였다. 자연에서 문화로 향하는 변신은 주로 발전, 수혜, 진보에 상응한다. 오늘날 인간이 가진 모든 것들은 자연에서 비롯했기에, 자연에서 인간으로의 변신은 기술의 이행 내지는 인간과 자연의 간극 좁히기다. 반면 인간이 자연물로 변화할 때, 자연은 인간에게 내주었던 것을 빼앗는다. 또 무능력한 인간은 자연에게 내어줄 것이 전무하다. 그나마 장점이라 말할 수 있는 이성이나 지성은 변신 과정에서 상실한다. 인간에서 자연으로의 변신은 ‘문화화 된 자연’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징벌로서, 자연화 된 인간은 그저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정리하자면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은 둘 사이의 장점을 조화하는 진보인 반면, 문화에서 자연으로의 이행은 퇴보로서 두 세계가 가진 단점만을 부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에 펼쳐지는 변신 이야기, <애니멀 킹덤 속 변신은 무엇을 함의할까.


1980년 클레르몽페랑 태생의 토마스 카일리는 프랑스의 시네아스트다. 그는 2014년 <파이터스로 장편 데뷔하였고, 이제 막 세상에 뛰어드는 사회초년생들을 '싸우는 사람들'에 비유하며 ‘인생’을 탐구하였다. 카일리가 보기에 삶은 '투쟁'이다. 그렇다면 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투쟁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외부'에 있다. 외부의 논리는 '약육강식'이다. <파이터스에선 게걸스러운 강자 메기가 약한 생물을 모조리 먹어치운다. 아버지 사후, 당장 부친이 담길 '관'을 두고 외부와 거래 및 타협해야 하는 것처럼, 외부는 개인의 '사활적 이익'을 앗아가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 거센 비가 형제들이 공사하던 현장을 모조리 망가뜨리는 것도 동일하다. 외부는 개인의 욕망이나 생존을 방해하기에, 우리는 이를 사수하기 위해서 투쟁한다.

이로써 개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공격성'을 갖추는데, 카일리는 군인이 되고자 하는 여성, 마들렌의 공격성을 특히 더 부각한다.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사활적 이익을 사회와 남성이 약탈하기 때문이다. 한편 공격성만 부각하지 않는다. 공격성만 갖춘 세상은 모든 것을 황량하게 파괴할 뿐이다. 부드럽고 안온한 내부에서 보듬고 포용할 수 있어야만, 누구라도 당연한 생을 누릴 수 있다. 카일리는 그간 여성에게만 요구되던 포용력을 남성 아르노에게 주문한다.

부드러운 내부이자 포용력의 상징이 바로 '가족'이지만, '개인'은 가족의 일원임과 동시에 가족과 오롯이 동화되지 않는 존재이기에 자신을 유지하고자 공격성도 갖춰야 한다. 즉 공격성과 포용력, 외부와 내부의 균형이 필요한데, 이를 갖춰 항구적으로 유지하고 보존해나가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이로써 삶의 의미란 '사랑'이라고 카일리는 답한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투쟁하거나 포용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낸다. 이렇게 인생의 과정과 의미를 탐구하던 카일리는 이번에도 투쟁하는 영화를 연출한다.


<애니멀 킹덤에선 '수인'들이 투쟁한다. 영화 속 수인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빨판 달린 문어, 온 몸에 갑옷을 두른 천산갑, 날개 달린 조류, 털북숭이 포유류, 보호색을 띨 수 있는 카멜레온까지 각양각색의 개성을 자랑한다. 이들은 온전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 혼재된 생물체이기에, 사람들은 인간에게 요구되거나 기대하는 기준을 그들에게 투영한다. 이러한 기준에 최소 반쪽 정도 타당하지 않은 수인들은 이상하다거나 징그럽다고 느껴진다. 한편 인간을 아우르는 획일화된 기준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와 강점을 발전시키다보니, 가변적인 환경에서 더 강한 생존력을 보인다. 즉 수인은 무한하게 변화하는 대자연의 흐름에 맞춰 자신을 변형한 존재라 해석할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방대한 수인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형태나 습성은 달라도 수인 모두를 아우르는 공통의 특징이 있다. 바로 '이동'을 열망하는 심리다. 에밀과 우정을 쌓는 조류 인간 '픽스'는 자신을 가두는 이송차에서 탈출하려 안달이었고, 이후 숲에서도 ‘비행’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외의 다양한 수인들 역시 숲과 도시, 가릴 것 없이 언제나 '질주'하거나 '도망'치는 모습이다. 수인 다수가 이송차량에서 탈출한 날 불어 닥친 폭풍우와 휘몰아치는 돌풍 역시 그들이 속한 자연의 거대한 운동성을 가시화한다.

