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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 Ing Jan 21. 2025

Looking back 2024 - 상반기

2024년 한 해를 되돌아본다.

2024년 한 해를 되돌아본다.

변화와 도전의 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가득한 해였다. 해를 보내면서 그 해 있었던 일들이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다. 잊고 싶지 않아서 하나하나 기억하고자 쓴다.


[1월]

미국에서의 삶에 적응하기; 밥 하나 안 해 먹고살던 30살은 이제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챙겨 먹어야 한다. 매일매일 뭐 먹을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 뭐 먹지. 내일 뭐 먹지. 등등. 고기류는 코스트코에서 대량 구매해 얼려놓기 때문에 전날 저녁에 다음날 먹을 걸 무료 카지노 게임하고 해동시켜놔야 한다. 한국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편했는지를 느낀다.


수많은 이력서 뿌리기; 수많은 이력서를 뿌리면서 이 미국이라는 회사는 취업이 어려운 시기여도 이렇게 지원할 곳 이 많구나,라는 생각. 또 그 수많은 이력서가 떨어지면서 그동안 한국에서 참 쉽게 취업을 해왔구나 생각. 6년이 되는 경력 중에 처음으로 이력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붙든 안 붙든 내가 동경하던 회사에 이력서를 넣는 것은 그 자체로 꽤 즐거웠다.


링크드인에 내 취업기 공유하기; 콘텐츠의 힘을 다시금 믿을 수 있었다. 영상은 시간노력이 더 많이 들어 글의 형태로 취업기를 공유했는데 예상하지 못할 만큼 큰 관심을 받았다. 다들 실시간으로 취업기를 공유하는 것에 용기 있는 행동이라 칭찬해 주셨는데, 개인적으론 (처음엔) 결국 실패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얻는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해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물론 점점 시간이 흘러도 성과가 없자 좀 초조해지긴 했다. 다음에도 이런 걸 또 할까? 이번처럼 (토종 한국 개발자가 좋은 직장 때려치우고 미국으로 가서 부딪히는) 자극적인 스토리는 또 나오진 않을 것 같긴 하다.


모르는 사람에게 적극적 도움 요청하기; 나의 선택적 E 면모가 나왔던 부분. 예전에도 그렇듯이 나는 아예 모르는 사람한테 무언가 요청하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이번에 도움을 요청하며 어려웠던 것은, 이 요청이 단순히 내가 도움을 받기만 하고, 내가 도움을 주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어떤 것을 가져가야 사람들이 내게 도움을 줄까. 고민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다들 선뜻 도움을 주었다. 도움을 받으며 내가 이에 갚는 방법은 꼭 성공해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도움을 주는 것이리라는 생각을 무료 카지노 게임.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되었다.


[2월]

코딩인터뷰의 아픔 떨쳐내기; 개인적으로 알고리즘 코딩 인터뷰에 트라우마가 있었다. 화상으로 하는 알고리즘 인터뷰에서 몇 번 떨어지고 난 이후, 나는 문제를 풀다 조금이라도 막히면 머리가 하얗게 되곤 했었다. 최대한 피해왔지만... 미국에서의 인터뷰는 알고리즘 문제 푸는 인터뷰가 필수였다. mock interview를 통해 내 실력을 마주했다. 문제도 많이 풀었다. 너무 어려운 문제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그리고 풀어야 한다는 집착도 버렸다. 또 mock interview를 통해 자신감도 찾았다. 이번 인터뷰 과정에서 코딩 인터뷰는 거의 다 통과했다. 나는 코딩 인터뷰를 잘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할 것이다!)


