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일지도
나는 밝은 어린이는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 유치원을 다녀본 적 없기에 초등학교 입학을 기대하며 설레하거나, 아빠가 멘 지게 삼태기 위에 앉아 까륵거리던 예닐곱적 내 기분을 기억할 만큼 눈에 띄게 기쁘거나 즐거웠던 일은 적다. 아니, 뭔갈 알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웃음을 잃어갔다는 말이 맞을지도. 어린 나에겐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나와는 너무도 멀었다. 내 몫은 아닌 듯한 모든 즐거움들을 기대하며 즐거워하기보다, 내게 없는 것들을 슬퍼하며 울기보다, 나는 비웃었다.
어릴 적부터 지겹게 들었던 얘기 중 하나가 너는 아이인데도 왜 이다지도 냉소적이냐는 것이다. 가족도 그렇게 말했고, 친구들도 그렇게 말했고, 심지어 나를 예뻐하셨던 선생님들도 종종 그리 말하곤 했다. 내 냉소의 시작은 어쩌면 작은 사회인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였는지 모른다. 90년생인 나는 97년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기록상으로는 96년도부터인가 초등학교 명칭을 썼다지만, 난 국민학교 입학식을 기억한다. 운동회 달리기 상품이었던 공책에 국민학교라고 쓰여진 국민자를 검은 볼펜으로 여러번 선을 겹쳐 검게 지운 후 그 위에 비뚤한 글씨로 초등, 이라고 적어둔 기억도 선명하다. 국민학교에 입학했지만 한 해를 채 지나기 전 가을 쯤에,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변했다.
90년생은 좀 특이하다. 혹자는 90년생이 온다는 책 제목을 쓸 만큼 이전에는 없던 합리적이거나 반항적인 세대의 시작이지만,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의 과도기 속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골고루 체험하며 자랄 수 있던 과도기적인 세대였다. 어쩌면 인생의 다채로운 경험 측면에선 참으로 축복받은 세대였다. 그러나 비극은 주변 모두는 미래세대와 가까운 경험으로 자랐지만, 나는 과거 세대와 비슷하게 자랐다는 데 있었다. 그것이 내 피해의식과 우울의 기저였다.
내 인생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아름답게 꾸며본 기억이 없다. 크리스마스랑 산타라는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모두가 크리스마스에 나무를 예쁘고 반짝이는 금빛 은빛 초록빛 빨강빛 반짝이 끈과 작고 귀여운 꼬마전구를 둘러 장식을 한다는 건 몰랐다. 산타가 트리 아래에,벽에 걸어둔 커다란 양말에, 밤새 머리 맡에 놓아둔 선물을 어린이들이라면 다 받는다는 것도 몰랐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학교에 간 모든 어린이들은 나만 빼고 모두 선물을 받았다.
당시, 주변의 모두는 산타를 믿었고, 받은 선물을 자랑하지 못하는 아이는 나 하나였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우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난, 나쁜 아이였다. 산타에게서 홀로 배제된 아이는 울거나 친구들이 받은 선물을 부러워하기보단 비웃어버렸다. 누가 봐도 심술궂은 저 아이들도 선물을 받았는데 나만 없는 것 보면 저 선물들의 출처는 뻔히 제 부모겠지. 산타가 부모 살림살이 형편 따지는 치졸한 놈은 아닐 건 분명하니.
그 이후로 자라면서 온라인 카지노 게임 부모님이 너무 옛날 세대이고, 우리 집엔 딸이 너무 많아서 내게 줄 애정이나 자원따위는 없다는 걸 일찍이 알았다. 성탄절 말고도 주변 아이들이 챙기는 행사는 참 많았다. 어린이날은 한결 나았다. 성탄절보다는 좀더 내겐 다정해서, 세 명씩 줄세워 달린 달리기 3등 상품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내가 쓴 공책상당수는그 운동회 상품이었다. 상,이라고 쓰인 도장이 꽝 찍혀있던 상품 공책. 달리기 시합에서 짧은 거리를 완주하고 나면 상품으로 공책이1등 3권, 2등 2권, 3등 1권이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짧고 둔하고 느린 편이라 늘 공책이 한 권 뿐이었지만, 2살 터울이었던 언니는 달리기가 꽤나 빨라서 못해도 2등을 하곤 했으니 언니가 안쓰는 공책은 내 몫이었다. 난 자라는 내내 부모 덕보다는 언니 덕을 봤다. 1등이라고 공책 3권을 동시에 꺼내 쓰는 것도 아니었으니, 어린이 날이 지날 즈음에는 친구들이 모두 비슷한 공책을 썼던 듯하다.
모두가 챙기는 기념일이 또 있었는데, 그게 생일이었다. 생일 즈음에 친구들은 생일 당사자에게 선물을 주며 축하했다. 생일 당사자는 집이나 중국집 등에서 생일 파티를 계획해 자신의 날처럼 기념했다. 처음엔 내게도 생일 초대장을 보내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용돈도 없고 부모님 중 한 분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을 만큼 케케묵은 가치관을 가진 분이었기에 어린 애가 친구들 집에 놀러가 하룻밤을 보내고 온다거나 선물을 주며 태어난 날을 기념한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었다. 난 곧 그들만의 리그에서 밀려났다. 어린이의 세계도 꽤나 계산적이라서 서로 주고받을 게 없다면 함께할 수 없었으니.
