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중학교 2학년이 되던 겨울이었다.
집에서 카지노 게임까지는 버스로 한 번에 가는 노선이 없어 중동역 고가 아래에 내려 걸어가야 했다.
중동신도시 첫 입주세대로 이사하기 전까지는 혼자 동네 카지노 게임를 다녔다.
부모님께 같이 카지노 게임에 나가자고 어린 날부터 졸랐지만 바쁘다며 나중에, 다음에 라는 말로 거절하셨다.
걸어서 1분, 뛰면 30초 밖에 걸리지 않는 가게 바로 뒷 건물에 작은 카지노 게임였는데
일요일 1시간도 엄마는 허락하지 않으셨고 언니들도 카지노 게임는 관심밖이었다.
나 혼자 6년여를 다녔던 것 같다.
신도시로 입주를 하게 되면서 엄마는 규모가 큰 카지노 게임를 택해 다니시기로 결정하셨다.
이제 좀 먹고살만해졌다 하셨고 아빠에게 가게를 맡기고 다닐 수 있겠다 생각하셨는지 주말이면 카지노 게임에 나가셨다.
이사와 함께 엄마를 따라 카지노 게임에 다니게 되었고 엄마는 제법 체계적이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
학생부 활동을 권하셨다. 또래와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좋은 영향력을 얻길 바라셨다.
엄마의 권유에 성가대에 들어갔고 나쁘지 않았다. 노래하는 걸 좋아했고 특출 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것이 나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일요일.
1부~4부 예배까지 있는 카지노 게임였기에 시간대마다 성가대는 나이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마 그 당시에 난 1,2부 중 하나의 성가대원이었던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 걷다 고가 밑 계단을 넘어가야 했는데 아침 일찍 집을 나서도 해가 채 뜨기 전이였다.
칼바람이 부는 이른 아침이었다.
푸르스름한 길을 거북목을 한 채 걸었다. 점퍼 안에 최대한 몸을 접어 바람을 피했다.
고가로 올라가는 계단 직전에 고가 아래에서 웬 남자가 툭 튀어나왔다.
한눈에 봐도 노숙자였다.
얼마나 감지 않았는지 장발의 머리카락은 떡이 져 있었고 누더기 같은 옷을 겹치고 또 겹쳐 입고 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를 보고 잠시 멈춰 섰고 한 걸음 옆으로 피해 난 다시 거북목으로 무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었고 움직임이 없는 그의 행동에 의아해
흘깃 쳐다본 시선에 꽂힌 건 카지노 게임이었다.
불과 50미터 남짓 되었을까. 그 카지노 게임과 마주한 난 그 자리에서 멈췄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칼바람만 불어댈 뿐 아무도 없었다.
냅다 뛰기 시작했다. 두 계단, 세 계단을 넘어 앞만 보고 달렸다. 고가 위로 올라오자 차들이 지나다닌다.
뒤를 돌아보았다. 카지노 게임은 날 따라오지 않았다.
고가를 내려가는 계단에 다 달아 다리에 힘이 풀려 난간을 잡고 내려왔다.
지퍼 사이에 빨간 고구마 하나를 보았다.
그 카지노 게임을 잡고 있는 손은 때 묻은 검디 검은손이었다.
엄마에겐 성가대를 하기 싫다고 말했다.
아침 일찍 혼자 버스를 타고 가는 게 귀찮다고 했다.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난 그만두었다.
내가 성가대며 학생부 활동을 열심히 한다는 걸 주변 교인분들에게 칭찬받는 것에 뿌듯하셨던 것 같다.
고가 아래에서 만난 변태의 이야기를 했더라면 엄마의 핀잔을 들으며 그만두지는 않았을 텐데
난 또 그날 카지노 게임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겐 버릇이 하나 생겼는데 길을 걷다 맞은편에 걸어오는 남자들이 보이면 지퍼가 열렸는지를 보게 되었다.
더불어 실수로 지퍼를 올리지 않고 화장실에서 나오거나
지퍼가 고장이나 스르륵 내려가는 바지를 신경 쓰지 않고 입던 남자친구에서 극도의 화를 내기도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 지퍼 제대로 안 올리는 거랑, 운동화 접어 신고 질질 끌고 다니는 거야"
그땐 몰랐던 단어. 지금은 이것을 트라우마 라 부른다.
세 번째 카지노 게임은 나에게 이것을 선물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