수많은 인터뷰와 피드백 사이에서 중심 잡기;인터뷰를 보는 회사들이 늘어나자 정말 바빠졌다. 하루에 두 곳과 보는 날도 있고, 일주일에 매일 인터뷰가 있는 주도 있었다. 모든 것을 완벽히 할 수 없기에 매일다음날 있는 인터뷰에만 집중무료 카지노 게임. 벼락치기일 수도 있지만 너무 멀리까지 보고 준비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처음부터 완벽하려고 했으면 인터뷰를 계속 미루고 그러다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또 천차만별인 피드백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법도 배웠다. 내가 단기간에 고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또 내가 고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무료 카지노 게임. 피드백을 받는 것은 불안을 줌과 동시에 내 불안을 눌러주기도 무료 카지노 게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나를 모르는 채 묻어두는 것보다 무섭지만 나를 알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내 지난 경력 돌아보기;온사이트 인터뷰의 마지막 단계인 매니저와의 면접을 준비하며 내 지난 경력을 되돌아봤다. 그동안 내가 어떤 도전을 하고,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고 혹은 실패하고, 또 어떤 가치관으로 일해왔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빈 종이에 각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적어보는데 처음에는 큼직큼직한 일들 위주로 생각나다 점점 작은 일들도 생각이 났다. 이런 일도 있었지... 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이력서에 적히지 않을 사소한 경험들 중에서도 나에게 소중한 일도 많았다. 새삼 그동안 열심히 무언가를 해온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땐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할까 자책감이 많이 들었는데. 결국 모두 가치 있는 경험이 되었다. 그래 하길 잘했구나.


[3월]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의 기쁨; 최종면접까지 간 회사 중에 면접을 마무리 한 두 회사가 있었다. 지금 입사한 P사와 다른 A사, 내 개인적 선호는 A사였다. P사와의 면접과정은 수월무료 카지노 게임. 특히나 나를 인터뷰한 매니저가 나는 굉장히 좋게 봐줬다.매니저와 팀매칭이 아닌 팀 꼬시기 콜(?)을 한 이후 나는 여러 궁금증과 함께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답변으로 받은 메일은 많은 위로가 되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어필하고 싶었던 나의 장점을 캐치해 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비록 A사와는 잘 되지 않았지만 난 충분히 기뻤다. 3개월간의 고단한 취업과정 중에 무수히 탈락하며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져 갈 때 나를 100% 나로서 받아들이고 좋아해 주는 팀이 있어서 말이다. 아, 솔직하기를 잘무료 카지노 게임.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연봉 협상에서 쫄지 않기; 물론 연봉협상 결과가 완벽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아쉬운 점은 분명히 있다. 다만 걱정했던 것보다 수월히 처음 목표로 세웠던 만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연봉협상에 있어서 내 직전 직장이 한국이라는 점과, 다른 오퍼가 없는 점이 큰 걸림돌이었다. 한국 연봉을 달러로 바꾸면 여기 신입 개발자 연봉에도 못 미쳤다. 그래서 나는 한국 연봉을 오픈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오퍼 대신 최종 라운드를 하고 있는 타 회사 A사의 공시 연봉 수준을 제시했다. 진행하고 있던 타 포지션이 한 단계 높은 시니어 포지션이고, 또 좋은(?) 회사인 점이 도움이 되었다. 결국 첫 오퍼 제시에 원하는 수준을 제안받을 수 있었다. 휴 쫄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도 보너스는 좀 더 달라고 할걸... 세금을 이렇게 뗄 줄 알았더라면...


내가 받은 도움을 어떻게 갚을까;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오퍼를 받고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도 끊었다. 이곳에서 처음 받은 오퍼레터를 뽑아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꿈꿔왔던 금의환향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쁘면서도 여러 무료 카지노 게임이 들었다. 새 회사에서 잘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받았던 도움은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그분들이 어째서 내게 그런 도움을 주었을까 무료 카지노 게임해 본다. 내가 언젠가 여기서 잘 되면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도움을 갚지 않더라도, 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믿던 사람들이 나를 믿고 응원해 줬을 때 얼마나 힘이 났는지를 기억한다. 결국 이 자리에서 잘하는 게 당신들을 기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4월]