그럼에도 내 생일을 기념하고 싶었다. 화려한 케잌과 촛불, 신나는 파티는 없더라도 세상에 잘 왔단 소리는 듣고 싶었나보다. 딸 많은 농부 집 형편에 그래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건 미역국이었다. 내가 바랄 수 있는 것 중 어쩌면 가능할 만한 가장 최소한이라 생각하는 것을 골라서,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부모님께 졸랐다. 내 생일에 미역국이 먹고 싶다고. 우리 집 식구 귀에는 개소리였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우리 집 식구들은 그런 달달한 낭만 같은 거 없었다. 1남 5녀 막내 남동생 생일에야 초코파이로 케잌 흉내를 내고 포도같은 과일이나 고기를 좀 사와 먹였다지만, 딸년 따위가 생일을 챙겨달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이런 괘씸한 아이의 기를 꺾어버리겠다는 다짐인지, 애초에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였던 건지, 내게 허락된 미역국은 없었다.
고 2 생일 전날, 할머니와 둘이 사는 친구 집으로 가출했었는데, 친구가 온라인 카지노 게임 생일날 미역국을 끓여줘야 하는 아이라고 할머니를 졸랐다. 친절하고 인심 좋은 할머니께선, 손녀딸 친구의 미역국을 아침 일찍부터 따끈하고 맛나게도 끓여주셨다. 그게 내 생일에 먹어본 최초의 미역국이었다. 그 생일에 미역국을 먹으며 온라인 카지노 게임 따뜻하기보단 서늘했다. 나를 잘 알지 못하는 분도 약간의 호의와 동정심이 있다면 베풀 수 있을 만한 게 생일 미역국이었구나. 그리고 난, 그마저도 받지 못하고 자라야했구나.
엄마는 단 한 번, 고3이 되니까 미역국 타령 좀 그만하라며 학을 떼던 엄마가,미역국을 끓여주셨다. 고3 땐 미역국 타령같은 지겨운 거 나도 안했는데. 먼 훗날 내 부모 원망의 레퍼토리로 쓰일 걸 예견해서 그랬는지, 조만간 품안을 벗어날 자식에 대한 애틋함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미 생일 미역국을 먹어봐서 그랬는지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난 미역국을 꽤나 맛있어하고 좋아하지만, 내 생일에 먹는 미역국은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데, 미역국이 내게 있어선 적선과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 삶 속에서 한 가지 고정관념 같은 게 생겼는데, 그건 나의 탄생이나 존재같은 건 그닥 축복받을 의미나 가치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일날 미역국을 더이상 바라지 않을 만큼 자랐을 때, 온라인 카지노 게임 이런 뿌리 깊은 확신을 얻게 되었다.
취업을 하고 나서, 친구들은 내가 좀 유연해지고 여유로워졌다고 했다. 약간의 경제적 자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만 둔 특수직 공무원 생활이지만, 당시 난 꽤 좋았다. 먹고 싶은 걸 먹어보고, 입고 싶은 걸 입어보고, 혼자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하지만 최저시급은 머지 않아 공무원 월급을 따라잡았고, 그래도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도, 여론에서도 일상에서도 난공공의 적이자동네북이자하는 것 없이 세금이나 축내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금전적 만족도, 보람도 없는데, 주변에서 내게 바라는 역할은 점점 많아졌다. 그들이 바라는 건 내게 없었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 조금씩 소진되어갔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물가에10여년간 오르지 않은 공무원 월급은 더는 내게 큰 의미의 보상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만 둔 건 올해지만 공무원 생활 5년 쯤 했을 때부터는 타성에 젖어 일했던 것 같다. 일어나기 몸이 무거웠고, 일상은 기대되지 않았지만, 작은 일상은 소용돌이쳐 어지러웠다.
당시 어쩌다 언니와 통화를 하면서 말했다. 사는 게 지겹노라고. 당장 죽어버리고 싶다는 자살충동같은 건 아니었다. 자살 충동도 열정이 있어야 느끼는 거지. 그냥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살게 하는 것도, 죽게 하는 것도 의미가 있나. 사실 나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거야. 어쩌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느린 자살 중인지도 모르지.
언니는 거 참 철학적이고 시적이라며 책이라도 써보라고 했다. 난 어이가 없어 대꾸했다. "이런 헛소리를 돈주고 사읽을 사람이 있단 말이야?" 언니는 요새 유행하던 베스트셀러 에세이 제목은 이렇던 걸, 하고 대꾸했다. 그 땐 그냥 웃어넘겼는데 종종 생각이 났다. 세상은 넓으니 이런 우울과 비뚤어진 마음을 따뜻하게 받아줄 누군가가 어쩌면 있지 않을까.
그래서글을 한 번 써보기로 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혼잣말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혹 누군가 들어준다 해도,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어 헛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되어버릴지도. 그래도 내 목온라인 카지노 게임로 나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아가의 첫 온라인 카지노 게임도 사실 따지고보면 누가 듣는다고 이해할 수 있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아니다. 다만 아이의 목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누구도 혼잣말이라고, 들어도 이해못할 헛온라인 카지노 게임라고 하지 않고 옹알이, 라며 반겨준다. 운이 좋다면 나도 그런 따스한 존재에게 닿아 위로를 받게 될지도 모르지. 운이 정말 좋다면, 내가 읊조리는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삶의가능성이 닫혀있다고만 생각할 이유는 없으니. 그냥 해보는 거지. 범죄나 비도덕은 아니잖아.
온라인 카지노 게임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하루하루를 스쳐보내고 있다. 여전히 난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더딘자살 중이다. 다만 그 안에서, 세상에서 가장 긴 유서를 써나가보려고 한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오늘도 하루만치씩다가오는 죽음을 덤덤히 바라보려 하고 있어요. 내 삶을 돌아보니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런 사정이 있어 슬펐고요, 이런 사람들이 있어 정말로 고마웠어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