이들은 인간에게서 도망치고, 무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문명에서 탈출한다. 인간은 가두고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든다. 프롤로그의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교통 체증', 이사 간 집의 빽빽한 '벽'이 문명의 전형이며 이는 개방적인 자연과 대비를 이룬다. 이렇게 폐쇄적인 실내에서 프랑수아는 에밀의 약속, 데이트, 심지어 표정까지 일일이 통제하며, 왜 인간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이동이 제한되는지 몸소 증명한다. 프랑수아는 라나와 에밀이 변신하지 않기를, 그들이 아내답고 아들답기 바란다. 그래서 어떻게든 라나를 치료하여 과거로 되돌리고 싶은 그의 열망이 부동한 '사진' 속에 담겨있다. 사진엔 세 가족의 행복한 모습이 멈춰 있는데, 초당 24프레임으로 흘러가는 영화가 무궁무진한 변신이라면, 그중 오직 한 프레임만 선별하여 인간을 정지시키는 매체가 바로 사진이다. 그 사진은 촬영자가 보기 좋은 피사체의 순간을 담아내기에 프랑수아의 눈엔 보기 좋지만, 동시에 라나에겐 좁고 폐쇄적일 수 있다. 라나가 수인으로 변했을 때, 부자는 그녀의 오직 '동공'만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한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또한 보고 싶은 인간의 흔적만을 응시하는 것이다. 인간답지 않은 요소들은 모두 프레임 밖으로 치워버리고…

그래서 프랑수아의 애탄 부름을 무시하고 수인이 된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볼 수 있다. 수인으로 변한 라나는 응답하지 않고, 외의 수인들도 항상 숏에 길게 머물지 않는다. 남부로 이주한 당일 폭풍우가 몰아친 밤, 에밀은 마당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수인을 목격했지만, 1초도 되지 않은 사이에 금세 사라진다. 폭풍우는 인간이 보기 좋게 정돈해 놓은 것들을 모조리 무너뜨린다. 또한 수인들의 모습은 인간이 기대하지 않은 모습이기에 파격적이고 충격적이다.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붙잡히지 않는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다.

즉 수인은 편집과 촬영 모두에서 붙잡히기를 거부한다. 형식에서 드러나는 공통점인 다양성과 이동이 곧 해방과 자유에 상응한다. 그래서 수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족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여기서 이들의 발에 족쇄를 채우는 자가 '인간', 더해서 무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거대한 사회 시스템이다. 영화 속 인간의 관계, 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법칙은 일방적인 '주종 관계'다. 가부장제에서 남편이자 아버지인 프랑수아의 호명은 매우 큰 권위를 지닌다. 라나와 에밀은 아내이자 아들이어야 한다. 프랑수아는 자기가 보고 싶은 아내의 모습으로 라나를 되돌리려 하고, 에밀이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언짢아하거나, 엇나가려고 하면 도망치지 못하게 꽉 붙잡는 강압적인 성미를 지녔다. 프랑수아가 결정한 남부 이주 역시 에밀에겐 썩 달갑지 않다. 뿐만 아니라 프랑수아가 아들과 강압적으로 맺는 약속은 에밀의 주체적인 교우 관계를 방해하며, 이렇게 종들은 주인의 눈에 항상 '온순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를 강요받는다. 그 지시는 언제나 화자에게 이익이고, 이를 수행하는 청자에게는 천부당만부당하다. 상부의 지시를 받은 쥘리아가 '고기'를 사는 장면도 그렇다. 물질은 오직 지배자의 눈과 혀에 탐스럽거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만 유의미하고, 이를 위해 산산이 도륙난다. 분명 프롤로그에서 프랑수아는 "존재하기 위해선 주체적이어야 한다"라며 인간의 존재 의미가 자유임을 환기하지만, 그 격언에 해당하는 인간은 오직 소수의 주인들뿐이다.

심지어 주종 관계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사이에만 통용되지 않는 것 같다. 지역 간의 관계 역시 포괄한다. 영화의 시작은 대도시였지만 이내 곧 프랑스 남부의 고즈넉한 전원으로 향한다. 수인 수감 시설이 남부에 있기 때문인데, 영화 속 사람들이 수인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했을 때 '혐오 시설'을 파리 바깥으로 빼내는 의도라 추정된다. 영화 속 수인은 이따금 난폭해 보이지만 이는 인간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내비치는 사활적인 공격성이다. 그래서 상호 존중한다면 사회에 큰 해가 될 것 같지 않고, 단지 꽉 막힌 도시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다수의 인간이 향하는 방향과 반대로 이동하는 그들이 다만 위협적으로 '보일' 뿐이다. 이렇게 주인들의 의중에 반하는 수인들은, 인간에 비유한다면 흡사 ‘반동분자’ 취급당하며 어딘가로 격리된다. 영화 속 수인에게 가해진 낙인은 전염병 환자, 돌연변이 등 적대적이다. 그래서 파리로 추정되는 대도시의 안전이나 쾌적함을 위해 수인들을 모두 지방으로 내쫓는다. 즉 영화 속 주종관계는 단순히 소수 권력자들 좋은 것만 포함하지 않는다. 특권적이고 독점적인 수도 내지는 대도시가 지방까지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마치 식민지처럼 주무르고 통제한다.