불완전한 비자의 외국인으로 사는 것; 비록 한 회사의 오퍼를 받고 입사일까지 정해졌지만 4월의 반은 사실 마음이 다른 곳에 있었다. 위에 얘기한 A사와의 팀매칭콜을 진행하고 있던 탓이었다. 3개 팀과의 콜을 하고, 마지막 팀에서 OK를 준 이후에, 다른 팀에서도 나를 뽑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 이제 다 끝났구나 싶었던 그때, 마지막으로 비자를 체크하던 리크루터로부터 최종 오퍼를 줄 수 없다는 메일이 왔다. 내가 현재 있는 비자 내에서 H1B 지원을 한 번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사실 여러모로 A사와의 팀매칭이 길어지고, 또 비자 확인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을 때 언젠가 어디서 어떻게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최종 면접 이후 거의 한 달여를 이끌려 다녔던 터라 속상함도 크고 왠지 후련한 기분도 들었다. 시니어포지션이라 아까웠지만 그래도 미국에서의 첫 회사생활을 시니어로 하는 것보다는 나를 뽑고 싶어 하는 팀에서 한 단계 낮은 mid레벨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런 나를 뽑아준 회사에 더더욱 고마움을 느낀다.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것을 이렇게 조금씩 체감하고 있다.


해외에서 사는 것의 슬픔; 해외에서 살다 보면 내가 언제까지 외국에 살게 될지 생각하게 된다. 5년? 10년? 그럼 친구들은 가족들은 어떻게 만날까. 모든 가족과 친구들이 한국에 있다 보니 여기서 새 친구들을 만들지 않고는 한국이 잠든 시간인 아침~오후 동안 꽤 심심한 날을 보낼 수밖에 없다. 4월의 어느 날 저녁, 나는 엄마에게 급한 연락을 받았다. 할아버지께서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한 2주 전에 한국을 다녀왔던 터라 오지 말라고는 하셨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날 밤 급하게 다음 날 아침 출발하는 비행기를 끊었다. 짐을 간소히 꾸려 한국으로 향했다. 하루라도 장례식을 함께할 수 있었다. 가족들과 시간을 좀 더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나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다.걱정스러운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나와 부모님을 보며 이런 해외 생활이 얼마나 가능할까 생각한다. 가족, 친구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 수 없는 삶. 언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삶. 그래도 이번에는 많은 것이 다행이었다. 돌아가시기 2-3주 전 한국에 방문했던 그때, 할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병원에 갔다. 해가 많이 따뜻한 따사로운 날이었다. 나는 휠체어를 끌고 병원 2층의 야외정원으로 향했다. 크게 돌아도 얼마 안 되는 그 야외정원을 겨우 몇 바퀴 돌았다. 돌이 중간중간 있어 휠체어 끄는 게 서툰 나는 조금 삐걱대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취업을 했다는 얘기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언제까지나 당신의 자랑이고 싶었다.


[5월]

기회는 생길 때 잡기; 5월에는 감사한 기회들이 있었다. 하나는 링글에서 요청 주신 웨비나 연사 기회였고, 하나는 한기용 님이 하시는 그룹 멘토링 참석 기회였다. 한기용 님이 이끄시는 그룹멘토링을들어갔는데 생각보다 그룹의 형태여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1:1이 아니라 그룹의 형태라 개인적인 얘기를 잘 못 나눌 줄 알았는데, 기용님께서 직접 얘기해 주시는 얘기도 좋았지만 세션 후 QNA에서 함께 나누는 이야기와 거기에 맞춰해 주시는 코멘트들이 특히 더 좋았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도 나와 비슷한 점이 있기도 해서 공감도 가고 나도 내 얘기를 많이 할 수 있었다. 또 그룹멘토링을 하던 도중 링글에서 웨비나 연사 제안이 왔는데, 그런 도전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룹 멘토링에서 얘기 나눌 수 있었다. 덕분에 용기를 내 첫 연사로서의 일에 도전할 수 있었다. 내가 나눌 수 있는 걸 공유하는 것도 즐거웠고, 또 도움이 되었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며 기뻤다. 나 취업기에 대한 스스로도 많은 정리가 되었다.


