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시간』 독후감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아름답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감상이 궁금하여 서평과 인터뷰 기사를 훑어보다 잠들었더니 악몽을 꾸었다. 남편과 내가 악을 쓰며 싸우는 꿈이었다. 젊은 시절 현실에서는 자주 펼쳐졌던 장면이다.
당시 남편은 우리의 싸움에 대해 ‘싸웠다’고 말하지 않고 자기가 나를 ‘혼냈다’고만 말했다. 늘 잘못된 것은 나였고 자기는 그것을 바로잡으려 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싸움의 이유에 더하여 남편의 그 권위적인 태도 때문에 더 화가 치밀었다. 자기는 나를 혼낼 수 있는 지위에 있다는 그 우월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소설에서 자해를 시도한 ‘그녀’에게 남편은 “미쳤군, 미친 여자한테 그동안 아이를 맡기고 있었어(p184)”라고 폭력적인 언사를 쓴다. 그 말에 맞서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긋고 찌르는 말, 쇳냄새가 나는 말을 조각난 카지노 게임처럼 우수수 뱉어”질 것 같아 ‘그녀’는 입을 다물어버린다(185). ‘그녀’가 두 번째 함구증에 빠진 것은 이 장면부터였다.
미쳤다는 말은 내 남편이 툭하면 내뱉었던 말이다. 카지노 게임 남편의 말이 기억 속에 묻혔던 내 남편의 잔인한 말들을 끌어낸 것일까? 현실의 남편은 폭력성이 거의 퇴화되었으나 자신이 나를 판단할 위치에 있다고 믿는 태도는 여전하다.
그러므로 나는 카지노 게임가 말하지 않는 이유를 백분 이해한다. 카지노 게임의 함구증은 폭력적인 언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희랍어 수업에 들어왔던 대학원생의 질문에서 카지노 게임 행동의 동기를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그녀’의 행동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고 나쁜 속성-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고자 하는-’에 카지노 게임 위해 입을 다물었다. 안염이나 녹에 대해 눈과 쇠가 저항할 수 있는 길은 없지만,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악에 저항할 수 있다. 인간만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도 자신이 당한 폭력을 되갚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유전병으로 인해 신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할 수도 있었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운명을 조용히 받아들이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희랍어 가르치기-에 매진한다. 그리고 한 마리의 새를 도와주다가 오히려 자기가 다친다. 저자는 타자에 대한 이러한 연민에서 인간의 조건을 찾는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은 인간이라 불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나’의 속에 있는 연민은 ‘그녀’의 연민을 만나 연대한다. ‘나’가 ‘그녀’를 껴안고 입을 맞추는 순간은 인간이라서 외로운 두 사람이 동종의 존재를 알아보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연한 부분을 드러내도 좋은 ‘나’의 앞에서는 더 이상 언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같아서 ‘그녀’는 드디어 입을 열고 단어를 발음한다. 어떤 독자는 그 단어가 ‘숲’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고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므로 일리 있는 말이지만 그 단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과 타인을 찌르지 않는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나도 언어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언어를 찾기 위해 문학을 읽는가 보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ps: 이 소설에는 사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딱 두 번 -‘나’의 독일인 친구인 요아힘 그룬델과 ‘나’의 동생 란- 나오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대명사로 지칭된다. 주요 인물들이 카지노 게임와 ‘나’, ‘당신’으로 지칭되는 것이 흥미롭다. 작가는 세상에 공간을 차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 조용히 말하는 연약한 존재들을 묘사하기 위해 그들에게 익명성을 부여한 것일까?