소수의 야욕을 위해 무수한 것이 노예화되는 세태에서 주체성을 되찾고자 몇몇 인류가 수인으로 변한다. 아직 수인이 되지 않은 인간 가운데서도 자유를 갈망하며 반항하는 이는 분명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니나는 ADHD 때문에 충동을 억제하기 어렵다. 에밀이 막 전학 오자 궁금한 게 어찌나 많은지 선생의 말을 끊고 질문할 정도다. 주인의 말을 거스르고 본인에게 솔직하며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을 실현할 때 비로소 자유를 외칠 수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항상 제재가 가해진다. 영화에서 반복 등장하는 위협적이고 우락부락한 오브제 총·칼부터, 간접적으로 암시되는 강제 입원, 수용 생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포획, 사냥 등 주인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유별난 이들에겐 항상 징벌이 내려진다. 주인의 지시인 얌전한 '평범성'은 종들에겐 조금의 이득도 없다. 심지어 동물들에겐 군인이 기대하는 고기가 인간이 요구하는 평범성이다. 그러나 평범함을 따르지 않으면 그나마 허락된 희소한 자유마저 빼앗기고, 처벌이 가해져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떠안아야 한다. 위험한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라나를 끌고 갔다고 의사는 말하지만, 그 위험한 상황을 누가 초래한 것인가. 프랑수아와 에밀의 관계로 보건데, 먼저 가위를 든 쪽은 프랑수아, 곧 주인 아닌가? 이 평범성은 강제적이고 당연한 것, 영화 속 표현으론 ‘선택권’이 없기에 수인이 되가는 에밀에게 프랑수아는 귀마개를 끼우고 제모를 시켜 보지만, 그 과정에서 변해가는 그에게 적합한 자유는 더더욱 거세된다.


수인이 됨으로써 실현되는 자유는 ‘정신적 자유’와 ‘육체적 자유’ 중 후자에 해당한다. 라나가 병실에서 나가려고 발악하며 벽을 긁은 흔적, 에밀이 수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옷에 덮인 그의 육체가 시원하게 드러나거나, 또 꽁꽁 꿰매진 흉터의 봉합사 사이로 피와 살덩이가 솟구쳐 오르는 등 카일리는 변신 과정에서 해방되는 ‘물질’을 부각한다. 그렇게 피부에 틈이 생기면 날카로운 손톱, 송곳니, 깃털, 억센 털 등이 삐죽삐죽 솟아오르며 에밀의 육체가 바라는 모습이 완성된다. 그 과정에서 정신이 바라는 자전거 타기, 말하기, 싸인하기 등 이성적인 특징을 잃어가기 때문에 육체의 자유를 대가로 정신의 자유를 내준다. 픽스가 오롯이 비행하게 되자 언어를 아예 망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에밀의 정신과 육체는 대립한다. 수인이 되면 더 분방하게 먹고 즐길 수 있다. 그것이 소년이 바래왔던 욕구이기도 하다. 도입에서 프랑수아는 에밀이 먹는 것에 일일이 간섭했었고, 이후 꽉 막힌 차안에서 소년은 끝끝내 뛰쳐나갔으니 말이다. 이때 교통체증에 상응하는 '고정된 카메라'는 ‘트래블링 숏’으로 뒤바뀌어 움직이는데 인간은 정신, 그것도 타인의 정신에서 해방되어야지만 자유롭다는 것을 쾌활한 촬영으로 가시화한다. 그러나 에밀의 몸에 본격적인 수인의 징후가 나타나자 소년은 불안해한다. 이때 카메라 워킹도 세차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로 변한다. 분명 인간에서 수인이 되며 이동권이 복권된다. 그러나 동시에 두렵다. 인간의 정신엔 나름의 '인간다움', 즉 인간의 기준이 각인되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육체를 활용하기 마련인데, 수인은 그 기준에서 모두 엇나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육체가 하고 싶은 것을 방탕하게 즐기는 자유가 아닌, 그 어디에도 복속되지 않는 데서 해방감과 안도감을 느끼고, 육체적 욕구 너머의 할 수 있는 무엇을 꿈꾸는 정신적 자유를 바라기에 육체적 자유가 두려울 수 있다. 정신과 육체가 대립하고 충돌하며 발생하는 긴장과 떨림, 야성적인 육체가 정신을 잠식해감에 나타나는 운동이 바로 핸드 헬드의 격정이다.