리모트 온보딩에서 매일매일 스스로 성장하기; 새 회사에서의 온보딩이 이번으로 네 번째이지만 이번은 좀 더 특별무료 카지노 게임. 처음으로 외국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과정을 리모트로 온보딩해야만 무료 카지노 게임. 궁금한 점이 생길 때 바로 옆/뒤자리에 있는 동료에게 물어볼 수 도 없고, 같이 밥이나 커피를 마시며 일과 팀에 대해 알아갈 수도 없다. 첫 한 주 동안은 공통 교육을 들었는데 내가 진짜 이 회사에 입사한 건가 긴가민가 하기도 무료 카지노 게임. 팀원들과의 1:1도 쉽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팀과 일에 대해 알아가면서 내 셀프 어필도 하고 어느 정도 친해지기도 해야 한다. 할 얘기를 적어갔지만 초등학생 실력의 영어로는 제대로 어필도 안되고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나는 시간들이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걸 얻으려고 한 걸까. 한국말로 무료 카지노 게임면 충분했을 텐데 하는 채우지 못할 아쉬움만 있었다. 나를 어필하려면 결국 내 적극성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 밖에 없었다. 하루에 하나씩 작은 것이라도 팀과 회사에 contribution을 하자. 작은 버그를 직접 리포트하고, 직접 고치기도 하고, 미팅에서 사소한 것이라도 질문해 봤다. 나를홍보하면서 그렇게 조금씩 일에 대해 알아갔다. 매일 하나씩 하다 보니 어느샌가 금방 팀원이 되어있었다,


[6월]

모르는 것은 배운 것으로 정신승리하기;매일매일 하나씩 해내며 스스로도, 팀도 만족스러운 첫 한 달을 보냈다. 두 번째 달에는 앞선 속도가 빨랐던 만큼 조금 주춤해졌다. 스스로가 느리게 느껴졌다. 첫 실험을 돌리는데 거의 한 달이 걸렸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하나하나 넘어갈 때마다 모르는 게 생겼다. 모르는 걸 마주할 때마다 암담해졌다.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언제쯤 다 알 수 있을까.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마음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 LOTD(*Learning Of The Day)라는 말을 만들었다. 매일매일 모르는 것을 만날 때마다, 매일매일 오늘의 새로운 배움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어떤 날의 LOTD는 평범한 줄임말이었다. 어떤 날에는 새로 알게 된 것을 슬랙에공유했다. 5월에 비해 여러모로 더디게 느껴진 6월이었다. 하나하나 깊게 알아가고 있다고 정신승리하며 보냈다.


180도 다른 환경을 받아들이기; 미국에서는 한국과 정 반대의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엔지니어도 프로덕트에 많이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취업한 회사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겪어왔던 것과 달랐다. 좋으면서도 가끔은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예를 들어, 나에게 일을 주더라도 기한이 없다. 심각한 버그가 아니면 백로그로 들어가 언제 고쳐질지 모른다. QA 없이 배포될 수도 있다. 엔지니어가 직접 실험 전반을 관리한다. 정말 많은 문서를 쓰고 발표한다. 코드의 컨벤션은 없거나 있어도 많은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코드의 퀄리티보다 빠르게 작동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정말 모든 것이 180도 달랐다. 내가 지금껏 해왔던 개발자의 일을 새로 정의해야 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워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일의 듀가 없으니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요청할 때 듀데이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로 설득을 해야 했다. 그것도 영어로.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실험 계획을 발표하면 거의 모든 팀원들이 한 마디씩 질문과 코멘트를 남겼다. 많은 것에 정답이 없어 내가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생각한 것보다 더 주도적으로 일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했다. 요청한 것에 답변이 늦어져도 그러려니, 코드리뷰하러 본 PR에서 고치고 싶은 것이 한가득 이어도 그러려니, 누군가가 QA 없이 배포한 기능에서 버그가 생겨도 그러려니. 이렇게 정반대의 업무 문화를 겪어보면 정말 나에게 맞는 것을 알 수 있겠지. 그래도 한 가지 안 것이 있다. 나는 생각보다 개발 자체에는 더 관심이 많고,발표하고 프로덕트의 세세한 것을 개선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덜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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