그 공포와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수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문명과 자연의 이분법은 정신적 자유/육체적 자유가 아니라, 비자유/자유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육체를 통제하는 대가로 더 나은 정신적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 모두를 간섭한다. 문명이 요구하는 인간의 기준이 정신에 각인되고 이내 곧 족쇄처럼 육체로 번진다. 반면 수인이 됨으로써 존재는 마음껏 수영하고 먹고 즐기며, 에밀 스스로가 수인임을 긍정한 이후 니나와 성관계를 갖으며 쾌락에 근접한다. 육체적 자유는 할 수 있는 것이 생리적 기쁨과 즐거움에 그칠지 모르지만, 최소한 자연은 그 육체적 자유를 향해 발과 날개로 이동하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향한 자연에서 인간은 정신적 자유의 가능성까지 목격한다. 문명에선 육체를 직접 붙잡지 않더라도 정신을 세뇌라는 방식으로 지배하고, 이는 '수직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하달된다. 가장이 식구들에게, 국가가 군인들에게, 선생이 학생에게. 그러나 도입에서 인간 에밀과 반려견 알베르는 '똑같이' 먹는다. 둘 사이엔 분명 종적 차이가 있지만 차별하지 않고, 또 에밀은 알베르의 북실거리는 털을 쓰다듬으며, 알베르는 에밀이 기억하던 모습에서 변해가더라도 적대하지 않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한다. 이때 카메라는 그들을 '클로즈업'한다. 에밀과 알베르가 종적 차이를 뛰어넘고 존중하며 가까워지는 것을 거리로 가시화한다. 에밀이 픽스와 친해질 때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경계하는 픽스는 저 위에 있다가 급강하하여 에밀을 습격했다. 그러나 에밀이 수평적인 관계를 맺으려하자 동등한 눈높이로 가까워진다. 이후 에밀은 픽스의 비행을 돕고 상처를 치료하며, 픽스는 에밀이 위기에 몰렸을 때 목숨을 희생해가면서 까지 도와준다. 가까워지되 지시하지 않고, 가까워진 만큼 상대를 나처럼 배려하고 존중함에 자유의 토대가 마련된다.

이렇게 상대를 수평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려면 높은 시선은 몸을 낮춰야 하고, 낮은 시선은 상승해야 한다. 영화 속 세계관에서 수인들은 항상 약자다. 개체적 특징에 의해 나무 위에 매달려있는 경우를 제외하곤 가구 아래나 수풀 속에, 즉 눈에 띄지 않는 아래에 늘 숨어있다. 그리고 인간은 언덕 위에서 굽어보거나 '죽마'를 타고 있어 항상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지시 및 통제한다. 그러나 높은 위치에 있던 프랑수아는 몸을 숙여 수인과 동등하게 소통해보려 하고, 수인이 짧게 스쳐 지나가던 앞전 시퀀스와 달리 마트에서는 꽤 ‘길게’ 그들을 응시한다. 또 나이마는 다정한 태도로 수인을 진정시켜 동등한 눈높이에서 대화를 시도한다. 이때 서로의 동등한 시선이 교차되는 '리버스 숏'으로 전환되며, 인간적인 징후만 남아있던 클로즈업은 그들의 총체를 긍정하는 ‘풀숏’으로 확장된다. 결말 역시 프랑수아와 에밀이 각각의 리버스 숏에 담겨 서로의 자유를 지지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본래 에밀을 병원에 보내 치료하려던 프랑수아, 그러나 이젠 수인이 된 아들이 가고 싶은 곳을 어디든지 가도 좋다고 응원한다. 그렇다, 자연과의 화해 속에서 우리는 우월한 이상을, 이로써 더 나은 것을 할 수 있는 정신적 자유까지 획득한다.

이렇게 카일리는 인간에서 동물로의 변신을 뒤집는다. 지금까지의 신화적 관점과 달리 동물로의 변신은 징벌이 아니다. 다만 동물을 하대하거나 야만적으로 여기는 인간의 편견이 수인을 핍박하기에 저주처럼 보이는 것이지, 실은 자유가 천성인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구원이다. 그래서 변신의 의미는 다르지만, 변신의 본질은 신화와 똑같다. 자연의 우월성과 인간의 무능함이란 측면에서 말이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종의 우월성이나 자유를 떠들어대지만 실제론 모순되거나 무능하고, 반면 문명의 진보와 자유를 위한 요건은 자연이 지니고 있나니, 결국 자연이 되어서 이를 깨우치거나, 자연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대화를 시도해야만 인간은 해방되어 광활함을 누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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